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김혁은 저승사자들을 모아놓고 이런 얘기를 하게 될 날이 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털어놓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하면서도 이상하기만 했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마무리는 지어야 했다.
“그래도 그 가족은 행복한 편이지. 다른 애들이나 장회장 막내 동생에 비한다면.”
김혁은 주먹 하나가 떨어져 나간 로봇을 꼭 껴안고 있는 현호를 떠올렸다.
“어떻게 됐는데요? 지금 어디 있어요?”
“어? 그럼 이 유산은 그 사람한테 나눠 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민하진과 떠중이를 번갈아 보며 김혁이 대꾸했다.
“그럴 수 없어. 현호는 일곱 살 때, 입양됐던 집에서 연쇄살인마한테 희생됐거든.”
역시나 셋 모두 깜짝 놀라 표정부터 달라졌다. 민하진이 가장 먼저 소리쳤다.
“네? 연쇄살인마요?”
“연쇄살인마라니, 말도 안돼.”
“무슨 그런 일이 있어요? 어린 앤데.”
조용하던 주은정마저 인상을 찌푸리고 한마디 내뱉었다. 김혁은 먼 기억속의 연옥자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일도 있더라고. 내가 찾아갔을 땐 정말 강아지를 사랑하는 평범한 중년 여자였어.”
40년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지 흰머리가 반쯤 섞인 숱 많은 단발머리를 한 연옥자가 강아지를 쓰다듬고 먹이를 부어주고 어르는 모습이 눈앞에 바로 그려졌다.
“악마한테 갈 때까지도 전혀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니까. 악마가 그 말을 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새삼 인간이 무섭다고 느꼈어. 보험금 때문에 남편들을 두 명이나 죽였던 여잔데 결국 현호를 입양하고는 또 그랬다니.”
“말도 안돼. 어린애를, 너무 잔인해.”
민하진은 어느새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고 주은정은 표정 없이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 울 엄마가 눈물 흘리며 보던 막장 드라마도 이 정돈 아닐 것 같은데 진짜 현실에서 벌어졌었단 말이죠?”
떠중이가 놀라워하며 말했다. 김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40년 전에 그 고아원 얘기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기도 했어.”
“네? 진짜요?”
궁금증에 사로잡힌 셋의 눈동자를 보니 말을 안 해줄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옛날이야기나 하라는 시간인가보다 생각하며 김혁이 말을 이어갔다.
“응. 그것도 첫 리스트 때문에 만난 사람 덕분인데 때는 쌀쌀해지기 시작하던 가을밤이었지. 생전 처음 가본 바다라 실컷 보고 있었는데 칠흑 같은 밤에 웬 여자가 빠져 죽으려고 물 속으로 막 걸어 들어가는 거야.”
“그래서요?”
“야, 조용히 해.”
민하진이 말을 끊은 떠중이를 타박했다.
“보고만 있을 수가 있나? 얼른 뛰어 들어가서 번쩍 안아들고 나왔지. 내가 가고 나면 또 죽으려 들지 몰라서 같이 밤을 새면서 이런 저런 얘길 해줬는데 그게 드라마로 방영됐더라고. 알고 보니까 그 여자가 방송 작가였던 거야.”
그 여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건 호텔방에서였지만 호텔방에 같이 있었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생략했다. 여자랑 밤새 같이 있었다는 말에 민하진이 어떤 반응을 할까 싶어 바라보는데 이번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우와, 책에다 드라마까지 선배님 진짜 대단하네요.”
“책도 있다고?”
민하진의 말에 주은정이 민하진을 보며 물었다.
“우리 선배님이 기억을 잃고 바보처럼 됐을 때 내가 찾으러 왔잖아.”
읔, 바보?
“응.”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주은정까지?
“그때 말해줬어. 선배님을 주인공으로 한 책이 있다고. 맞죠?”
“어, 바보는 아니고. 그건 맞아. 그 책을 쓴 건 서정의 쌍둥이 동생이야. 서진수라고. 지금은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지. 그 할머니가 첫 리스트에 있어서 찾아갔을 때 나와 만난 얘기를 조금 표현해 놨더라고. 뭐 결국은 다 자기 얘기가 대부분인 책이지만.”
“신기하네요. 그게 그렇게 연결되는군요.”
주은정은 진지한 얼굴로 이해하고
“저승사자계의 스타라니까?”
민하진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
“악마가 뭐라고 안 했어요? 우리 정체 다 까발리고 다닌다고 난리 난리 피웠을 것 같은데?”
떠중이는 새로운 의문에 갸웃거렸다.
.
“따지고 보면 그게 다 악마 탓이지. 설명을 자세히 안 해주고 너 지금부터 저승사자다 그러곤 그냥 여기다 툭 떨궈놨으니. 게다가 첫 리스트를 그렇게 얽히고 설킨 인연들로 가득 채워놓았으니 그렇게 연결이 될 수밖에 없지. 난 처음에 진짜 암것도 모르고 여기 떨어졌다니까?”
김혁은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악마의 설명이 많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니 이 말엔 악마도 별 이의를 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떠중이도 잠시 생각해보는 듯 하더니 말했다.
“음, 악마도 가끔 보면 어설퍼요. 리스트는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첫 리스트도 다 나랑 연관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랬어?”
김혁도 처음 듣는 얘기라 관심이 쏠렸다.
“네. 전부 우리 가족한테 사기 친 사람들이었어요. 우리 부모님이 워낙 순진해가지고 사람을 너무 잘 믿어. 후, 그래서 그런 사기꾼들이 많이 붙었던 거죠. 결국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잃게 됐으니 그 대가는 톡톡히 치른 거지만 어쨌든 가엾은 분들이죠.”
외아들을 잃고 덩그러니 남겨졌을 부모님 생각이 나는지 떠중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침묵을 틈타 민하진이 말했다.
“난 별로 나랑 큰 연관은 없었는데? 음, 찬수 오빠 주변 연예인들이나 그쪽 사람들 위주였거든. 근데 그 리스트를 다 완수하고서 깨달은 게 하나 있지. 아, 내가 당한 사고는 별것 아니었구나 하는 거. 거긴 별별 험한 일들이 다 벌어지던 세계였던 거야.”
민하진은 다시 옛날 생각이 나는지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너는? 너의 첫 리스튼 뭐였어?”
떠중이가 이번엔 잠자코 있는 주은정에게 물었다.
“나? 난 우리 식구들하곤 별로 연관성 없는 사람들이었어. 죄인들을 데려가도 딱히 어떤 얘길 들은 적도 없으니까. 그저 사악한 사람들.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정도로 타락한 자들. 검고 검은 살인마들이었어.”
“아무리 저승사자라도 그런 흉악범들을 여자애한테 맡겼단 말야? 너무 한 거 아닌가? 근데 왜 너만 달랐지? 이상하네.”
“원래 악마가 지멋대로잖아.”
민하진이 삐죽거리자 떠중이가 검지 손가락을 입에다 갖다 대며 말했다.
“야, 너 또 새빨간 점 생길라. 말조심.”
“아니, 뭐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렇잖아. 맨날 우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이랬다 저랬다 하고.”
“좀 유치한 면은 있지만 악마가 그렇게 사악하진 않잖아?”
김혁도 한마디 했다. 그러면서도 이제 사악하다고는 생각지 않으며 조금쯤 악마 편을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슬몃 든다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악마는 악마죠, 뭐.”
민하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햇빛 쨍쨍한 하늘에서 날벼락이 쳐 동상의 머리에 정통으로 꽃혔다. 콰지직, 불꽃 냄새가 훅 풍기고 갑작스런 충격에 동상에 조롱조롱 매달리듯 앉아 있던 저승사자들이 모두 허공으로 화다닥 흩어졌다.
“으아아, 놀래라.”
“뭐야, 응?”
장회장 동상 머리에 번개를 맞은 부분이 일부 녹아내려 얼굴이 일그러진 흉물이 되고 말았다. 악마의 응징이었다.
“거봐, 다 듣고 있다니까.”
떠중이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김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하늘을 향해 한마디 했다.
“아유, 그 정도도 못 참아가지고 번개를 낭비하냐? 어?”
하늘에 뭉쳐 있는 구름 하나가 또 우르릉 거리자 민하진이 서둘러 뻣뻣하게 굳은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꾸벅 절을 했다.
“잘못했습니다. 악마님. 다신 안 그럴게요.”
지켜보던 나머지 셋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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