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눈송이들
그러더니 곧 걱정스런 얼굴로 변한 한 남자가 말했다.
“그곳은, 거기는...”
“누구요? 성지를 밟는 자 온천치 못할지니...”
김혁은 그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 잠시 더 침묵했다. 도둑으로 몰리기 딱 좋은 상황임에도 도둑으로 보지 않는 그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서 나오시오. 거긴 함부로 범접하면 큰일나는 곳이요. 이 표식이 보이지 않소?”
남자가 바닥에 깔린 돌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을 보니 띠처럼 둥그렇게 동상 주변을 둘러싸고 색깔을 달리한 작은 돌들이 드문드문 경계 표시처럼 박혀 있었다. 그러나 경계석이라기엔 색깔이 그리 튀지 않아서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만 했다. 그야말로 아는 자에게만 눈에 띄는 돌이었다.
흰옷을 입은 세 남자는 그 경계 밖에서도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서 있었다.
김혁은 동상의 녹아내린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저기에서 온 자다.”
투명한 몸으로 허공에 떠서 지켜보던 저승사자들이 킥킥거렸다. 김혁은 시침을 뚝 떼고 계속 말했다.
“내 기억이 온전치 못하니 너희들이 일깨워줘야 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흰옷을 입은 세 남자는 술렁이며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설마, 그럴 리가...”
“우리 중 아무도 그 모습을 아는 사람이 없지 않소.”
“젊은 육체로 부활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요.”
“하지만...!”
흰옷을 입은 세 남자는 다시 한번 김혁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사흘 전에 죽었다고 생각되는 회장님과 부활에 대한 믿음, 갑자기 훼손된 동상의 머리, 잘못 보았던 동상 머리 부근에서 솟는 듯하던 검은 머리, 불쑥 나타나 머리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젊은 남자가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아무도 모르는가?”
김혁은 다시 한번 힘을 실어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곤 동상을 흘깃 바라보곤 한마디를 덧붙였다.
“왠지 저 모습이 낯설지 않다. 저 자는 누구인가?”
한 남자가 용기를 낸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증거를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증거? 어떤 증거를 말함이냐?”
“다시 오실 때는 증거를 보이겠다 하셨습니다.”
김혁은 속으로 장회장이 진짜 부활에 대해 진지하게 이 사내들과 논의했다는 생각에 어이가 없었다.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부활을 말하다니?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는 ‘부활한 장회장’ 놀이를 충실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남자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너를 들어 올리겠다.”
떠중이가 재빨리 남자의 뒤로 가서 남자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아 김혁의 손짓에 따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어어? 어 내 몸이...”
갑작스럽게 몸이 떠오르자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발을 버둥거렸다. 김혁이 손을 멈추자 떠중이도 멈췄다. 남자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놀란 채 허공에 떠 있는 남자를 바라만 보았다.
김혁이 이번엔 중간에 서 있는 남자에게 손을 뻗치자 민하진이 남자의 머리를 잡았다. 역시 손짓에 따라 남자의 몸이 떠올랐다. 세 번째 남자는 주은정이 맡았다.
흰옷을 입은 세 남자는 그렇게 공중에 떠서 바닥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김혁을 보기도 하면서 믿을 수 없는 그 상황을 판단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김혁이 손을 바닥 쪽으로 내리치듯 하자 저승사자들이 동시에 손을 놓았다. 모두 바닥에 착지하며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둘은 성공이었으나 그 중에 한 남자는 균형을 잃고 털썩 넘어졌다. 그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반면 저승사자들은 때 아닌 이 연극에 동참한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김혁은 이제 동상 뒤쪽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를 가리켰다. 민하진이 잽싸게 그쪽으로 날아가 목걸이를 주워 김혁 쪽으로 가져다주었다. 허공에 목걸이 하나가 둥둥 떠다니다 김혁 손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세 남자는 역시 눈이 휘둥그래지며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저것은...”
“이것을 아느냐?”
“그것은 14세기 것으로 사라진 왕조의 유물이온데...”
헉? 그 정도로 오래된 골동품이란 말인가? 근데 왜 이런 것이 박물관에 안 있고 이런 창고에 처박혀 있담? 떨어지면서 파손되지나 않았을까 걱정하며 김혁은 손에 든 목걸이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중간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그것은 오래전에 어떤 독지가에 의해 경매된 이후 자취를 감췄던 보물이지요.”
“이것은 내게 남은 유일한 표식이다. 나와 함께 이 세상에 떨어진 것이니...”
갑자기 한 남자가 돌바닥에 털썩 엎드리며 외쳤다.
“오, 거룩하신 회장님!”
다른 남자들도 돌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리며 회장님!을 외쳤다.
김혁은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무슨 말을 할까 생각했다. 자신이 장회장임을 믿게 하는데 약간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지만 이들이 알아서 그냥 바로 장회장으로 믿어버리니 살짝 말문이 막힌 탓도 있었다.
“저희는 방금전에야 회장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모르고, 저희를 용서해주십시오.”
이 말을 한 남자는 바닥에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렸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청년의 모습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무례를 범한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내가 누구인지 말하라.”
“회장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온 구원자십니다. 다시 오실 때는 반드시 그리 되리라 하셨습니다.”
“네, 그날이 오면 저희를 구하러 반드시 오시겠다 하셨습니다.”
바닥에 엎드린 그들의 검은 오라를 보며 김혁은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죄인 중의 죄인들이 흰옷으로 그 죄를 감출 수 있다 믿는 것인가?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승사자 김혁이 아니라 부활한 젊은 장회장이어야만 한다.
“믿느냐?”
“믿습니다.”
셋이 입을 맞춰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를 믿는 자는 너희뿐이냐?
“아닙니다. 저희들은 선택된 눈송이들입니다.”
“눈송이?”
“네. 모두가 눈송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선택만이 저희를 다가올 불지옥에서 구원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송이들이라서 하얀 원피스를 입은 것인가? 허공에 떠 있는 저승사자들이 박장대소 했다. 김혁도 터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눈송이가 되기 위해선 뭘 해야 하지?”
“헌신과 희생을 강조하셨기에 그에 따라 열심히 실천을 하다 보면...”
헌신이란 이름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고 희생이란 이름으로 재산을 빼앗지 않았으려나? 본시 헌신과 희생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사기꾼에게 속아 헌신과 희생을 강요당하는 건 다른 문제다.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그것만이 가치 있으며 후회를 남기지 않는 법이다.
김혁은 진실을 말해주고픈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질문했다.
“너희는 눈송이가 되기 위해 얼마 동안이나 노력했느냐?”
“저희는 회장님을 직접 보필하며 그 은혜로움에 겨우 10년만에 될 수 있었습니다.”
헐, 10년씩이나? 그런데도 장회장은 신이 없다는 연구는 왜 한 거지? 그 연구가 먼저였을까? 이런 이상한 단체를 만든 게 먼저였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궁금증을 해결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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