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악마와의 대화4
악마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키득거렸다.
“어째 취향도 그렇게 한결 같은지 아직도 서정을 벗어나질 못하고 쯔쯧.”
“뭐? 내가 언제? 전부 다 다른 여자들이었잖아.”
김혁이 그동안 환상 속에서 사랑에 빠졌던 애인들을 떠올려 보고 있자 악마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생김새만 조금씩 달랐지 결국 다 같은 거야. 너만 모르지. 내가 환상마다 아무리 특출난 미인들을 섞어서 미인계를 써도 넌 절대 안 넘어갔거든. 그러니 맨날 서정이랑 닮은 여자들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지. 그래서 좀 재미가 없긴 해. 40년이면 이제 바뀔 때도 안 됐냐? 아무리 첫사랑이지만 너무 하잖아? 40년이라니. 환상 짜주는 입장도 좀 생각을 해줘야지.”
악마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김혁은 서정에 대해 가끔 떠올려 보긴 하지만 간절하게 보고 싶다거나 그리움 때문에 미칠 것 같은 적이 거의 없었기에 악마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환상 속에서 여자들과 사랑에 빠질 때도 서정과 닮았다고 생각하거나 비교한 적조차 없었다. 그 안에선 오로지 그녀들 한 명 한 명을 사랑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김혁은 다시 한번 7명을 차례차례 떠올려봤다. 모두 다른 얼굴들이고 키나 체형도 제각각 달랐다. 열 일곱 살의 서정을 떠올려 봐도 그들과 딱히 닮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데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이대도 모두 다르고 다른 직업을 가지고 개성도 각각 분명했다. 그때그때 경험한 사랑의 형태나 감정 상태며 대화들도 꽤 특이할 만큼 다채로웠다. 공통점이라곤 이상하게도 거의 첫눈에 사랑에 빠지거나 몇 번 만나지 않아서 곧 사랑에 빠지곤 했다는 것뿐이었다. 설마 그래서였나?
“그치?”
“...!”
악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유도했지만 김혁은 여전히 의문스럽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악마의 잘난 체가 또 시작됐다.
“나만큼 널 잘 아는 존재가 어딨겠냐구. 겉과 속, 과거 현재, 40년간의 행동 변화까지도 난 다 안다구. 하아, 맞춤형 환상은 그런 재료들에 나만의 마법이 결합돼야만 가능한 거지. 으하하하!!”
이번엔 김혁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댔다.
“내가 너한테 환상을 제일 많이 줬던 건 네가 여기서 가장 오래 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넌 책을 안 읽기 때문이야.”
“...?!”
읔, 이건 또 뭔 소린가? 김혁이 황당한 느낌으로 그저 바라보고만 있자 악마는 하던 말을 계속 했다.
“네가 책을 안 읽으니까 책 많이 본 여자들이라도 만나게 해줘야지. 거기다 다양한 경험을 가져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줄 여자들. 너에게 필요한 건 서정뿐일지 몰라도 난 너의 성장을 도와야 하니까. 나의 지식과 경험과 지혜를 갈아 넣어서 미인을 빚고 우후후!”
도자기를 빚는 시늉을 하는 악마를 보면서 김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오바 좀 안 할 순 없나?
“오바는 무슨! 머리보다 몸 쓰기를 더 좋아하는 네게 지식과 지혜를 주입할 방법은 사랑이 제일 효과적이기도 하고. 사랑의 힘으로 공부를 하게 한다고나 할까? 그녀들의 지식과 그녀들의 축척된 경험이 사랑을 통해 네게로 슬슬 녹아들어가지. 으흐흐.”
악마가 음흉하게 웃어대곤 다시 말을 이어갔다.
“무언가 소중한 걸 잃어본 자만큼 환상이 간절한 자가 또 있을까? 또 가슴 속에 철철 넘치는 사랑을 너무 오래 억누르는 건 좋지 않기도 하고 말이지. 인간들과 사고 치기 전에, 아 그러니까 그 뜨거운 욕구가 폭발하기 전 그 적절한 순간에 개입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그래? 이게 다 거저 되는 줄 안다니까?”
오늘 따라 웬 생색이 이리 많은지 김혁은 못마땅했다. 나도 모르는 나를 다 안다고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대는 것에 화가 치미는지도 몰랐다.
“말도 안돼! 내가 일곱 번씩이나 폭발할 뻔 했다는 거야? 난 그렇게 간절한 적 없었어.”
악마가 웨이터 차림으로 변신해서 정중하게 반쯤 허리를 굽혔다 일어서며 말했다.
“이거야말로 최상의 서비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객이 자신의 욕구를 눈치 채기도 전에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 말이죠.”
악마는 다시 본 모습으로 바꾸고 계속 지껄여댔다.
“크하하, 내가 늘 말하잖아. 피는 못 속인다고. 사랑밖에 모르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어떤 아들이 태어나겠어? 네 속엔 그들의 사랑이 철철 넘치는데 아닌 척은.
내가 만약 너를 높은 산꼭대기 토굴에다 올려놓고 내내 명상만 하게 하는 환상을 짜주거나 골방 같은 데서 면벽 수행만 하게 하든가 평생 가도 사람이라곤 구경 못할 그런 곳에서 주구장창 생각만 하게 하면 어떨 것 같은데? 오우, 넌 아마 며칠 못 가 미쳐버릴 걸? 아니다. 그런 것도 시험 삼아 한번 해볼까? 그래야 다른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알게 될 수도 있겠지?”
악마가 턱을 짚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혁은 분을 못이겨 소리쳤다.
“우리가 니 꼭두각시 인형도 아니고 갖고 놀면 재밌냐? 재밌어?”
악마가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김혁은 멈칫했다.
“내가 너희를 갖고 노는 게 재밌어서 환상을 짠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슬픈데?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악마가 너무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말을 꺼내기가 미안해졌다.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단...”
하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악마가 한껏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지상으로 갈 수 없는 거 잘 알잖아. 사실 내가 제일 불쌍하다니까?”
언제는 내가 제일 불쌍하다더니, 김혁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말로 내뱉진 않았다. 네가 제일 불쌍하면서 쓸데없이 남들 동정하는데 시간을 많이 잡아먹고 꾸물거린다고 지옥으로 늦게 돌아올 때마다 핀잔하는 소리를 해대는 악마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악마는 김혁의 생각을 모른 체 하면서 제 할 말만 했다.
“너희들이 바깥을 누비는 걸 보면서나 세상 구경을 할 수 있는데 내가 더 불쌍하지.”
악마의 눈가에 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어째 요즘 들어 눈물을 비치는 횟수가 는 것 같아 이상할 지경이다. 세월이 갈수록 슬슬 말발로 이기기 힘드니까 눈물이 느는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사악한 악마 같으니라고!
“그런 건 저 불타는 죄를 봐도 되고 구경할 거 천지구만. 넌 맘대로 궁전도 세울 수 있고 공원도 만들 수 있고 뭐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데 뭐가 불쌍해? 온갖 곳을 다 보고 전 지구를 다 옮겨놓을 수도 있는 능력자께서.”
“그런 거랑 다른 거야. 너희들은 자유롭게 나다닐 수도 있고 진짜 착한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도 하고 지구의 청정한 숨결을 느낄 수도 있는데 난 못하잖아. 그래서 난 너희들과 함께 세상을 보는 게 좋아. 은정이와 함께 고요한 도서관에 있는 느낌도 좋고 너와 함께 밤하늘을 맘껏 나는 것도 좋고 하진이나 한조를 따라 방송국이나 클럽, 공연장에 가는 것도 좋아. 솔직히 말하면 내가 특별히 보고 싶은 지역 위주로 먼저 리스트를 짜는 것 말곤 특권 같은 것도 없고 맘대로 개입할 수도 없는데 어째서 너희들이 내 꼭두각시야? 응 응? 환상도 그래. 온전히 너희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는 건데 그 맘도 몰라주고 으아앙!!!”
악마가 말하는 내내 불안 불안하더니 결국 진짜로 눈물 불꽃쇼를 하기 시작했다. 빨갛고 파란 방울들이 사방으로 마구 튀었다. 뜨겁고 차갑고 뜨겁고 차갑고. 김혁은 얼굴에 튀는 불꽃과 눈물을 피해 한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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