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비밀속으로5
주은정은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김혁은 역시 묻지 말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변명이라도 하듯 다른 말을 덧붙였다.
“하진이는 좋아하는 찬수를 구하기 위해서였고 한조는 부모님 때문이었잖아. 그런데 넌? 넌 왜지? 정말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주은정은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가 결심한 듯 김혁을 바라보고 대꾸했다.
“선배님만 알고 계세요.”
김혁은 저도 모르게 은밀한 기분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가 약속했거든요. 지옥불에서 불타는 주상훈을 보여주겠다고요.”
“뭐?”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니, 정말 그런 걸 보려고 했단 말인가?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이 지옥불에서 불타는 걸 태연히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장면을 보면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떠안을 걸 알면서 그걸 원했다는 건가? 김혁은 이해할 수 없어서 주은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는 그게 꼭 보고 싶었어요. 그게 다예요.”
‘천국에 갈 뻔한 아이’의 기준에는 인간일 때 저지른 잘못이나 소소한 악행 같은 것들만 들어가는 건 아닌 모양이다. 주은정이 자신처럼 주먹질을 했던 것도 아닐 테고 누굴 괴롭혔단 소리도 듣지 못했으니 삶에서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피로 전해지는 유전적인 기질도 포함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의 눈으로만 판별 가능한 기질. 남모르게 품는 악한 마음, 타인의 불행에도 무감하고 언제든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도 있는 기질, 핏줄을 통해 전해지는 어둠의 기운. 그의 아버지가 온 가족을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기질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지. 혹시 또 모르는 뭔가 다른 게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주은정네 가족은 미스터리하다.
“그래도 너희 가족에겐 좋은 가장이었잖아. 그 밤을 빼고는... 아주 행복한 가족이었다고 들었는데?”
주은정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모든 게 부족함 없고 불행하지도 않았어요. 남들 보기엔 화목해 보였고요. 하지만 그게 꼭 행복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런가? 고아원 생활과 비교하면 주은정네 집은 천국 같은 삶일 거라고 짐작해 본 적은 있지만 가족의 정이나 풍족함을 경험해본적도 없고 그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김혁으로선 그게 어떤 건지 확실히 이해가 되진 않는다.
“그땐 저도 겨우 열 일곱 살짜리였잖아요. 악마가 그런 제안을 했을 때 거절하기 힘들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낯선 곳에 뚝 떨어져버렸고 내가 죽었다는 걸 안 다음이니까요. 내 모든 게 사라져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기분은 뭐 선배님도 잘 아실 거고.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판단이 될 수가 없잖아요.”
주은정은 잠시 말을 끊고 김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날 그렇게 만든 그 사람이 밉기도 했고 불타는 죄를 보면 대체 왜 그래야만 했는지 알아낼 수도 있을 거고. 그 순간 절 사로잡고 있던 건 증오와 복수심보다도 미칠 듯한 궁금증이었어요. 거기에 악마가 불을 당긴 거죠.”
김혁은 지옥문 앞에서 악마를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렸다. ‘난 나를 원하는 사람에 의해 태어나지.’ 악마는 그렇게 말하며 눈앞에 나타났었다. 그 순간 잘못된 선택을 하는 과정은 김혁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니 그건 악마 앞에 던져진 모든 저승사자감 인간들은 반드시 걸려들 수밖에 없는 마수(魔手)였다. 증오나 복수심 따위 악마가 먹어치울 감정이 있어야 악마를 만나게 되는 거고 악마는 그런 이들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있으니 그에 꼭 맞는 맞춤형 제안을 하고 결국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봤어? 그... 불타는 죄 속에는 이 자들이 없었던 거야?”
김혁은 좀비들이 묻혀 있는 봉긋하게 솟아 있는 땅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옥불에서 타고 있는 아버지의 죄를 봤다면 주은정이 조만호나 넘버쓰리를 만났을 때 아무것도 모를 리 없기 때문이었다. 주은정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아직 못 봤어요. 보고 싶은 마음과 보지 말자 하는 마음이 여전히 싸우고 있어서요.”
“...!”
그 말엔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무서운 아이긴 하나 저 깊은 바닥까지 어둡진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고 갈등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미워하는 그런 마음들 때문에 괴로웠을 10년이리라.
“그러고 보니 제가 제일 못된 애 같네요? 선배님은 첫사랑을 구하기 위해서였고 하진이나 한조도 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길을 선택했는데 말이에요. 헌신과 희생 뭐 그런 것들.”
주은정은 쓸쓸하게 웃었다. 싱그러운 풀내음을 실은 바람이 주은정의 짧은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갔다.
“못됐긴 뭐가 못됐어? 악마 앞에 떨어지는 건 다 같은데.”
복수의 명분이 꼭 헌신과 희생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필요할 때도 있는 법. 정말 그 순간 악마 앞에 있어보면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상이고 무엇보다도 주은정은 악마가 쳐놓은 그 유혹의 그물에 가장 걸려들기 어려운 존재였을 거였다. 우리 중 누구보다 가장 천국을 선택하기가 쉬웠던 아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을 포기하는데 자신의 의지가 가장 많이 작용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천국엔 엄마와 동생들이 있고 지옥엔 아빠가 있는데 단순히 지옥불을 들여다보려고 천국을 포기했다니.
“제가 괴물 같아요?”
“응?”
“학교 친구들이 멀어지기 위해서 가끔 그런 말을 하곤 했어요.”
“왜? 네가 어때서?”
“모르겠어요. 그 이유까진 얘기해주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도 괴롭히지 않고 아무한테도 피해를 안 입히려고 노력했는데도 결국 듣는 말은 그런 거였어요. 그냥 제가 남들과 뭔가 좀 다른가봐요.”
교실의 아웃사이더였나? 괴물이란 소리를 들은 건 아니지만 학교 짱이라는 이유로 김혁 역시 거의 혼자였던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무시되거나 거절이 힘든 존재로 산다는 것도 외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주변 아이들은 피하지도 않았지만 늘 눈치를 보고 속마음을 숨기려고 했다. 마음을 나눌 정도의 친구는 없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완벽해서 질투한 거 아닐까? 좀 차가워 보이고 가까이 가기 어렵게 만드는 건 좀 있지만 너처럼 예쁜 괴물이 어딨어?”
주은정이 너무 울적해 보여서 칭찬을 끼워 넣어봤지만 사실 좀 어색한 느낌이었다. 어색함을 가리려고 김혁이 웃자 주은정도 살풋 웃었다. 분위기가 좋은 걸 틈타 김혁은 평소 궁금했던 걸 마저 물어보자 생각했다. 오늘 다 물어보지 않으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듯 싶다는 핑계로.
“근데 은정아, 악마가 너한텐 어떤 환상을 줬어?”
악마는 저승사자들이 못다 한 생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 혹은 이루고 싶어하는 것들로 환상을 짜주곤 했다. 그거라면 주은정의 꿈이 뭔지 이루고 싶었던 게 뭔지 자연스럽게 알아낼 수 있다. 어쩌면 교실의 아웃사이더를 교실의 최고 인기인으로 만들어주는 환상, 그게 아니면 아빠와 함께 세트장 마을로 드라이브를 떠나는 사이좋은 부녀를 만들어줬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주은정의 대답은 김혁의 그런 모든 상상을 깨뜨리는 허무한 것이었다.
“전 환상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뭐? 왜? 정말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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