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인연의 고리 2
장회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40년 전에 그 아버지를, 후에 그 아들을 데리러 온 건 저승사자 가 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40년 전에 만났던 오수연과 그 딸을 다시 만난 거나 서정과 그 딸들을 만난 건 이것과 다른 거다. 이곳에 살며 관계가 얽혀 있기에 보게 되는 것하고 차례로 지옥에 동행하는 건 기분 자체가 다르니까.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들이 극락리 시골 고아원을 찾아갔던 그 사람들이 맞아?”
이번엔 김혁이 질문하는 처지가 됐다. 착각이란 건 누구든 할 수 있으니까. 장회장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겨울밤에 여자 교주와 수행비서가 같이 죽는 일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 제법이야. 내가 그의 아들인 건 어떻게 알아냈지? 관계를 추적할 만한 건 오래전에 다 없앴는데?”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 남자의 이름까진 기억나지 않았다. 지난 40년간 취급해 온 리스트만 해도 엄청나기 때문에 그 이름들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고향의 고아원과 얽힌 사람들이고 악마와 계약 한 첫 리스트에서 마지막으로 데려갔던 인물이라 기억이 더 많이 남아 있는 것뿐이었다.
눈이 오는 밤, 차 안에서 열심히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던 중년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거 참 놀라운 우연이네. 진짜 당신 아버지란 말이지? 내 저승사자 생활 40년만에 이런 일은 처음이거든. 뭐 좋은 데라고 거길 부자가 나란히 참...”
장회장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지옥은 없는지 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 정부와 협조하며 정말 많은 일들을 해왔지. 대체 왜 뒷조사까지 해가면서 내 재산을 뺏으려 하는지 모르겠군. 지금처럼만 간다면 서로 얻을게 훨씬 많을 텐데.”
“뒷조사 같은 건 안해. 그런 거 하는 저승사자가 어딨어? 내가 초능력자고 정말 재산 갈취가 목적이라면 굳이 저승사자니 뭐니 떠들 필요가 있을까? 귀찮게 뒷조사는 왜 해? 딴 거 필요 없이 손가락이나 부러뜨려가며 고문하는 게 효과적일 건데.”
김혁이 말을 마치고 탁자로 다가갔다. 장회장이 떨어뜨렸던 술잔의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발에 밟혀 바작바작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김혁은 그런 것엔 아랑곳하지 않고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다른 한손으로 병의 주둥이 부분을 가볍게 쥐었다 놓았을 뿐인데 유리가 손가락 사이에서 금새 하얀 가루가 되어 반짝이며 흩날렸다. 장회장의 표정이 바뀌었다. 김혁은 주둥이가 부서진 술병을 탁자에 다시 놓고 말했다.
“아니 진짜 그런다는 건 아니니 안심해.”
하룻밤 새에 이 남자 안에 쌓아온 견고한 벽을 이 유리 알갱이처럼 간단히 바스러뜨리는 건 무리다. 유언장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후에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볼 수밖에 없다. 좀 더 복잡하고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세상에 공식적으로 알려 기업이 다 배상하도록 하는 방법을 쓰는 수밖에. 김혁은 이내 가벼운 마음으로 말했다.
“하, 유언장 하나 쓰게 하기 정말 어렵군. 좋아.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당신 기업이 저지른 일을 만천하에 알리고 배상하게 하는 방법으로 가지. 그럼 더 이상 이런 불필요한 대화도 필요 없으니 이제 그만 가보실까?”
김혁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장회장은 약간 겁에 질린 모양새였다.
“돈은 원하는 만큼 주겠네. 내일 다시 오면 준비해 둘 테니. 얼마를 원하는지 말해보게. 지금까지 일은 모두 다 없었던 일이 되고 난 자넬 만난 적도 없는 거고. 음?”
“아직 이해를 못하는군. 난 진짜 저승사자야. 돈 같은 건 필요가 없어. 너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거였는데 믿지 않으니 할 수 없잖아.”
김혁이 걸음을 옮기자 장회장은 더욱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를 원하나? 말을 하라고. 얼만지...”
김혁이 가까이 다가가자 장회장에게서 공포의 냄새가 더욱 짙게 풍겨났다.
“두려운가? 사후세계가 없다면 뭐가 두렵지? 그냥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뿐인데?”
“그, 그거야...”
“솔직히 말해봐. 진짜 네가 두려워하는 게 뭔지를.”
“...!”
“내 말이 모두 사실일까 봐 두려운 건 아닌가?”
“난, 난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장회장에게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의혹이 있는 모양이었다. 설득의 여지가 있으려나?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김혁은 한번 더 기회를 가져보기로 했다.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어떤 점이? 내가 지금까지 얘기 한 건 전부 사실이고 내가 직접 본 것들이야. 뉴스에 안 나온 얘기가 뭐가 있더라? 아, 내가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분명 그 성모라는 여자의 사체를 버리려고 하던 참이었거든. 잠자리에서 위험한 장난을 하다가 그렇게 된 거라고 말하더군.”
이번엔 장회장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입 닥쳐. 오래전에 내 맘 속에선 지웠지만 네가 모욕하는 건 용서 못한다니까!”
장회장은 또 다시 분노에 찬 채 소리쳤다. 제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 에게 더 이상 증명할 수 없는 40년 전 일을 말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앞의 남자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서 화를 내는 건지 아버지가 떠안고 간 진실을 알게 되는 게 두려워서 소리를 질러대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
김혁이 물끄러미 장회장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은 다시 단호해져 있었다.
“죽일 테면 어서 끝내라. 무슨 말을 해도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너 같은 미친놈한테야 그냥 재밌는 얘깃거리겠지? 그때 우리 가족이 받은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아나? 우린 그 일 때문에 야반도주하듯 이사도 가야 했다. 교주와 바람나서 동반자살한 집 식구들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늘 누군가 알아볼까봐 전전긍긍하며 살았지. 너 같은 놈이 그런 고통을 알까? 우리 가족이 무슨 죄를 지었지? 아버지가 그렇게 간 게 우리 탓인가? 난 내 가족에게 무책임한 아버지가 되지 않겠어. 정말 너에게 아량이란 게 있다면 가족들에게 전화라도 한통 하게 해주든지.”
장회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고개를 저어가며 재빨리 덧붙였다.
“아니야, 그건 됐어. 그날 밤 걸려온 마지막 전화를 받지 않은 걸 내내 후회하며 자책 속에서 살았는데 그렇게 하면 안돼지. 어머니나 나나 깊이 잠들었던 것뿐인데 절대 아버지가 미워서 그런 게 아이었어. 넌 지금 그때 언론들이 떠들던 쓰레기 같은 말보다 더한 얘기를 지어내고 있다는 것만 알아둬라.”
남은 가족들을 배려하는 장회장의 마음은 진심처럼 보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겪은 경험에서 더 많은 확신을 얻는 법이다. 어릴 때 아버지의 죽음으로 남겨진 가족들이 겪었던 고통을 이제 남겨질 자녀들에게 똑같이 남겨주고 싶지 않은 부성애는 이해가 갔다. 함께였기에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겪어야 하는 부당함은 가족으로서 함께 나눴던 이득들에 대한 대가겠지만 늘 더 많은 상처를 주는 것 같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믿을래? 대체 내가 뭐 때문에 그런 얘길 지어낸다는 거야?”
“넌 쓰레기니까. 원래 이런 짓거리나 하고 돌아다니는 사악한 놈이니까. 나 같은 늙은이가 벌벌 떠는 게 재밌겠지. 남의 재산 뺏는 거야 늘 하던 일일 테지만.”
김혁은 다시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별별 오해를 다 받아보았지만 쓰레기 취급을 받는 건 또 처음이었다. 모욕당하고 있는 건 장회장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쓰레기? 조만호 같은 자를 쓰레기라고 해야지. 그런 쓰레기와 손잡고 니가 벌인 일들은 쓰레기 짓이 아니고? 넌 너 스스로 사악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의 오라는 세상 무엇보다도 검어. 좀비 바이러스 같은 거나 몰래 만들어내는 것도 모자라 연구원들을 몰살시키고 책임조차 지려 하지 않는 건 뭐고 딴 사람들이 좀비가 돼서 다 죽어가는데 혼자 이런 데 숨어 있는 넌 뭔데?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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