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악마와의 대화3
악마는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휴, 환상 짜는 거,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그건 뭐 막 되는 줄 알아? 누군가를 만족시키는 건 그만큼 어려운 거야. 하진이나 한조 같기만 하면 좀 쉽지. 하진이는 찬수 같은 남자애들이 좋다고 쫓아다녀만 줘도 좋아라 하고 한조는 목소리만 틔워줘도 몇 달이고 노래만 불러 제끼지. 걔네들은 좋아하는 게 분명하거든. 너도 대충 뭔지 알잖아?”
악마는 허공에 노래하는 한조와 열광하는 팬들의 무대를 띄워놓았다. 거대한 무대 위를 누비고 다니는 한조는 멋있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에 더 목마른 자들에겐 봐줄 사람이 필요하지. 열렬히 환호하면 할수록 더더더. 그치만 그들이 꼭 특별한 사람일 필요는 없거든. 타인의 반응이 중요한 거니까. 자기 외모나 실력을 뽐내고 인정받을 때 오는 희열 크으, 한조는 얼마전에 저 환상 속에서 소원성취 했지. 춤, 노래 다 되는 아이돌 가수로 우뚝 섰거든. 저 환상이 끝나고 났을 때 한조가 날 원망했을까? 아니지 아니야. 입이 귀에 걸렸거든. 다음번에 또 해달라고 졸랐거든. 왜? 한조는 현실에서 절대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아니까. 어중이 떠중이의 환상은 생각해 놓은 것만도 한두 개가 아니야.”
“어려운 걸 잘해야 진짜 잘하는 거지.”
김혁이 뾰족하게 대꾸하자 악마가 화들짝 놀란 체를 하며 몸을 팡 터뜨렸다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너도 어렵거든? 근데 언제 한번이라도 실망한 적 있어? 환상인 줄 알아챈 적은? 없잖아. 나 잘하는 거 맞거든? 걔가 유난히 복잡한 애라서 그런 거지. 은정이는 맘속에 남은 증오나 분노를 다 태웠는데도 인간들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애잖아. 딱히 이기적인 것도 아닌데 자기 자신 밖에는 관심도 없고. 그러니 어떤 인간을 환상에 넣어줘도 만족할 리가 없지.”
“지적인 걸 충족시켜 주면 되잖아. 척척 박사가 되게 하는 거라든가 노벨상을 타게 하는 그런 환상.”
갑자기 김혁 주변이 책들로 가득 찬 책장으로 변했다. 악마는 근사한 검정 슈트를 입고 은테 안경을 쓴 점잖은 남자로 변해 있었다. 희고 가느다란 철학자의 손가락으로 책장에 꽂힌 두툼한 책들의 책등을 하나하나 가볍게 훑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런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년 같은 악마의 음성이었다.
“아니 그건 더 안 돼. 걘 지식을 얻어가는 그 과정을 좋아하는 거라. 남들이 주목하고 열광하고 박수치는 그 순간보다도 지식을 쌓아가는 그 과정에서 오는 희열을 더 즐기는 거니까. 지식이 지혜로 변해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 과정을 건너뛰는 게 어떤 거라고 생각해? 그건 보상이 될 수 없어. 그 과정을 생략하고 지식을 완전한 형태로 다 밀어 넣어주면 과연 행복해 할까? 결과부터 쥐어주는 건 오히려 기쁨을 빼앗는 거라니까? 요리하는 걸 즐기는 요리사한테 신선한 재료를 주는 게 아니라 다 만들어진 요리를 놓아주는 거랑 같은 거야.”
그런가? 김혁은 그런 것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완벽하게 세팅된 식탁에 앉아 느긋하게 완성된 요리를 맛보는 게 더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말했다.
“그럼 은정이만을 위한 이런 환상적인 도서관을 하나 지어주면 되겠네.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다 들어 있는 책들로 가득 찬 곳. 거기서 맘껏 뒹굴고 맘껏 책만 보고 그걸 가장 원할 거 아냐.”
“음, 제법이야. 그것도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것도 섣불리 건너뛰는 건 좋지 않기도 하고 그렇게 되면 환상이 너무 길어지잖겠어? 또 그건 지금도 충분히 현실에서 하고 있으니까. 걔가 인간 세상에 갈 때마다 거의 대부분 밤 시간을 텅 빈 도서관에서 책 읽으며 보내는 건 몰랐지?”
“그랬어?”
다른 저승사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뭘 하고 시간을 보내는지는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도 궁금해 했던 적도 없었다. 다들 리스트를 들고 돌아다니며 시간 쓰는 방식이야 다 비슷비슷하려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저승사자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기분이 든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건물에 홀로 돌아다니며 책을 고르고 있을 은정이의 모습이 상상됐다. 고요하고 거대한 도서관에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작은 등불을 밝히고 책을 읽고 있는 은정이의 얼굴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을까? 사람들 구경에 지치면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자신과 많이 비교되는 건 사실이었다. 악마가 허공을 왔다갔다 하며 말했다.
“환상을 안 주는 대신 딱 한 가지 배려해주는 게 그거야. 언제 돌아와도 책망하지 않는 것. 리스트 업무가 좀 늦어져도 그냥 놔두지.”
음, 저건 명백한 차별 같은데 나한테는 맨날 빨리 빨리 돌아오라고 성화면서, 김혁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악마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워낙 일처리는 깔끔하니까 핀잔할 것도 없고. 때로는 몇날 며칠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곤 해. 낮에는 남들이 펼쳐놓은 책들을 같이 읽고 밤에는 서가의 꼭대기에 읽는 책들을 주로 꺼내보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라. 날이 밝는 줄도 모르다가 몸이 사라져 버리면 그때서야 안다니까? 책이 바닥에 툭 떨어지고 나서야 깨닫는 거야. 그런 몰입감 가져본 적 있어?”
저승사자가 해가 뜨는 걸 모르다니 그럴 수가 있으려나? 김혁은 지난 40년간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김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지금으로선 그게 내가 은정이한테 해줄 수 있는 전부야. 내가 손댈 필요가 없기도 하고 굳이 환상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기도 하고.”
악마는 잠시 김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모든 도서관의 책들을 다 섭렵하고 나면 그때 해줘도 늦지 않아. 읽고 싶은 만큼 다 읽고 더 이상 읽을 게 없을 때 그때는 환상이 필요할 수도 있지. 아주 길고 긴 환상이 되겠지?”
“어휴, 세상의 책들을 다 읽는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글쎄, 걘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정말?”
악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만화책만 읽던 소년도 있었지? 이제는 그것마저 안 읽는 그 누구는 잘 이해가 안 가는 일이긴 하겠네.”
김혁은 자기 얘기를 꺼낸 악마를 슬쩍 흘겨보았다. 하지만 사실이니 뭐라고 할 건 없었다. 저승사자가 되기 이전엔 교과서도 잘 안 보는데다 만화책만 읽었고 저승사자가 된 이후엔 사람 구경만 실컷 하지 책은 손에 잡아본 적이 없었다. 그냥 설렁설렁 읽어도 한 도서관의 책들조차 다 읽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악마가 생각하는 그때가 오긴 할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맞았다.
“진실만을 원할 때는 진실만 필요한 법. 환상을 섞을 필요가 없어. 환상을 원할 때 환상을 줘야 최상의 효과를 내지.”
맞는 말인 것 같긴 했지만 슬그머니 의문이 차올랐다.
“그럼 난? 내가 늘 사랑에 목말라 있다 생각해서 그런 환상들을 짜주는 거야? 내가 그렇게 여자를 밝힌다고?”
평소 그런 생각을 별로 안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환상을 계속 짜주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응? 좋아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뭔 소리야? 넌 여자의 사랑 속에서 행복한 남자야. 핏줄은 못 속인다니까? 큭큭, 여태껏 내가 짠 환상 속에서 사랑에 안 빠지고 거절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냐고.”
“그거야...!”
일곱 번의 환상, 일곱 번의 사랑, 모두 해피엔딩이었다. 그리고 사랑의 단꿈에서 깨면 늘 못생긴 악마의 얼굴과 마주치곤 해서 소리를 버럭 질러대는 것도 늘 반복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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