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배우야? 저승사자야?
김혁이 반문하자 영상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주은정이 말을 가로챘다.
“예술적 영감을 주는 존재라고 그냥 말해.”
“야!! 내가 말 할려고 했는데...!”
떠중이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주은정을 바라봤다. 그러자 주은정이 화면에서 눈을 떼고 떠중이를 보며 말했다.
“넌 좀 짧게 말하는 버릇을 들였으면 해. 니가 하는 말 다 맞고 여기 모두가 너 똑똑한 거 다 알아. 그러니까 듣는 사람 좀 배려해달라고. 더 설명해달라고 하지 않는 이상 응?”
떠중이는 늘 자기 말을 중간에서 끊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듣고 있는 상대가 모두 한결같이 좀 짧게!를 외친다면 좀 바뀔 만도 하건만 그런 건 쉽사리 안 바뀌는 모양이었다. 어원이나 역사 같은 걸 너무 길게 갖다 붙이는 건 저런 걸 대체 어떻게 다 아는 걸까 신기하긴 해도 사실 좀 상황에 안 맞는 경우가 많긴 했다.
떠중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굳어지는 걸 보고 김혁이 얼른 끼어들며 말했다.
“그건 뭔지 알겠고 그럼 페르소나에 대해서 말해봐.”
떠중이는 이번엔 주은정을 향해 단단히 못을 박고 시작하려고 했다.
“너, 조용히 해. 내가 말 할 거니까. 페르소나는 음, 그러니까 심리학에서 쓰는 용언데 정신분석학자 융이란 사람이 만든 말이에요. 어, 본성보다는 만들어진 이미지라고 할까...”
김혁이 듣기엔 떠중이의 설명은 악마의 설명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번에 딱 와닿지가 않았다. 주은정도 알고 있는 말인 것 같은데 잠자코 보고만 있었다. 이번엔 기다려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떠중이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자 마침내 주은정이 한마디 내뱉었다.
“가면.”
“야!!! 내가 말 할려고 했다니까. 너 왜 자꾸 끼어들어?”
“아무나 그냥 쉽게 좀 말해봐.”
김혁이 답답해서 재촉하자 떠중이가 말했다.
“자기를 대신하는 어떤 이미지? 캐릭터?”
갑자기 민하진이 뭔가 생각난 듯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 왜, 영화감독들이 자기가 만든 영화 속 주연 배우한테 ‘저 배우는 내 페르소납니다.’ 이런 말 많이 하잖아요.”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낸 걸로 보아 아마 민하진이 본 건 남자 감독인 모양이었다.
“오, 민하진 니가 그런 말도 기억해?”
떠중이가 놀란 체를 하고 민하진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그거 자기 영화 주연 배우 말하는 거 아니야? 감독 대신 연기해주는 거니까?”
그 말엔 주은정이 대답했다.
“그건 좀 달라. 자기 영화 속 주연 배우라서가 아니라 음, 한 감독이 같이 작업해나가면서 내 분신이다 인정한 경우라야지. 어떤 감독 하면 어떤 배우가 딱 떠오를 정도는 돼야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지.”
“그게 뭐야?”
민하진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감독이 표현하고픈 자기 세계관이 있을 거 아냐. 그래서 영화들을 계속 만들어내겠지? 왜 그 배우를 계속 쓰겠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걸 가장 잘 이해하고 제대로 표현해주기 때문이지. 페르소나라고 하는 건 너는 나다, 그런 인정인 동시에 배우한테 바치는 최고의 찬사기도 하고. 쉽게 말하면 그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 속에서 감독을 엿볼 수 있다? 뭐 그런 거? 그럴 때 그 배우가 감독이 보여주고픈 다른 가면, 페르소나가 되는 거지. 한 사람의 연기를 보면서 배우, 작품 속 캐릭터, 감독을 동시에 보는 거라고 할까?”
민하진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혁도 잘 이해가 안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주은정의 말에 이어 떠중이도 지지 않겠다는 듯 김혁을 향해 자신이 준비한 대답을 말했다.
“그건 영화 얘기고 일반적으로 페르소나는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미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남들이 원하는 대로 맞춰진 이미지가 많고 그래서 가면이라고 하는 거고요.”
“만들어낸 이미지?”
김혁은 점점 헷갈리기만 했다. 그럼 왜 저승사자들이 악마의 페르소나가 되는 거지? 우리가 자신의 가면들이란 말인가? 악마의 무엇을 표현하는 배우들이기라도 한가? 악마가 환상을 짤 때는 저승사자들 개개인에게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니 우리가 뮤즈라는 말이 이해가 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들은 페르소나라는 개념에는 도저히 끼워 맞출 수가 없었다. 김혁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떠중이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네. 원래 안 착한데 착한 척 하는 거, 속으론 되게 겁쟁인데 겉으론 씩씩하고 용감한 척 하는 것도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고 사회가 만들어낸 어떤 역할들에 맞게 사는 것도 페르소나라 할 수 있고...!”
떠중이가 생각하느라 말을 계속 잇지 않자 이번엔 주은정이 덧붙였다.
“본성에 덮어씌워진 가면이죠. 진짜 자기를 드러내기보단 사회가 바라는 이미지에 맞춘 가면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거죠. 그게 편하니까요. 사람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좋은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페르소나들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가 곧 페르소나죠.”
김혁은 문득 악마가 천사로 변할 때가 떠올라 물었다.
“악마가 천사인 척 할 때 그 천사가 페르소나란 말이냐?”
“네. 맞아요. 그 반대도 가능하고요. 천사가 악마인 척 한다면 그 악마 이미지가 페르소나죠.”
김혁은 비로소 페르소나가 뭔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민하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우 복잡해. 난 뭐가 뭔지 모르겠네. 그런 거 꼭 알아야 되는 거야? 근데 어쩌다 그런 얘기가 나온 거예요?”
“어? 뭐 어쩌다 보니, 내가 꼭두각시냐고 했거든.”
떠중이는 뭔가 더 생각하면서 말했다.
“음, 꼭두각시하곤 다른 거긴 하죠.”
김혁이 여전히 이해가 안 가고 의문스러운 것, 악마가 저승사자들을 왜 자기의 페르소나라고 했는지에 대해서 그 말이 지금 우리 상황에 맞는지 어떤지를 물어볼까 어쩔까를 고민하는 사이 갑자기 민하진이 소리쳤다.
“야, 잘 좀 찍으라니까. 내 얼굴 나왔잖아.”
거기 있는 모두가 일제히 화면 속 영상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김혁은 여태까지 영환 줄 알고 보던 그 영상이 사실은 얘들의 작품이었음을 그때야 알아차렸다. 화면 속에 겁에 질린 연기를 하는 민하진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아악! 저리가, 저리 가란 말이야! 흐윽 흑흑.
역시 민하진의 눈물 콧물 짜내며 우는 어설픈 연기가 돋보였다. 연기하는 티가 너무 나서 진짜 좀비조차 가짜인가 싶게 만들 정도였다. 실제를 찍었는데 영화처럼 보이게 한다고 할까?
이제 영상 속의 민하진은 열심히 좀비를 피해 어둠 속의 한가운데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카메라가 따라가고 있었다.
아마 떠중이가 카메라를 들고 달리며 찍은 모양이었다. 그 부분은 카메라가 몹시 흔들리며 진짜 실감나게 좀비로부터 도망치는 느낌이 나긴 했지만 역시 앞에서 본 민하진의 연기가 잊혀지지 않아 모든 게 가짜라고 인식하고 보게 만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밤에 셋이서 좀비와 함께 저런 영상을 열심히 찍고 있었을 걸 생각하니 김혁은 저절로 웃음이 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다. 어쩌다 저승사자들이 이런 일까지 하고 있는 걸까 싶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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