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악마와의 대화1
김혁이 지옥에 도착하자 악마는 웬일인지 고요한 모습으로 맞았다. 지난번에 무리하게 대화를 중단하고 지상으로 보내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고 김혁의 기분이 많이 가라앉아 있는 걸 벌써 알고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악마는 김혁의 얼굴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왔어? 이렇게 금방 올 줄 몰랐는데.”
“내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김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이거 환상이지? 이번엔 몇 년 짜리로 계획한 거냐?”
김혁의 갑작스런 질문에 악마는 깜짝 놀란 체를 하며 펄쩍 뛰었다.
“뭐가? 환상 아니야. 뜬금없이 뭔 소리래?”
그러나 악마는 몸은 요란스레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안도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뭔가 다른 걸 질문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모든 상황이 40년 전과 연관이 있는데도? 오수연, 서진수, 조만호 다 40년 전에 만났던 사람들이잖아. 거기다 장회장 아버지까지. 전부 내 첫 리스트랑 관련 있는 거잖아. 그게 무슨 의미지? 현호는 또 어떻고...
고아원과 40년 전을 떠올릴 만한 게 가득한데 이게 정말 다 그냥 우연이라고? 일부러 다 끌어 모은 게 아니라면 이렇게 만나긴 어렵지. 좋게 말할 때 빨리 이실직고 해라. 좀비 같은 건 없는 거지? 그치? 다 환상이지? 이번엔 또 뭘 깨닫게 하려고 이런 환상을 짠 거야?”
“아니라니까?”
악마는 여전히 펄쩍 뛰는 모양새로 몸을 늘였다 줄였다 했다. 김혁은 가늘게 뜬 눈으로 악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 가서 사실은 환상이었어, 이러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악마가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차라리 환상이길 바랄만큼 이번 일이 그렇게 괴로운 거야?”
“...!”
그래, 선량한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는 걸 보는 게 괴롭다. 인간들이 계속 좀비로 변해가며 사람들을 물어뜯는 것도 무섭고 그들의 머리통을 부서뜨려 시체로 만드는 것도 쌓아놓는 것도 아무렇게나 묻어버리는 것도 다 괴롭다. 김혁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속으로 삼켰다. 차라리 이 모든 일이 40년 전 리스트를 참고해서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더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악마는 이미 그런 김혁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내가 언제 환상으로 널 괴롭힌 적 있어?”
“아니.”
그건 악마 말이 맞다. 악마가 짜는 환상은 밋밋하긴 해도 대부분 긍정적인 에너지로 채워져 있고 현실에서 맛보지 못한 행복감을 주려는 의도가 강했기에 그런 일상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만약 좀비를 이용해 환상을 짠다면 좀 더 우스꽝스럽게 만들거나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이제까지 나온 악당들만 좀비로 만들어 쳐부수게 했을 게 분명했다. 착하거나 잘 아는 사람들은 절대 죽을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슬픔 따윈 맛보게 하지 않을 거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여태까지의 환상과 완전히 다른 건 사실이지만 악마가 이제부터는 다른 환상을 만들어내고 싶어진 건지 알게 뭔가?
악마는 그런 김혁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몇 번 절래절래 흔들더니 말을 이어갔다.
“내가 늘 말하잖아. 넌 너무 생각이 많다니까. 쿨하게 그냥 넘기는 거 그게 뭐 어렵다고. 오수연도 과학자고 서정 딸도 과학자니 만나게 된 거고 하필 연관 있는 제약회사 회장이 그 옛날 장규석 아들일 수도 있는 거고 40년 전 조폭 같던 못된 녀석이 조직의 보스가 되는 거야 자연스럽고 어쩌다 보니 장회장과 일할 수도 있지. 40년이란 세월이 흘렀잖아. 그게 뭐가 이상해? 세상이 넓은 것 같아도 좁고 인연이란 게 다 그렇게 얽히고설키고 그러는 거라니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 그래서 무서운 거거든. 그러니까 죄짓고는 못 산다는 말이 있는 거잖아. 40년이나 됐으면서 아직도 그걸 몰라?”
“이상하니까 그렇지.”
악마가 한숨을 한번 내쉬곤 말했다.
“잘 생각해봐봐. 이게 환상이면 굳이 널 타임머신 같은 데 집어넣어서 기억을 잃게 할 이유가 있을까?”
“기억이 없는 걸 경험하게 하고 싶었나보지.”
그렇게 말은 했지만 김혁도 이번 일이 악마가 짠 환상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악마가 애용하는 김혁만을 위한 환상에는 늘 여자가 등장하고 서정과의 맨 처음 폐가가 나오는 환상을 제외하고는 여태까지 계속 모든 사랑을 이루게 해주는 해피엔딩 스토리였기 때문이었다. 첫사랑을 못 이룬 것에 대한 보상이라나 뭐라나.
만약 이번 환상의 여주인공이 김은성이고 타임머신을 이용해 둘이 만나게 할 계획이었다면 예기치 못하게 타임머신에 들어가 기억을 잃었다 치더라도 로맨스의 상대를 그렇게 허무하게 죽게 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이건 현실과 지옥을 오가는데다 다른 저승사자들까지 합류한 모양새라 지금까지 경험한 악마의 환상들을 다 돌이켜봐도 너무 스토리가 복잡하기도 하고 거의 대하드라마급에 해당되는 스케일이다. 악마가 이 정도의 스토리를 짠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악마가 김혁을 보며 가만히 눈을 흘겼다.
김혁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계속 진행시켜나갔다. 악마가 짠 환상이라면 김은성과 사랑을 이루는 과정에서 연상연하 커플의 어려움을 집어넣었을 거고 어떤 일로 헤어진다거나 하더라도 타임머신을 완성하게 해서 시공을 넘나들다가 시간의 끝에서 사랑을 이루게 하는 스토리로 짰을 거였다. 악마가 짜주는 환상은 늘 짐작 가능한 수준의 뻔한 스토리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악마가 말했다.
“음 그런 스토리도 재밌네. 시공을 넘나드는 사랑, 그거 좋다. 다음번엔 그런 환상으로 짜줄게. 몇 년 짜리로 하고 싶어? 말만 해.”
“아 지금 얘기 논점은 그게 아니잖아.”
“잘해준다는데도 난리야? 쳇!”
악마가 토라진 체를 하며 팔짱을 끼고 고개를 외로 꼬았다. 김혁은 우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좀비도 다 퍼져나가고 세트장 마을 사람들은 굶어죽게 생겼고 유언장 하나 쓰게 하는 것도 실패했어. 내가 대체 할 수 있는 게 뭐야?”
악마가 팔장을 풀고 몸을 좀 더 크게 부풀리곤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처럼만 해도 돼. 잘하고 있다니까? 나머지는 인간들에게 맡겨. 그 과학자들 생각보다 엄청난 두뇌들이고 지금이야 아직 초기니까 그렇지, 좀비 사태를 제대로 알게 되면 다른 인간들의 멋진 아이디어들이 잔뜩 쏟아져 나올 테니까. 모든 걸 너희들이 다 할 필욘 없다구.”
김혁이 여전히 시무룩하자 악마가 소리쳤다.
“너무 걱정 말라니까! 길고 긴 세월 살아남은 게 인간이야. 그 생존력을 좀 믿어 봐. 인간들은 먹을 게 없어 서로를 잡아먹어야 했던 대기근을 거치고도 살아남았어. 그 엄청난 흑사병이나 장티푸스 같은 게 휩쓸어도 결국 살아남았단 말이야. 역사적인 전염병이 뭐 한 두 개였는 줄 알아? 그뿐이냐고, 엄청난 전쟁을 몇 번이나 치르며 서로 죽고 죽이고 온 국토가 핏빛으로 물들었어도 존속돼 온 게 인간이라니까. 널 못 믿겠으면 인간의 생존력을 믿어.”
“세계 종말이라며? 니가 한 말이잖아. 우리가 막아야 한다면서?”
세계종말이니 뭐니 하면서 온통 겁을 줄 때는 언제고 또 딴말인가 싶어 김혁이 소리쳤다.
“아휴, 그거야 그럴 만큼 심각하다는 거지. 진짜 세계종말이 올지 안 올지는 인간들에게 달린 거고. 난 그렇게 먼 미래의 일까진 예언할 수 없다구.”
악마가 미래의 일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 미래까진지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세계종말이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일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악마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넌 너무 많은 걸 네 탓으로 돌리고 있어. 유일한 희망이라고 했지 유일한 구원자라고 하진 않았잖아. 태양이 비춘다고 모든 곳의 어둠을 다 몰아낼 순 없어. 어딘가엔 그늘도 지고 어느 곳엔 햇빛 한 점 쐴 수 없는 곳이 있기 마련이야. 네가 세상의 인간 하나하나를 다 보살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사람들이 좀비로 변할 때마다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온통 하늘을 휘젓고 다닐 거야? 응? 너는 네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걸로 된 거야.”
“...”
김혁도 그 말이 맞다고는 생각했지만 여전히 우울했다. 아무도 구하지 못한 것 같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지옥에 오기 직전에 한 실패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 그토록 많은 말을 하고도 유언장 하나도 얻어내지 못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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