제118화 비밀속으로1
김혁은 모여 있는 저승사자들에게 간단하게 저승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줬다.
“악마가 새 리스트를 마련해줬어. 전국 곳곳을 다 다닐 수 있도록. 모두들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주던 걸?”
민하진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칭찬을요? 악마가 그런 것도 할 줄 안대요?”
어중이와 떠중이는 저승사자로서의 일처리는 그닥 신통치 않아서 늘 혼이 나는 쪽이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기도 했다. 그러니 하진이에겐 칭찬이란 게 생소할 수도 있었다. 주은정은 무표정하게 듣고만 있었다.
“우리가 좀 더 속도만 내면 좀비 세상이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더라고.”
“우와, 드디어 우리를 막 굴릴 작정을 했네 했어.”
민하진이 삐죽거리며 말하고 이어서 주은정이 말했다.
“그래도 우리만으론 힘들 걸요. 아직 뉴스조차도 안 나오는 걸 보면 걱정스럽네요. 이런 일일수록 사람들에게 알리고 신속하게 대응하는 게 중요한데 말이에요. 요즘처럼 정보 매체가 많은 때에 왜 아무런 뉴스도 안 나오는 거죠? 그냥 은폐해버리려는 건 아니겠죠?”
오수연과 정부 쪽의 대응이 느린 것 같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김혁도 그런 생각이 없진 않았지만 어쨌든 더 많은 사람이 속해 있는 큰 조직이 움직이는 데는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한 법이다.
“그건 아마 곧 되겠지. 그들에게 맡겨두자고. 장회장한테도 내가 단단히 일러뒀으니까 그쪽에서도 뭔가 대책을 세울 거고.”
장회장 얘기가 나오자 이번에는 떠중이가 질문했다.
“새벽에 장회장 데려간 거 아니었어요?”
“음. 새벽엔 이한태를 데려갔어. 장회장한테 시킬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을 시켜요?”
역시 민하진이 물어왔다. 하지만 대답해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거였다.
“차차 알게 될 거야. 자 이제 각자 구역을 나눌까? 아니면 함께 움직이는 게 나을까?”
김혁이 리스트를 꺼내 놓고 의견을 묻자 주은정이 먼저 대꾸했다.
“리스트 따라 같이 다니면서 빠르게 해치우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안 그러면 리스트가 없는 팀은 한곳에 계속 머물러야 하잖아요. 지금은 좀비가 그리 많이 퍼진 것도 아니니까요.”
“그치? 굳이 나눠서 할 정도는 아니지? 일단 같이 움직이고 상황 봐가면서 하자.”
“그게 좋겠어요.”
떠중이도 동의했다.
“그럼 일단 이쪽 마을 정리 끝내고 옆 마을로 넘어가자. 남자가 좀비가 안 됐다면 이 마을은 안전하단 얘기겠지? 남자를 풀어주고 옆 마을로 가자고.”
“네.”
저승사자들은 날아올라 동굴문 앞으로 갔다. 몸을 드러내고 나서 그들은 예의 그 비밀 노크를 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일단 이 마을에선 마지막 점검인 셈이었다.
넘버쓰리의 집으로 갔을 때 남자는 줄에 묶인 채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검은 오라는 안정적이었고 남자는 옅게 코를 골고 있었다. 물통의 물은 반쯤 비워져 있었다.
“얘들아, 부엌에 가서 뭐 먹을 거 있나 보고 가져 와.”
주은정과 민하진이 부엌으로 가 부시럭대며 여기저기를 뒤적여댔다. 떠중이가 남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지금 풀어주면 나쁜 생각 하지 않을까요?”
“이젠 우리 손을 떠나는 거지.”
김혁은 여자가 집밖으로 도망쳤던 것이나 좀비가 되기 직전 내뱉었던 마지막 독설이 모두 자신에게서 남자를 떨어뜨려놓기 위한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이상한 질문을 해대는 통에 악마에게 정확하게 물어보진 못했지만 이 남자를 향한 여자의 사랑이 그 독설 속에 스며 있는 진심보다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떠중이가 남자의 몸에서 줄을 풀려고 하자 남자가 눈을 떴다.
“너희들...!”
“좀비가 안 된 걸 축하한다. 운이 좋네.”
남자는 곧 무거운 몸을 일으켰고 줄에서 자유로워지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순간적으로 부엌에서 나는 소리가 아내가 내는 소린가 착각한 모양인지 방에선 보이지도 않는 부엌 쪽으로 귀를 세우며 기웃거리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김혁은 남자의 앉은키에 맞춰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우리 요원들이야. 솔직히 놀라운 걸? 그렇게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좀비가 됐는데도 멀쩡하다니. 혹시 모를 안전을 위해 당분간은 이 집은 폐쇄된 채로 그냥 두겠어. 혹시 밖에서 좀비가 침입할 수도 있는 거니까. 우리가 한번 씩 들러서 돌봐주도록 하지.”
남자는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상관 마. 내버려둬.”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김혁이 몸을 일으키고 주은정이 밥과 반찬이 담긴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남자가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미인들이란 어느 정도 비슷한 매력이 있는 법. 어쩌면 그의 아내와 닮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혁도 주은정의 얼굴을 다시 한번 뜯어봤다. 머리스타일이나 체형은 달라도 날카로운 콧날이나 차갑고 도도해 보이는 이미지는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쟁반을 조심성 없게 바닥에 탁 내려놓으며 주은정이 한 말은 그런 모든 것들을 털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내 평생 밥상 차리는 일은 처음이라,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어.”
앳된 미소녀의 거침없는 반말과 불손한 말투가 그의 흥미를 끌었는지 아니면 너무 이상해보였던지 그는 계속 주은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주사장 딸이지?”
“뭐?”
주은정이 무슨 말인가 싶어 남자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과 착각할 수는 있지만 같은 성씨를 들먹이는 데는 의문을 안 가질 수 없었다.
김혁은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저 남자가 주은정을 어떻게 알지? 주은정 가족이 이승을 떠난 건 10년 전 일인데다 모두가 죽었다는 건 다 알려진 사실인데 남자가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지 의아했다.
“많이 닮았네. 엄마를 꼭 빼닮았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주은정이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으며 일어섰다. 남자가 주은정의 얼굴을 따라 올려다보며 다시 말했다.
“모두 죽은 줄 알았는데 그 꼬맹이가 살아 있었던 모양이지?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 생떼 같은 자식들을 어떻게 그래? 아무리 괴짜 양반이라도 그런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주은정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지금 나온 얘기만으로도 자기 가족 얘기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곳에서 자신의 가족을 아는 자를 만나게 될 줄 전혀 몰랐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장한조와 민하진도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혁은 저 남자의 입을 막아야 하는가 그대로 두어야 하는가를 고민중이었다. 남자가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고 뭔가 아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모든 비밀을 알게 됐을 때 주은정은 어떻게 될까? 그동안 궁금해 했던 미스터리한 죽음의 이유나 그동안 몰랐던 아버지의 비밀을 알 수 있으니 반가워 할 종류의 이야기는 아닐 터였다.
“은정아!”
김혁은 주은정을 바라보았다. 그냥 나가버리거나 뭐라고 말한다면 그걸 따라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주은정은 남자를 노려보며 꼼짝도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곧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를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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