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비밀속으로6
김혁은 이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악마가 주은정에게 늘 예외를 두는 이유는 뭘까? 얘는 아직도 분노나 증오를 태우는 중인가? 모두 천국에 갈 뻔한 아이들이라 그런 과정이 10년이나 진행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저승사자들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인 건 분명했다.
“악마가 잘못했네. 넌 천국에 갈 뻔한 아이라기보단 그냥 천국으로 보냈어야 하는 앤데 아니 그게 아니라 악마가 진실만 말해줬다면 네가 끝내 그런 선택을 했을 리도 없을 텐데...”
분노나 증오심보다 궁금증이 더 컸다면 그 이유만 알았어도 지옥을 선택하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역시 악마가 나쁜 거다, 김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주은정이 대답했다.
“악마가 진실을 말해줬다면 아마 이 원수들을 해치우려고 지옥을 선택했겠죠. 궁금증이야 해소됐겠지만 마음속 증오나 분노는 그렇게 쉽게 사그러드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천국으로 가지 못한 건 다 그 맘속 혼란들 때문이었으니까요. 선배님도 아시잖아요. 네 죄를 다 태웠다, 그거.”
“...?”
주은정이 미소지으며 악마 흉내를 내려다 말았다. 민하진보다는 연기가 어색해 보이진 않았지만 본인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영 쑥쓰러운 듯했다.
저 말을 들은 걸로 봐서 역시 죄를 태우고 있는 중은 아니란 건데... ‘네 죄를 다 태웠다’란 말은 악마의 마수에 걸려든 자들에게 시험적으로 쥐어준 리스트 임무가 끝나면 악마가 무슨 의식처럼 하는 말이었다.
주어진 리스트 임무를 마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는 게 있다나 뭐라나. 꼴에 미소년 천사로 변장해서 착한 척을 해대며 한바탕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고는 손에 든 요술봉으로 머리를 딱 때리며 ‘네 죄를 다 태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저승사자로 영원히 매이게 되는 환영식 같은 거랄까.
김혁도 1년여의 리스트 임무를 마쳤을 때 어김없이 그런 의식을 치렀다. 곧바로 환상 속으로 떨어졌고 거기서 첫사랑인 서정과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고 지지고 볶고 싸우는 일상을 살았다. 악마가 김혁에게 준 첫 환상은 10년 짜리였다.
그나마 환상이 저승 생활을 달콤하게 만드는 부분인데 악마가 주은정에겐 왜 그런 보상을 생략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아이는 환상도 체험하지 못했음에도 10년 만에 저런 생각에 도달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다. 정말 빨리 깨우쳤다고 볼 수 있다. 벌써 저런 생각까지 하다니. 저승사자 생활을 한지도 몇 십년 차이나 나고 환상도 여러 개를 거친 자신도 요즘 들어서야 겨우 슬슬 악마가 조금 이해되는 느낌인데 저 아이는 이미 악마에 대한 미움조차 없는 듯 보인다. 정말 그런가 싶어 슬쩍 물었다.
“악마가 원망스럽진 않고?”
“선배님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꽤 원망한 적은 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더 나쁜 건 지옥불에 갈 저런 놈들이고 그런 짓을 저질러 버린 그 사람이고 복수심을 버리지 못한 저란 걸 깨달았죠. 하진이나 한조한테는 비밀인데요. 사실 내 죄를 다 태웠다고 했던 날 저도 환생의 기회를 얻었었어요.”
“정말?”
김혁은 정말 깜짝 놀랐다. 이건 정말 상상도 못한 이야기였다. 여태까지 악마가 환생을 선택하게 했던 저승사자는 김혁이 유일했다고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김혁은 10년 짜리 환상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야 그런 말을 꺼냈었는데 말이다. 김혁이 주은정을 놀란 눈으로 바라고 있자 주은정이 다짐하듯 말했다.
“이건 앞으로도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어... 근데 왜 환생하지 않았어?”
김혁이 환생 제의를 받았을 때는 다시 아기가 돼서 모든 일을 다시 시작한다는 게 너무 번거롭게 여겨졌었다. 망설임이 길어지자 악마가 멋대로 저승사자 할 거지? 이렇게 몰아간 면도 없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환생을 못하고 40년 동안이나 지옥에 매인 몸이 됐지만 주은정마저 똑같은 선택을 했다는 것에선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만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저승사자라고 꼬드겼나? 아니면 얘도 그저 얼떨결에 그렇게 된 건가? 주은정의 대답은 역시 또 예상을 빗나갔다.
“그냥 전 저로 더 살고 싶었어요. 전 제가 좋거든요.”
나로 살고 싶었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단 얘긴가? 자신의 아버지는 지옥불에서 타고 있고 언제든 지옥불을 보면 아버지 생각을 안 할 수도 없을 텐데 굳이 문지기들을 대신해서 죄인들을 짊어지고 가 쳐넣는 거나 모든 걸 깨끗이 잊고 환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걸 거절했다는 것이나 전부 이해가 어렵기만 하다.
“지금의 너랑 비슷한 조건으로 해달라고 하면 됐잖아.”
“그래도 그건 제가 아니니까요.”
“환생할 걸 하고 후회도 안하고?”
“네.”
주은정의 속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김혁은 이내 이해하길 포기했다.
“어렵네.”
“뭐 선배님이 환생하지 않은 이유랑 비슷하지 않을까요?”
“나? 난 그저 어쩌다 보니까 그냥 그렇게 된 건데 뭐. 악마가 더 부려먹으려고 설레발 친 것도 있고.”
주은정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아닐걸요. 진짜 환생하길 원했으면 곧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했을 거예요.”
“그럴까?”
“망설인다는 건 뭔가 마음을 붙드는 게 있다는 거고 그건 사실 알고 보면 버리기 싫은 것인 경우가 많죠.”
얘기를 하다 보니 점점 더 주은정이 자신보다 더 오래 산 것 같은 착각이 드는데다 세상사에 초연한 느낌마저 든다. 열 일곱에 저승으로 왔고 10년 동안 저승사자 생활을 한 아이가 그 두 배 이상을 살면서 사색하고 고민한 저승사자보다 더 어른스럽다니. 자신이 환생하지 않은 이유가 버리기 싫은 어떤 것 때문이라곤 생각해본 적 없었던 김혁으로선 새로이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버리기 싫은 것?”
“네.”
버리기 싫은 것이라... 김혁으로 살아서 좋은 건 뭐였지? 어떤 기억이 버리기 싫었나? 금방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근데 선배님 우리 여기서 시간을 너무 지체하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시간이 꽤 흘렀는지 밤하늘엔 보석 같은 별들이 잔뜩 떠서 총총했다.
“그 여자 좀비는 그냥 두나요?”
“응?”
“그 짱돌인가 하는 사람 애인이요.”
아 맞다. 그 여자를 잊고 있었다. 하얀 시트에 묶여 바닥을 구르던 그 여자. 유지성에게 그 좀비를 살려둬야 하는지 마는지 확답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꼭 뭔가 하나씩 빠뜨린단 말이지.
“장회장한테 들리기 전에 내가 한번 들러볼게.”
“네, 그럼 이제 갈까요?”
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은정이 씩씩한 체 하며 먼저 솟아올랐다. 김혁도 날아올랐다. 둘은 말없이 하늘을 날아 숲을 넘고 차로 갔던 길을 따라 시장이 있는 마을로 향했다.
김혁은 날아가면서 내내 생각했다. 자신이 버리기 싫은 게 뭐였을까를. 그들이 지나는 자리마다 별들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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