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나 저승사자라니까!
김혁이 구름 속에서의 짧은 고뇌를 끝내고 마침내 장회장을 찾아갔을 때 그는 어떤 방에 혼자 있었다. 근심걱정 없는 얼굴로 값비싼 술병을 새로 따 잔에 따르고 있었다. 안락함을 느끼게 하는 조명과 세상과 차단된 듯한 고요 속에 쪼로록 떨어지는 맑은 술.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세상의 모든 혼란에 눈 하나 깜짝 않고 이런 안락한 곳에서 평안을 맛보고 있는 이 늙은 남자를 저 밖 좀비들에게 던져주고 제대로 된 공포를 맛보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약간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가라앉히고 김혁은 곧바로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레 자기 앞에 나타난 김혁을 보고 장회장은 깜짝 놀란 나머지 들어 올리고 있던 술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 어떻게 여기에... 여길 어떻게 들어왔지?”
김혁은 잠시동안 싸늘한 시선 그대로 장회장을 쏘아보았다. 어서 빨리 지옥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여기서 불필요한 대화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디 있든 널 찾을 수 있다고 말했을 텐데?”
“여긴, 여긴 패닉룸인데 어떻게 들어왔냐는 말이지.”
장회장은 문 쪽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김혁도 방안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패닉룸이라고? 결국 어떻게든 숨기로 작정했단 말이지? 이런 곳에서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이지? 그가 끝까지 숨어 있는 것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다는 생각에 더 화가 치밀었다.
“유언장은 어딨지? 위로금은?”
“그, 그러니까 그건...”
“없다는 건가?”
김혁은 무서운 표정을 하고 방의 여기저기서 번개보다 빠르게 몸을 나타냈다 사라졌다 하며 장회장 쪽으로 조금씩 다가들었다.
장회장은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얼어붙었다. 잔뜩 겁에 질려 공포의 냄새를 한껏 뿜어대며 그냥 선채로 뚱뚱한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해졌으며 손은 벌벌 떨고 있었다.
“너는, 넌... 뭐지?”
“저승사자.”
장회장은 의문스런 눈으로 김혁을 바라봤다.
김혁은 여기선 더 이상 설득 같은 것, 의심을 녹이는 행동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넌 오늘 저승으로 간다. 유언장을 써! 여기가 패닉룸이라면 여기서 작성한 유언장은 그야말로 당신밖에 못 쓰는 거겠지?”
장회장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저승사자라니...? 그게...!”
장회장은 떨리는 눈동자로 김혁을 바라보았다. 공포의 냄새가 더욱 진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좀비가 이 도시에도 퍼졌다. 내일이면 모두가 알게 될 테지. 전 재산을 좀비퇴치기금으로 헌납하는 걸로 하지.”
“전 재산? 어제는 반이라고 하지 않았나?”
“난 네게 하루를 줬고 넌 그걸 안 했지. 그에 대한 벌이다.”
장회장은 잠시 김혁을 바라보더니 눈빛에 활기가 돌았다.
“이제 보니 오박사가... 그거군. 그 초능력자... 이렇게 내 재산을 뺏으려고 하는 거로군?”
“무슨 헛소리야?”
이제 장회장은 미소까지 머금고 말하기 시작했다. 말을 하면서 푹신해 뵈는 1인용 안락의자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오박사를 데리러 갔던 녀석들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던 정체불명 사내가 있었다더니 네가 그때 그 남자지? 응? 저승사자 같은 게 어딨겠나? 똑똑한 여자라더니 역시 대단한 걸 만들어냈나보군. 뭐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런 기술을 이런 하찮은 데다 써먹다니.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인 걸? 이런 식으로 속여가며 남이 평생 피땀 흘려 일군 재산을 빼앗으려는 건가? 안돼.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어.”
장회장은 제 눈앞의 남자를 저승사자라고 믿기보단 초능력자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헛소리야? 그딴 말 집어치우고 유언장이나 어서 쓰라고. 시간 없다니까?”
“우리도 다 알고 있어. 사후세계가 있는지를 알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연구에 돈을 댔지.”
저건 또 뭔 소린지. 그런 실험에 결론을 얻는 게 가능하긴 한 건가? 죽어야 도착 가능한 곳. 산 자들이 그걸 알 리가 없다. 되든 안 되든 인간들은 무엇이든 한다. 어디선가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결론을 얻은 실험을 발표한 걸 본 적은 있다. 죽기 전과 죽음 후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 그게 영혼이 빠져나간 무게라고 하든가.
사후세계를 체험한다며 임시로 죽었다 살아나는 실험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다. 영영 지상으로 못 돌아가고 지옥으로 떨어져버린 그들이 오면 악마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었다. 죽음 가지고 장난치는 건 아니지.
그런 실험들에 돈을 댄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자란 말인가? 그가 이 리스트에 올라 있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김혁이 장회장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장회장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결국 사후세계가 없다는 걸로 결론이 났단 말일세...”
결론이 났다고? 저승사자 앞에서 웬 말도 안 되는 단정을 저리 앙팡지게 하는지.
“누가 그런 결론을 함부로 내?”
정말 어이가 없었다.
“저승사자라고 하면 유언장이고 뭐고 내가 금방 다 써줄 줄 알았나? 응?”
“그런 결론이 어떻게 가능하지? 죽은 다음에야 아는 일을. 정말 사후세계가 없다고 확신해? 정말 그걸 믿는다고?”
“물론.”
김혁은 지금 이 자리에서 사후세계가 있나 없나 그런 걸 가지고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지옥이 있는 줄 알고 지옥으로 가나 모르고 가나 지옥에 가는 건 마찬가지고 곧 알게 될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 여기에 남길 유언장은 어떻게든 쓰게 하고 싶었다. 아무리 악마가 삥을 뜯네 뭐네 비난해도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게 한 이 남자를 그냥 곱게 보내주고 싶진 않았다.
“뭐 믿든 안 믿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지옥불에 처박혀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낸 연구자들을 실컫 욕하든 말든 하는 것도 네 자윤데 유언장은 쓰자. 시간 없다.”
“그냥 죽여라.”
장회장은 의외로 단호했다.
“그럴 수 없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건 안 한다.”
“왜? 어차피 남겨질 돈 좋은 일에 쓰면 좋잖아? 당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는 일이기도 하고.”
“내가 그런 유언장을 쓰면 사람들은 좋은 일 한 것보단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겠지. 제약회사 회장이 그런 유언장을 썼다? 결국 좀비 사태의 원인 제공자가 아닐까 생각하겠지. 나 하나의 손실과 우리 기업의 손실은 다르지.”
“이 세상에 제약회사가 너희뿐이냐? 정부가 같이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 일은 드러나지 않을 텐데. 타임머신 연구소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는 믿기도 힘들 거고 말이지. 좋은 일은 결국 좋은 일로 남는 법이야. 너희 기업 직원들이나 너희 가족은 좀비가 안 될 것 같은가? 좀비퇴치재단을 만드는 건 결국 모두를 위한 일이 될 거야. 이 생에서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야 지옥에서 덜 고통 받을 텐데도 싫은가?”
“지옥 같은 건 없어!”
김혁은 방안을 서성거렸다. 결국 지옥이 있는가를 믿게 하는 일의 문제인가? 뭘로 믿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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