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검정과 하양
김혁이 모습을 감추고도 한동안 흰옷을 입은 세 남자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돌바닥에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한동안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남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슬며시 머리를 들었다. 그리곤 자기들 앞에 김혁이 없는 걸 알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회장님!”
“구원자님!”
“어디 계십니까?”
남자들은 이제 몸을 일으켜 좀 더 넓게 둘러보며 소리쳐 불렀다. 허공에 뜬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김혁이 대답할 리 없었다. 바라보던 저승사자들도 그들을 그저 흥미롭게 바라보기만 했다.
마침내 한 남자가 회장님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말했다.
“어디로 가신 거지요?”
하지만 나머지 두 사람도 영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잠깐 정원 끝에 있는 집을 바라보긴 했지만 집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게다가 자신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그 짧은 순간에 소리도 없이 거기까지 가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일찌감치 시선을 돌렸다.
그 정원에선 집과 동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훤한 잔디밭이었기에 아무리 어둠이 가려준다 해도 누군가 서 있다면 실루엣이라도 안 보일 리가 없는 구조였다.
그러니 뭔가를 찾으려면 당연히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동상 뒤를 한번 살펴볼 법도 하건만 그들은 경계석 안쪽으로는 절대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포기도 빨랐다.
“회장님이 방해하지 말라 하셨으니 우리는 이제 그만 갑시다.”
여태껏 가장 순종적으로 굴던 남자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중간에 있던 남자는 제 손에 여전히 남아 있는 고대 왕족의 목걸이를 다시 한번 들어 올려 자세히 보며 좀 전에 있었던 일이 진짜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해보고 있었다.
“하지만...”
순종적인 남자의 반대편 끝에 서 있던 남자가 뭔가 의혹을 제기하려 했다. 그러자 그 말을 서둘러 막으려는지 순종적인 남자가 확신에 차서 소리쳤다.
“회장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게 틀림없습니다. 저 목걸이가 증거 아닙니까? 게다가 아까 하늘로 몸이 떠오를 때 전 정말 머리가 뽑혀져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순종적인 남자가 목을 갸웃갸웃거리며 말하자 목걸이를 들고 있던 남자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저도 느꼈습니다. 마치 진짜 강력한 손아귀 힘으로 들어 올리는 것 같긴 했습니다.”
여전히 의혹을 느끼는 남자가 대꾸했다.
“그건 그렇지만 이제껏 모두가 불지옥에 대비하기 위해 눈송이가 되고자 애써왔는데 갑자기 좀비를 대비하라니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한다 해도 나무들이 회장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닌데 순순히 우리말을 믿어 주겠습니까? 우리만으론 아직 약하질 않습니까?”
중간 남자가 목걸이를 하늘 높이 쳐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게 있질 않습니까? 구하기 쉬운 물건도 아니고 그들이 이게 어디서 났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들도 이 물건의 가치는 알고 있습니다.”
순종적인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대답했다.
“음, 내 생각엔 이렇게 하면 어떨까 싶은데요.”
“어떻게요?”
“좀비가 창궐한다면 여기저기 시스템이 붕괴되고 폭도들이 나타날 겁니다. 그러면 불타는 곳들도 많을 거고요. 서로 접촉도 하면 안 된다니 죽고 죽이는 것보다도 그런 일들이 더 많이 나타날 테니 세상은 결국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겁니다.”
순종적인 남자는 벌써부터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을 움츠리며 살짝 떨어대기까지 했다. 그의 그런 몸짓에는 누구라도 동조할 만했지만 의혹을 느끼는 남자는 여전히 애매한 표정을 짓고 물었다.
“그거야 그렇지요. 그래서 뭘...?”
목걸이를 쥔 남자가 소리쳤다.
“아하, 그것이 불지옥이다?”
“네. 그러니 그게 틀린 말도 아니지요.”
순종적인 남자는 장회장의 동상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회장님의 영면만으로도 나무들은 동요가 클 겁니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회장님이 다시 오셨다는 걸 어떻게든 믿게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모두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지요. 하지만 좀비라니 이거야 원.”
목걸이를 쥔 남자도 역시 설득의 어려움을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의혹을 느끼는 남자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또 다시 질문했다.
“근데 정말 두 분은 좀비가 온다는 게 믿겨지십니까? 애들 게임도 아니고 그런 게 있을 수 있다구요? 세상은 이토록 멀쩡하기만 한데 갑자기 그런 얘기들을 꺼낸다는 게 전 좀...”
김혁은 불지옥이 올 것을 믿으며 그 멸망의 불길을 눈송이가 된 사람들이 많아야 덮어 끌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좀비를 믿지 못한다는 게 뭔가 모순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의 설명이 설득력이 없었던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있었다. 좀비라고 하지 말고 다르게 설명할 걸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들면서도 한편으론 저들의 믿음의 기준이 뭔지 궁금하기도 했다.
“세눈송이님도 회장님을 믿는다 하지 않았습니까?”
순종적인 남자가 의혹을 느끼는 남자에게 물었다. 순종적인 남자의 눈길이 날카로워져서인지 의혹을 느끼는 남자가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네. 믿지요. 믿지만 그 시기가 언젠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나무들에게 흩어지라고 하는 건 지금 상황에선 오해를 사기 딱 좋겠기에 하는 말입니다. 회장님도 안 계신 이 때에...”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어야 삽니다.”
순종적인 남자가 연거푸 믿음을 강조하자 의혹을 느끼는 남자가 약간 머뭇대다 마침내 물었다.
“첫눈송이님, 두눈송이님은 정말 한 점의 의심도 들지 않으십니까?”
“당연하지요.”
“그럼요. 세눈송이님은 무엇이 그렇게 의심스러우십니까?”
두 사람이 너무도 확신에 차서 말을 하니 의혹을 느끼는 남자는 기가 죽은 모습으로 대꾸했다.
“회장님께서 부활을 하셨더라도 왜 청년의 모습으로 오셨는지가 전 좀, 또 흰옷이 아니고 원래 입지도 않던 검은 옷을 입고 오셨는지가 정말 이상하지 않으시단 말이지요? 늘 검은색은 악마의 색이라고 하셨는데요.”
악마의 색이란 말에 허공에 떠 있던 저승사자들은 서로의 검은 옷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흰옷을 입은 세 남자의 검은 오라를 가리키곤 민하진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거야 회장님께선 젊은 날 워낙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내셨다고 늘 말씀하셨잖습니까? 젊은 시절 얘기를 못 하게 했던 것도 우리를 만나기 이전의 시간이 의미 없기 때문이라 하셨지요.”
김혁은 나머지 아이들에게 말했다. 물론 흰옷을 입은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장회장이 내 나이 또래부터 사람들을 피해 숨어 살았던 과거를 이 사람들한테는 숨겼던가 본데?"
“아하, 그래서 숨긴 걸 가지고.. 질풍노도라구, 하핫!”
아무것도 모른 채 흰옷 입은 세 사람은 여전히 진지하게 대화중이었다.
“... 젊을 때는 뭘 해도 이상하지 않지요. 회장님도 그때는 검은 옷을 좋아하셨는지도 모르고요.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시든 중요한 건 저희 앞에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가엾은 저희를 구원해주시려고 말입니다.”
두 남자는 딱하다는 듯 의혹을 느끼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의혹을 느끼는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보다 못한 순종적인 남자가 호통치듯 말했다.
“어허, 세눈송이님. 나무들을 이끄셔야 할 분이 어찌 그리 믿음이 약한 말씀을 계속 하시는 겁니까?”
이제 믿음에 대한 추궁이 들어가자 의혹을 느끼는 남자는 더더욱 연약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변명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회장님의 은혜를 충분히 받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좀 더 곁에서 모셨어야 하는데 저에겐 시간이 너무 짧아서...”
목걸이를 쥔 남자가 서두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아무래도 세눈송이님은 저희보다 한참 늦게 눈송이가 되셨으니... 자, 그만 돌아들 가십시다. 우리는 앞으로 할 일이 많아요.”
세 남자는 모두 집 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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