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비밀속으로2
남자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주상훈이지? 알지 잘 알고말고. 너도 알고 온 거 아닌가? 복수하기엔 딱 좋은 타이밍이네.”
주은정은 설마하는 표정과 예민함을 담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뭘 알고 있는지 다 말해.”
“이런 우연이 있나. 그래 나야. 네 아빠한테 어여쁜 마누라를 장기매매단에게 넘기겠다고 하고 예쁜 딸들을 사창가에 팔아버리겠다고 했던 게, 어때?”
남자는 서늘하면서도 기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건 슬픔 같기도 하고 비열함 같기도 한 웃음이었다.
김혁은 그 남자의 저의를 알아차렸다. 그는 주은정을 자극해서 자신을 죽여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였다.
“넌 너무 어려서 잘 모르겠지.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맞아 다 기억나. 주사장은 손이 발이 되게 빌면서 시간을 좀 더 달라고 애원했지. 막내가 갓 학교에 들어갔다면서. 조금만 시간을 주면 다 잘 될 거라고 빌고 또 빌었지. 잘 자랐군.”
남자는 주은정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는 주은정을 10년 전 가장 어렸던 그집 막내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겐 10년이 정상적으로 흘렀을 테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꼬마가 그때 죽지 않고 자라서 자기 앞에 서 있다고 확신하는 듯 했다. 주은정도 그런 사실을 정정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는 듯 다른 질문을 했다.
“너희들이 협박해서 우리 아빠가 그렇게 했다는 얘길하고 있는 거야?”
온 가족을 끔찍하게 살해한 남자에 대한 기억은 모두에게 다를 것이다.
“주사장이야 뭐 그때 어디로 도망칠 데가 없긴 했지. 그런 끔찍한 짓을 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그는 알았던 거야. 위장이혼 같은 걸로는 우리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한동안 방안엔 무거운 침묵만 감돌았다.
주은정이 자기가 들고 와 얌전히 놓아둔 쟁반을 걷어찼다. 날아간 쟁반이 벽에 부딪쳐 그릇들이 산산이 조각났다. 벽이 우르릉 흔들렸다. 벽이 파손 된 부분에 약간의 밥덩이가 그대로 박혀 있었고 부서진 유리조각이 문 앞까지 날아갔다.
“그런 말을 지금 왜 하는 거야? 너.”
주은정이 남자의 목을 손아귀에 쥐었다.
“은정아!!!”
“주은정!!!”
김혁과 민하진이 동시에 소리쳤다. 간단히 힘만 주면 남자의 목은 그 손아귀 속에서 바스라지고 말 거였다.
“내가 널 죽여주길 바래? 정말?”
남자는 저항하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은 주은정의 하얀 손아귀 속에서 발갛게 물들었다. 남자가 곧 목이 비틀려버릴 것 같은 순간이지만 김혁은 더 이상은 말릴 수 없었다.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 그 복수에 사로잡힌 마음이 어떤 건지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지옥에서 지상으로 돌아온 첫 밤, 고아원 원장을 찾아갔던 그 깊은 밤에 잠든 원장을 내려다보며 김혁이 한 생각은 그저 복수뿐이었다. 그동안 저지른 죄갚음이라는 생각과 지금 데려가지 않으면 나머지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죽어 마땅하다고 믿었고 그렇기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원장의 가슴에 주먹을 날릴 수 있었다.
저 사내, 검은 오라를 가진 사내는 그동안 온갖 악행을 다 일삼았으리라. 저 남자를 지금 당장 저승으로 보낸다고 주은정이 어떤 벌을 받거나 하진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건 앞으로 주은정에게 두고 두고 자책으로 남을 가능성이 컸다. 환상속에서나마 복수를 실행해본 경험자로서 말려야 한다는 생각과 주은정에게 맡겨둬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김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악마 넌 알고 있었나? 이런 일이 벌어질지를? 김혁은 속으로 그런 말을 되뇌었다.
끔찍한 침묵의 순간이 지나고 주은정은 손을 털고 일어나 그냥 방을 나가버렸다. 떠중이가 따라 나갔다.
“크헉, 켁켁. 뭐, 뭐지? 왜.. 왜...”
남자가 자기 목에서 죽음이 거두어진 걸 의아해하며 오히려 당황스러워했다. 김혁은 조용히 말했다.
“아직도 그 생각을 고쳐먹지 못했나?”
“난 나쁜 짓을 참 많이도 했지. 내가 무엇으로 천국을 가지?”
“너무 빨리 포기하는 거 아닌가? 아직 생이 많이 남았을 텐데. 착한 일은 죽어도 못하겠다는 건가? 아내에 대한 사랑이 그것밖에 안 되나?”
“...!”
“그때도 조만호 밑에서 일하고 있었던 건가?”
“그렇다.”
“조만호가 주사장에게 이 마을을 뺏은 거군.”
“그런 셈이지. 주사장은 자신의 꿈이 담긴 이 곳을 지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 결국엔 어떻게든 팔아서 빚을 갚으려 하게 됐지만. 그때 팔리기만 했다면 빚은 다 갚고도 남았지. 팔리지 못하게 했다는 게 문제지. 여러 가지 악의적인 소문들을 퍼뜨리고 매수 의사를 밝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은근히 위협적인 말들을 흘렸어. 그러니 아무도 사겠다는 사람이 없을 수밖에. 뭐 그런 식으로 남의 재산 빼앗아오는 거야 늘 우리가 하던 일이니 이런 거 뺏는 건 식은죽 먹기였지.”
대체 조만호가 저지른 악행은 얼마나 되는 걸까? 문득 40년 전 으슥한 공원에서 동급생에게 돈을 뺏으려 하던 불량소년 적의 모습이 떠올랐다. 돈을 못 구해왔다며 쓰러진 친구를 가차없이 걷어차던 그 모습이 그의 본질이었을 거라는 생각. 사람은 실로 변하기가 어려운가?
“주사장이 그렇게 가버리고 이 마을은 헐값에 몇 사람 손을 거쳐 값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결국 우리 수중에 들어왔지. 하지만 나기로 했던 도로 계획도 무산되고 결국 버려진 마을이 됐고 이제는 좀비까지...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우연일까? 응? 지난 밤 내내 난 그 생각을 했지. 그 죄를 받는가 그런 생각들. 근데 오늘 내 앞에 그 딸이 나타난 걸 봐봐. 정말 운명이란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정말 저 앤 아무것도 몰랐단 건가?”
“...”
“하긴 어린애가 뭘 알았겠어.”
“너는 조만호가 시키는 일을 하면서 조금도 마음의 가책이 없었나? 이런 일들을 즐겼나?”
“즐겼나구?”
“주사장이 온 가족을 몰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어땠지?”
“...!”
“저 아이가 손아귀에 힘만 줬어도 넌 벌써 끝났을 거야. 저 어린 친구가 왜 손을 놓았는지 한번 잘 생각해봐라.”
남자가 고개를 떨구었다. 돌아서 나오려는 김혁과 민하진에게 남자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주사장 딸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그 아버지한테나 지금 내가 한 짓도 다 미안했다고.”
김혁과 민하진은 조용히 집을 빠져나갔다. 주은정은 골목길을 구분지어 놓은 돌담을 짚은 채 서 있었고 떠중이는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그런 은정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골목 저 끝엔 강탄이도 서 있었다. 강탄이 역시도 주은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은정이 돌 하나를 꽉 쥐자 돌은 손에서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속눈썹을 내리 깐 채 속으로 울고 있는 예쁜 여자아이. 김혁은 주은정이 왜 원수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뺏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역시 속이 깊은 아이라는 생각 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모두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을에는 조용히 어둠이 내리 깔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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