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스핑크스의 방1
먼저 침묵을 깬 건 떠중이였다.
“와! 너 제대론데? 진짜 연기 같은 거 한 적 없는 거 맞아?”
“다시 안 해도 되겠어?”
주은정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지만 떠중이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응. 좋아.”
떠중이가 녹화된 영상과 올리지 못한 좀비 영상에서 일부만 따와 편집하는 동안 주은정이 몸에 둘렀던 커텐과 가발을 벗어던지며 말했다.
“으휴, 내가 이런 걸 다 해보네?”
“학예회 때 연극 안 해봤어?”
민하진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별로. 하도 어릴 때부터 연극의 연자만 꺼내도 질색을 했어서 할 생각도 못 했거든. 학교 때도 연극하면 겨우 엑스트라 중 한명 뭔가 들고 뒤에 서 있는 것만 몰래 했어.”
“우와 진짜? 왜?”
민하진은 눈을 깜박거리며 진지하게 물었다. 궁금한 건 떠중이나 김혁도 마찬가지였다.
“얼굴만 봐도 주연감인데?”
떠중이가 한마디 덧붙였지만 주은정은 뭔가 망설여지는 게 있는지 멈칫하다가 말했다.
“...아빠가 정말 싫어해서. 우리 할머니가 배우였었거든.”
김혁은 문득 진소영을 떠올렸다. 진소영 남편이 주씨였던 것 같은데, 설마? 40년 전에 한 엔터테인먼트 대표를 지옥으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 40년 동안 데려간 자들 중 주씨 성이 더러 있긴 했지만 아내가 배우였던 사람은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이 ... 주명석이었던가? 주상훈, 주은정... 그의 손녀일 수도 있을까?
“진짜? 그럼 그 재능은 유전이네. 유명한 사람이야? 누군데?”
“아니... 그저 무명배우였어. 아빠는 할머니가 결국 불행해졌던 게 그 재능 때문이라고 믿었거든. 그래서 우리는 절대 그 근처도 가지 못하게 했어.”
무명배우라면 진소영은 아니란 얘기다. 김혁은 일순간 마음속에 일었던 의혹을 곧바로 폐기했다. 40년 전에도 진소영은 유명 배우였었고 잠시 은퇴하긴 했지만 남편이 죽고 나서 다시 연기를 하면서 더 유명해진데다 말년엔 공로상까지 받을 만큼 잊혀진 배우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40년 전 리스트에 너무 예민해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모든 생각이 거기에 맞춰져서 성만 같아도 혹시?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으니. 김혁은 혼자만의 의혹을 마음속에서 모두 털어냈다. 민하진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아아, 그래도 너무 했다. 그런 것도 다 학교 때 추억인데 뭐 그 정도도 못하게 하냐?”
주은정은 뭔가 더 얘기하려다 입을 다물어버렸다. 김혁이 보기엔 주은정이 저만큼 대꾸해주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곳에 와 지내는 동안 꽤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예전 같으면 캐물어도 절대 입 밖에 꺼내지도 않을 이런 이야기들을 자발적으로 꺼내는 걸 보면. 초반에만 해도 꺼져, 저리 떨어져, 같은 짧은 음절만 말할 줄 아는 아이였는데...
그 사이 떠중이가 찍은 영상을 컴퓨터로 옮겨 다시 재생시키자 모두 대화를 멈추고 그걸 지켜봤다. 화면으로 보는 주은정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 같았다. 인형 미모에다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길고 긴 말을 안정된 음성으로 늘어놓고 있었다.
“어때? 네가 봐도 근사하지?”
“난지 넌지 알 수도 없는 걸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은정의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떠중이가 지난밤에 찍어 두었던 영상에서 좀비가 찍힌 부분과 주은정의 멘트 영상을 합쳐 편집해 올리는 동안 나머지 셋은 도시를 한번 더 돌았다.
하늘을 날며 내려다보는 도시는 아직까진 일상적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다니거나 퇴근길을 서두르고 삼삼오오 모여 음식점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몸을 투명하게 한 채 거리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훑어보자니 골목 골목 그 내부가 더 잘 보였는데 식당들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시끌벅적했다.
웃고 떠들고 어깨를 툭툭 치며 음식이 익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농지거리를 주고받으며 잔을 부딪치고 건배를 외치는 모습들이 활기차고 좋아보였다. 골목길엔 연인들이 서로를 껴안듯 꼭 붙어 걸어가고 사랑의 밀어를 나눌 장소를 물색중이었다.
저런 게 사람 사는 거지. 새삼스레 이 모든 일들이 눈에 들어와 박히는 건 아마도 검은 고치들의 아지트나 시장 마을의 인적 없는 거리를 모두 봤기 때문일 거였다.
좀비 바이러스는 사람 간의 사랑과 우정을 파괴하는 최악의 씨앗이다. 반드시 사라지게 만들어야 하는, 모든 무질서의 원흉이자 피를 부르는 어둠의 씨앗.
한바퀴 돌고 다시 모두 스핑크스의 원룸에 모였다.
떠중이가 올린 영상은 공개되자마자 조회 수가 계속 오르며 화제를 낳았다. 진짜다 가짜다 설왕설래가 활발했으며 댓글도 폭발적으로 늘어만 갔다. 영상은 영상대로 널리 퍼져가는 중이었다.
김혁은 욕실에 가둬둔 남자를 그대로 둘 건지 방으로 옮겨 놓을지를 고민했다. 다른 애들은 모두 몸을 투명하게 하고 김혁 혼자만 모습을 드러낸 채 욕실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혼자 욕실에 갇혀 있었던 남자는 문이 열리자 공포에 질린 눈으로 김혁을 올려다보았다. 입이 막힌 채 불분명한 소리를 질러대던 남자가 입마개를 내리자 소리쳤다.
“너희들 뭐야? 대체, 무슨 짓들을 하는 거야?”
“좀비 때문이니 이해 좀 하지.”
“우리한테 왜 이래. 아무리 개인 방송이라도 저런 건 올리면 안 되는 거야. 누가 시킨 거지? 아누비스가 시켰어?”
“누가 뭘 시켰다는 거야?”
아누비스(이집트의 죽음의 신)는 또 뭐지? 김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가 치고 올라갔다 그래도 이런 짓은 하면 안 되지. 방송은 방송으로 싸워야지. 악플 달고 방송 할 때마다 들어와서 방해하는 것까진 이해해주겠지만 이건 아니잖아.”
아누비스는 아마 다른 개인 방송자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스핑크스, 아누비스 여기 애들 이름들은 다 왜 이런지.
“아니라니까. 그런 건 관심 없고. 좀비 얘기는 진짜야. 지금도 좀비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있어. 아직 당신이 마주치지 않았을 뿐이지.”
남자는 자신이 욕실에 갇혀 한참동안 생각해낸 결론이 맞길 바랐는지도 몰랐다. 예상 답변이 안 나오자 할 말이 궁색해진 듯 했다. 그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대체 우리한테 왜 이래? 납치에 감금에, 정말 이건 범죄라니까.”
남자가 묶인 몸을 버둥대며 소리쳤다. 김혁은 남자의 묶인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납치는 아니고 이건 범죄가 맞으니 사과하지. 설명도 부족했고 놀라게 한 점, 다짜고짜 묶어둔 것 모두 미안해. 하지만 조금만 참아. 믿기지 않아도 믿어.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까. 당신도 좀비가 될지 모르니 이럴 수 밖에 없단 말이지.”
“무슨 헛소리야? 빨리 풀어줘.”
“이 방엔 좀비가 있었어. 너도 봤을 거 아냐. 방송 중에 옆에 있던 애가 목을 물어뜯었다지? 정말 그들이 장난친 거라고 생각해? 저 피는 진짜야. 우리가 그 녀석을 해친 게 아니라고. 좀비한테 물리면 좀비가 되니까 살려둘 순 없어. 당신도 그걸 만졌으니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됐을지도 모르고. 우린 그걸 염려하는 거란 말이지.”
여전히 못 믿겠다는 얼굴로 남자는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하루만 참아.”
“혹시... 그때 그 복수하는 건가?”
“뭐? 복수?”
“그때 그 일은 우리도 좀 너무 했나 생각하고 있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김혁은 흥미를 느끼며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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