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악마와의 대화2
악마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인간들의 삶이 그런 걸 어쩌라고. 인간은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만져야 사는 존재들이야. 몸으로 느끼고 사랑도 해야 하고 보듬어 주고 보살펴주고 안아줘야 살 수 있는 걸. 모듬살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건데 어쩌냐고. 이것도 나누고 저것도 나누고 어우렁더우렁 살아야 하니 함께 할 것도 많고 공유하는 것도 많고 그러니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그게 바로 인간의 속성인데 어쩔 거야. 그런 곳에 흉악한 좀비 바이러스가 떨어졌는데 그걸 무슨 수로 막아? 응?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쬐그만 바이러스도 나름대로 살기 위해 애쓰느라 필사적인데 네가 어쩔 거냐고.”
“...”
바이러스도 살기 위해 애쓴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이건 시간이 필요한 싸움이니까.”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냥 말해줘.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
“넌 이미 다 알아. 그동안 네가 본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생각해볼 시간이 없었을 뿐이야. 네가 보고 경험한 것들이 연구를 훨씬 앞당길 수도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해. 지금껏 본 것들에 이미 중요한 정보는 다 담겨 있으니까.”
“몰라. 모르겠다고!!!”
김혁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악마가 다 알면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전혀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이다. 이왕 인류를 돕고자 한다면 시원스럽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가르쳐주면 될 것을.
“으휴, 꼭 말을 해줘야 하냐? 응? 자 생각해 봐. 그 넘버쓰리는 좀비의 땀이 묻은 손을 그렇게 만져댔는데도 좀비가 안 됐어. 왜 그렇지? 다른 사람들은 옆에 앉아만 있어도 전염이 됐는데? 응? 또 좀비가 며칠만에 굶어죽는가는 너밖에 모르지? 좀비가 얼마만에 되는지 어떤 식으로 변해 가는지 첨부터 끝까지 본 건 너뿐이고 에 또, 뭐가 있었지? 암튼 잘 생각해봐. 그런 것들 속에 해답이 다 있다니까.”
“그냥 속시원히 얘기해주면 안 되냐? 생각하느라 시간 끄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죽어가잖아.”
“후, 그건 천기누설이야.”
“그런 게 무슨 천기누설씩이나 돼? 내가 생각해서 가르쳐주나 니가 가르쳐주나 인간들한텐 그게 그건데.”
“그건 다른 거야. 너 혼자 생각하지 말고 본 것들을 오수연이나 유지성한테 잘 설명해주라고. 백신이나 치료제를 만드는 건 그들이니까. 그럼 돼. 다 잘 될 거라고 믿어.”
유지성 이름이 나오자 김혁은 그제야 잊고 있던 유지성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참, 유지성은 어떻게 된 거지? 병원에는 없었어. 살아 있는 거야?”
“걱정 마. 오수연이 벌써 안전한 데로 옮겼으니까.”
“그건 다행이네. 좀비가 됐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거봐, 네 덕분에 중요한 사람을 구했는데도 정말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해?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딨어?”
김혁은 그런 걸로 으스댈 생각은 없었다. 대신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근데 병원엔 왜 그렇게 좀비가 늦게 퍼진 거야? 분명 그 전날은 괜찮았는데.”
“어, 그건 간호사들의 당직 근무 때문으로 생긴 시간 차야. 그날 밤 팔을 다친 삼인조를 치료한 간호사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됐지만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바로 갔어. 다음날은 쉬는 날이었지. 혼자 살고 있었다면 병원 쪽은 감염이 안 됐을 수도 있는데 부부 간호사였거든. 신혼부부. 한창 뜨거울 때잖아? 그 집에서 아침 무렵에 또 감염이 이뤄졌고 그 두 번째 간호사는 오전에 출근을 했어. 좀비 바이러스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거지. 처음에 감염된 간호사는 다른 간호사가 출근한 후에 집에서 좀비로 변해서 거리로 뛰쳐나갔고 병원으로 출근한 간호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근무하던 도중에 밤에 좀비로 변해서 의사를 물어뜯었어. 그런 일들은 너희들이 병원에서 떠난 다음에 벌어진 일이지. 너희가 병원에 간 건 초저녁, 좀비는 밤중에. 이해 가?”
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그럼 좀비 바이러스 잠복기가 12시간에서 14시간 정도인 건 맞다는 거야? 그 이상은 아니고?”
악마는 대답해줄까 말까를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응. 체력에 따라 개인차는 있지만 거의 그렇다고 봐도 돼. 이 바이러스들은 자기 복제도 빠르지만 숙주를 옮기지 못하면 사멸하는 것도 엄청 빠르거든. 그 짱돌 애인이 증거.”
좀비에게 먹이인 인간을 차단하는 일과 좀비가 되지 않은 인간들을 격리하는 일이 동시에 잘 이뤄지기만 한다면 더 이상 좀비가 퍼지지 않을 수도 있단 얘기였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약간 기분이 나아졌다. 정말 그런 확신 정도로도 안심이 되는데 여태껏 불확실 속에서 애태우게 만든 악마가 미워질 정도였다.
김혁은 악마를 바라보다가 여전히 마음 한켠에 떨쳐지지 않는 것을 물었다.
“근데 아무리 봐도 이건 날 괴롭히려고 만든 환상 같은데...?”
잠잠하던 악마가 다시 펄쩍 뛰었다.
“어허, 아니라니까 그러네. 의심 많은 인간들만 상대하고 와서 그런가? 왜 착하디 착한 악마를 못 믿고 자꾸 의심질이야? 앙?”
“착하긴 누가 니가? 정말 아니라고 맹세할 수 있지?”
악마가 자동인형처럼 고개를 계속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악마는 자주 장난을 치기 때문에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
“거짓말이면 100년 짜리 환상 가는 거다?”
악마가 고개를 딱 멈추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뭐? 100년씩이나?”
“오호, 걸려들었어. 그러니까 빨리 사실을 말하란 말이야.”
“아, 아니 그래서 그런 게 아니고... 100년 짜리 환상에 들어가 있고 싶을 만큼 나와 떨어지고 싶어한다는 거에 지금 충격 받았어. 나.”
“왜 얘기가 또 그렇게 흘러?”
악마가 어느새 눈에 눈물을 가득 글썽거리며 말하는 통에 김혁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또 눈물불꽃쇼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사방팔방으로 터뜨리진 않고 아직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악마가 물었다.
“100년 동안 날 못 만나도 괜찮다는 거잖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응?”
“으휴,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떠본 거다, 라고 생각하자 악마의 눈에선 금새 눈물이 사라졌고 시뻘건 덩어리를 활달하게 늘렸다 줄였다 하며 웃어댔다.
“으히히힛! 그치? 그치? 아니지? 역시 아니어야지.”
감정 기복이 저토록 심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생각하며 민하진을 떠올렸다. 저럴 때는 정말 민하진과 닮았다. 기쁜 체를 하는 악마를 바라보다가 문득 주은정에 대한 궁금증도 살아났다.
“아 맞다. 근데 왜 은정이한테는 아직까지 환상을 한 번도 주지 않은 거야?”
“아 그거? 근데 난 진짜 놀랐어. 은정이가 그렇게 속깊은 얘기를 너한테 하다니.”
“그건 나도 그랬어. 얼른 그 이유나 말해 봐.”
“뭐 별다른 이유는 없는데? 걘 특별히 원하는 게 없거든.”
의외의 대답이라 김혁은 더욱 당황스러웠다.
“원하는 게 없다고? 한창 꿈 많을 소년데? 어떻게 소원이 없을 수가 있어? 하다못해 인기 스타와 절절한 로맨스를 꿈꾸거나 뭐 잘생긴 남학생한테 대시라도 받는 상상이라도 할 거 아냐. 꽃이든 보석이든 뭐 갖고 싶은 것들이라든가 그런 게 없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사춘기 소녀가 못다한 게 얼마나 많았을 건데...”
소녀든 소년이든 사춘기라면 제한적인 현실에 불만이 많은 만큼 다른 것을 더 많이 꿈꾸게 마련이 아니던가? 학교에 갇혀 공부만을 강요당하는 생활이라면 특히 더 교과서 외의 것이 읽고 싶고 공부 말고 다른 것이 하고 싶고 그런 것처럼. 그때만큼 호기심과 상상력이 왕성한 시절이 또 있던가?
“그러니까 그게 은정이란 애가 참 요상해. 그 마음속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죄다 환상으로 짜주기가 애매한 것들뿐이고 그것들도 곧 사라져버리니 말이지. 걔도 참 연구대상감이라니까.”
“좋아하던 남자도 없었어? 뭐 교생선생님이나 주변 친구라도.”
“응. 없어.”
“연예인도 안 좋아하고?”
“걘 텔레비전도 거의 안 보던 애야. 처음엔 찬수가 누군지도 몰랐다니까. 백과사전이나 들여다보고 어쩌다 TV를 봐도 다큐멘터리 같은 거나 보던 앤데.”
짱돌 애인집에서 민하진에게 다큐멘터리 같은 것도 좀 보라고 핀잔하던 주은정이 떠올랐다.
“가족들이랑 함께 뭘 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응, 그것도 뭐 딱히 없더라고.”
“나한텐 가족들이 그립다고 했었는데?”
“어, 그것도 어쩌다 한번인데 스스로 추억들을 불러내서 다 해결해버려. 아빠를 빼고 나머지는 전부 천국에 잘 있는 걸 알아서 그런가 어쩐가 그것도 신기하긴 해.”
“정말 말도 안 된다.”
주은정은 정말 알면 알수록 더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다. 악마가 연구대상감이라고 하는 걸 보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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