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하얀 무리
악마의 방해로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이제 흩어진 저승사자들은 집 주변 마을을 날아다니며 살펴보기도 하고 정원에서 춤을 추거나 좀 빈둥거렸다. 멀리 나갔다 돌아오기엔 해가 질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해가 지고 저승사자들은 다시 모여 금고 안으로 돌아갔다. 이제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상자를 열어 이것저것 꺼내 만져보고 들어볼 수 있었다. 역시나 제일 먼저 상자들 주변에 모여 속에 든 것들을 꺼냈다.
쌓여 있는 상자들 속엔 완충재로 꼼꼼히 포장된 문화재들이나 보석이 박힌 화려한 장신구들이 있었다. 년도를 가늠하기 힘든 아주 오래된 골동품처럼 보이는 옛스런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 이거 너무 이뻐.”
민하진은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목걸이와 치렁한 귀걸이들을 이것저것 귀에 대보고 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떠중이와 주은정은 오래된 골동품을 들여다 보며 이게 언제 적 물건인가를 추리해보고 있었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나도.”
“거울 같은 건 없어? 나 어때?”
민하진이 귀에 걸린 귀걸이를 흔들어 보이며 주은정의 팔을 잡았다.
“이뻐.”
“제대로 좀 보고 말해야지.”
“그런 거 안 해도 이쁘고 해도 이뻐.”
주은정의 말투는 무척 건조했지만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떠중이도 동감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댔다.
“치.”
민하진은 삐진 척은 했지만 이쁘단 말 때문인지 표정엔 이미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거 하나는 얼마나 할까?”
떠중이가 이번엔 묵직한 골드바 중에 하나를 들어 보며 말했다. 골드바 무더기는 크기별로 쌓여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무더기 것 중 하나였다.
“모르지. 엄청 비쌀 걸?”
평생 구경해보거나 들어본 적 없는 물건이니 아무도 그것의 가치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거기 숨겨져 있는 값비싸 보이는 물건들의 가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장회장 본인도 다 모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자, 이제 구경은 그만하고 우선 현금부터 챙기자. 식료품 사러 가야지.”
“선배님, 저 그거 해보고 싶은데요.”
떠중이가 골드바 무더기 옆에 그대로 선 채 말했다.
“뭐를?”
“매장 싹 비우고 금덩이 하나 놓고 가기.”
“그게 뭐야?”
민하진이 먼저 대꾸했다. 떠중이는 신이 나서 말했다.
“도둑이라도 왠지 멋있잖아. 표식으로 금덩이를 남기는 도둑들?”
“그런 도둑이 어딨어? 그건 도둑이 아니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도 죄야.”
주은정이 한마디 했다.
“한번만 해보면 안돼요?”
떠중이는 간절한 눈빛으로 김혁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장난이나 칠 여유가 없다고 말하려다가 돌려 말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 돈 다 쓰고 이것들을 돈으로 못 바꾸면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잖아.”
민하진이 말하고 주은정이 이어서 말했다.
“사람들에겐 현금으로 직접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럼 정말 이걸 하자고?”
김혁이 의아해하며 주은정에게 물었다.
“그냥 물건 훔치는 건 아니잖아요. 그만한 가치 그 이상일 수도 있는 거니까. 원래 환란시엔 지폐보단 금을 선호하는 걸요. 이런 건 서민들이 현금화하긴 더 어렵기도 하고요.”
김혁은 자신보다 생각이 깊고 똑똑한 주은정의 말은 무시하긴 힘들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늘 그렇게 되고 말았다. 또 무엇보다 좀비로 인해 페쇄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저런 금덩이를 들고 돌아다니며 어디서 바꿀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 그럼.”
김혁의 말이 떨어지자 민하진은 새초롬한 눈으로 김혁을 흘겨봤다. 떠중이는 곧바로 골동품 상자 하나를 재빨리 비우고 거기에 현금과 크고 작은 골드바 등을 담기 시작했다.
“물건들 실을 차도 한 대 필요할 것 같은데.”
“그건 나가서 구해야죠.”
상자 하나를 가득 채우자 챙길 만큼 챙겼다고 생각해 김혁이 말했다.
“이제 됐어.”
뚜껑을 닫은 상자를 어깨에 걸쳐 메고 김혁이 먼저 밖으로 나가고 민하진이 뒤따라 나왔다. 떠중이와 주은정은 문 안쪽에다 골드바가 담긴 무더기 하나를 통째로 들어 문 앞에 옮겨놓았다. 그만하면 일반인들이 밖에서 아무리 힘으로 밀어부쳐도 금고문은 꿈쩍도 안할 것이었다.
김혁이 동상 문을 막 빠져 나왔을 때 동상 앞쪽에서 여러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와 발길을 멈췄다. 바로 뒤따라 나오던 민하진이 등에 부딪치며 멈췄다. 아직은 발각되기 전이라 김혁은 서둘러 상자를 동상 문 안쪽에다 내려 놓고 살며시 문을 닫았다.
그 사이 민하진은 무슨 일인가 싶어 급하게 몸을 투명하게 만들면서 위로 날아올랐다. 그때 아까 목에 걸었다가 잊은 채 빼지 않은 목걸이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작은 소음을 일으켰다.
남자들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이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그들은 다시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지?”
“거기 누구요?”
“저기, 저 성상 머리 쪽에서 방금 뭔가 검은 걸 본 것 같습니다.”
민하진의 몸이 투명해지기 직전에 머리가 살짝 노출 된 모양이었다.
“아니, 회장님 얼굴이...”
그들은 그때서야 동상의 머리 부분이 녹아내린 걸 발견한 모양이었다. 조명이 켜져 있긴 했지만 머리 쪽은 어슴푸레 보이고 가슴께까지만 환히 밝혀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이 어두워진 이후에 모였을 테니 동상 머리의 변화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듯 했다.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하필 회장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들은 오늘. 이건 계시가 아닙니까?”
저승사자들은 모두 몸을 투명하게 하고 허공에 떠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저 사람들 뭐냐?”
“뭐 하는 사람들 같냐?”
“남자들이 왜 원피스를 입었지?”
동상 앞에 모여 있는 중년 남자들 세 명은 평상시 여자들도 잘 입지 않을 풍성하고 하얀 원피스 같은 옷을 맞춰 입고 입었다.
“사망 시기는 불분명하다지만 돌아가신 지 사흘 쯤 된 것 같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장회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실제로는 이틀 전이지만 밀폐된 곳에서 뒤늦게 발견된 터라 멋대로 추정하고 있는 듯했다. 그곳은 패닉룸, 아무도 모르게 죽었으니 아마 발견이 뒤늦게 됐을 거였다.
“정말 부활하실까요?”
“지난번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성상이 저렇게 변한 건 분명 회장님의 일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지난 모임 이후로 이 지역에 비가 오거나 천둥이 친 날도 없지 없지 않습니까?”
신이 없다던 남자가 정말 신처럼 행세하고 있었단 말인가? 저들이 하는 양을 보니 그런 게 분명했다.
김혁은 갑자기 묘수가 떠올랐다. 동상 뒤에서 몸을 나타내고 천천히 그들 앞으로 걸어나갔다.
“선배님, 뭐 하시게요?”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저승사자들 셋과 불안감에 휩싸여 웅성거리던 흰 옷 입은 사내들 셋은 일제히 자신들 앞에 나타난 김혁을 멍하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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