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인연의 고리 3
김혁은 이제 걸음을 멈추고 똑바로 장회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을 피하진 않았지만 김혁의 표정이 달라져서인지 장회장에게선 공포의 냄새가 다시 풍기기 시작했다.
대화가 너무 길어지는 건 불만스러웠지만 이미 대화를 끊기는 어려운 상황 속에 들어와버렸다. 어쩌다 보니 40년 전 일까지 설명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네 아버지랑 그 교주라는 여자가 한 짓이 진짜 뭐였는지는 알아? 그 이상한 단체가 뭐하던 덴 줄은 알고 그런 말을 지껄여? 그들이 왜 아직도 지옥불에서 타고 있는지 알려줄까? 그들은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갈취하고 죽이고 암매장했지. 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남의 재산과 아이들을 빼앗았어. 자식을 되찾으려는 부모들을 괴롭히고 그 아이들을 고통 속에 방치했단 말이다.
죄없는 아이들이 굶주림과 추위, 학대 속에서 얼마나 불행했는지 넌 상상도 못 할 걸? 그에 비하면 너희 가족의 삶은 엄살 피울 건덕지도 없다. 손가락질을 피해서 도망쳤다고? 겨우 그걸 가지고 분노하나? 네 아버지란 작자가 만든 불행들은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 거란 말이다!!”
김혁은 새삼스레 잊고 있었던 고아원에서의 일들이 떠올라 말을 하면서 점점 더 감정이 격해졌다. 장회장은 처음 듣는 얘긴지 목소리에 힘을 빼고 조용히 말했다.
“거짓말. 아버지는 그냥 평범한 회사에 다니던 분이었다. 작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좋은 가장이었어.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잠시 그런 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그런 파렴치한을 만들어선 안 되는 거야.”
그 남자, 밖에 나가선 온갖 나쁜 짓을 하고도 자기 가족에겐 좋은 가장이었던가?
“흥, 그럴까? 그날 밤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너희 가족은 그 시골 고아원에 내려가서 살게 됐을 거다. 차라리 그 실상을 보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 그곳에는 불행한 아이들이 가득했으니까.
굶주리는 건 일상이고 어떤 애는 연쇄살인마에게 입양돼서 보험금 때문에 살해되기도 했어. 겨우 7살짜리에게 그렇게 잔인한 일이 벌어졌다고. ...열 여덟에 원장 손에 맞아죽은 소년도 있지. 넌 그런 고통들에 대해서 뭘 알지? 말해봐.”
“...!”
“거기 아이들이 억지로 부모에게서 떨어져 굶주리고 모진 학대를 겪으며 살아가는 삶 자체를 몰랐잖아. 그런 고통들을 상상해본 적도 없잖아. 네 아버지가 그 모든 일의 중심에 있었다는 게 진실이야. 너희 가족이 따뜻하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다른 가족들의 피땀과 눈물 덕분이라고. 그 쓰레기 같은 언론들이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진실이 사실은 더 쓰레기 같은 거였다고. 자 말해봐. 누가 쓰레기지? 현호 같은 일곱 살 짜리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지?”
고아원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현호를 생각할 때마다 김혁은 울컥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장회장의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현호?”
장회장이 작게 되물었지만 김혁은 진심으로 이 사람들을 조롱해주고 싶은 마음에 생각나는 대로 다 말해버렸다.
“흠, 참 묘하네. 그 아버지는 사이비 같은 종교에 충성했는데 그 아들은 사후세계가 없다는 연구나 하고. 세상일이란 참 알 수가 없어.”
“지금 현호라고 했나? 장현호?”
장회장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 장현호.”
“그애가 어떻게 됐다고?”
장회장이 현호를 어떻게 아는 걸까 생각하며 김혁은 대답했다.
“연쇄살인마에게 희생됐어. 보험금 때문에.”
장회장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우리 현호는 오래 전에 병으로 죽었는데.”
“무슨 소리야? 정말 당신이 현호를 안다는 거야?”
김혁도 깜짝 놀랐다. 장회장 역시도 김혁이 현호라는 아이를 안다는 것에 놀란 것은 마찬가지라 서로가 의아한 눈빛을 교환했다.
“현호는 내 막내 동생이야... 네 살이었어. 너무나 귀여운 아이였는데...”
장회장은 감정이 북받치는지 말을 다 맺지도 못했다. 설마 장현호가 장회장의 막내 동생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현호는 그 고아원에서 그리 오래 함께 산 건 아니지만 김혁에게도 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아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돼 곧 입양됐다며 떠났을 때가 다섯 살 때였으니 네 살 쯤에 들어온 게 맞을 거였다.
그럼 장회장의 아버지는 정말 자기 막내아들까지도 교단을 위해 갖다 바쳤다는 말인가? 새삼스레 소름이 끼쳐왔다.
악마가 해준 말로는 그 고아원 아이들은 다 그 사이비 교단과 관련 있는 사람들의 자녀들이라고 했었다. 설마 그렇다고 교주 바로 아래로 보이는 그 남자의 자녀까지도 거기 있을 거란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악마도 그 얘기를 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이름 모를 신도들의 자녀겠거니 생각했던 거였다. 무서운 집단이다. 거기선 그런 일에선 아예 예외가 없었거나 어쩌면 남자가 먼저 솔선수범하는 그런 충성심 덕분에 그런 위치까지 올라간 거였던 건지도 몰랐다.
“맞아. 현호가 고아원에 들어온 게 아마 네 살 때쯤일 거야. 말이 없고 순했던 아이였지. 형이 줬다면서 늘 주먹 한짝이 떨어져 나간 로봇 장난감을 꼭 쥐고 놓지 않았지. 거기선 얼마 안 살다가 곧 입양이 됐지만 나중에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주먹 하나가 떨어진 로봇이라고?”
또 거짓말이라고 소리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놀라움이 깃든 장회장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 로보트는 내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건데 현호에게 준 지 얼마 안돼서 같이 사라졌지. 부모님은 그애가 병이 나서 죽었다고 했는데. 네 살 짜리를. 그 어린애를. 거기 있었다고? 고아원에? 우리 현호가?”
김혁은 장회장의 슬픔에 잠시 함께 먹먹해졌다. 지금 장회장의 기분은 악마에게서 현호의 죽음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충격적일 거였다.
현호의 죽음은 어느 쓸쓸한 가을날 리스트에 있던 한 중년 여자를 데리고 갔을 때 악마가 말해줬었다. 다섯 살 짜리 현호를 입양해 간 여자가 김혁의 첫 리스트에 있었던 거였고 현호가 보험금을 노린 범죄의 희생양이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여자는 보험금 때문에 이미 두 남편을 살해한 적이 있었고 결국 일곱 살 짜리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런 여자에게 희생됐던 거였다.
악마가 그 말을 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 순간 느꼈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를 지경이었다.
방안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장회장의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김혁도 현호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섞이지 않고 늘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작은 아이. 말을 걸어주던 김혁을 올려다보던 새카만 눈동자가 눈에 어른거린다. 말수가 적었던 그애가 드물게 하던 말은 ‘우리 큰형아가 키 더 커.’ ‘우리 큰형아는 노래를 잘해’ 같은 말이었다.
“현호는 큰형아를 많이 그리워했어. 큰형아가 노래를 잘한다고도 했지.”
김혁의 말에 장회장이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정말 누구지?”
“저승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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