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보물 상자를 날라라
떠중이가 먼저 가서 동상 아래에 넣어둔 상자를 꺼내왔다. 상자를 놓은 부근에 경계석이 보이자 떠중이가 말했다.
“어우, 성역이라고 딸랑 돌 몇 개 박아놓고 출입도 못하게 하고 저기다 비밀 금고 문을 만들어 둔 것도 참 비상하네. 아니 저 사람들이 멍청한 건가?”
“그치? 아저씨들이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면 큰일 날 것처럼 무서워하는 거 봤어?”
“믿어야 한다잖아. 믿어야 산다고.”
“어쨌든 우리한텐 다행이지 뭐.”
세 아이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김혁은 우선 뭐부터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은 세트장 마을에 식료품과 생필품을 전달하는 걸 해내야 했다.
시장 마을엔 그나마 가게들이 있으니까 당분간은 어떤 식으로든 필요한 걸 구할 수 있을 테지만 세트장 마을은 사정이 달랐다. 가게도 없이 완벽히 고립된 곳인데다 이제 시장 마을로 장보러 갈 수도 없게 됐으니 빨리 뭔가를 갖다 주어야만 안심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장기전을 대비해야 한다. 그들에게 생존은, 좀비와의 사투보다도 고립된 환경에서의 굶주림이 더 큰 문제가 될 게 분명했다. 고립된 곳에서의 식량 부족은 좀비가 아니더라도 생사람을 뜯어먹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배고픔이란 그토록 무서운 것이라.
고립도 부자와 빈자를 차별한다. 부자들에겐 견디기 넉넉한 고립이 있을 수 있지만 가난한 자들에겐 더 빨리 그들을 무너뜨릴 수단으로 돌변한다. 물자와 안전지대를 확보하지 못한 자들에겐 좀비가 되거나 굶어죽거나 생존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니까.
김혁은 이미 가족을 잃은 크나큰 슬픔을 가진 그들에게 당분간만이라도 좀비로 그득찬 바깥세상을 잊고 정말 동화 속 마을에 사는 행복한 주인공들처럼 아무 걱정 없이 살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주 오래전 처음으로 저승에서부터 돌아와 마주한 저녁노을을 보면서 고아원 아이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먹을 걸 풍족하게 갖다 주고 싶어 했던 그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안쓰러움. 남겨진 자들에 대한 연민. 그때와 다른 건 그때는 찾아갈 수도 없고 도와줄 수도 없었지만 지금은 가능하다는 거였다. 이제 행동해야 될 때다.
“여기서 시간 너무 많이 썼다. 오늘 할 일은 스핑크슨가 뭔가 그 뮤트버 방에 가둬둔 남자를 풀어주는 거 하고 차를 구해서 식료품과 생필품을 싣고 세트장 마을로 가는 거야.”
갑자기 민하진이 물었다.
“어, 근데요. 여기서 거긴 어떻게 가죠?”
“응?”
세상의 모든 길을 다 찾아낼 수 있을 것처럼 눈밝은 민하진이라도 모르는 건 당연했다. 비밀금고로 오는 건 리스트 덕분에 단숨에 가능했지만 막상 리스트에 없는 곳들을 되짚어 찾아가는 건 저승사자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니까.
스핑크스의 방은 리스트에 없는 곳인데다 병원이 있는 도시에 있다는 것 말곤 아는 게 없었다. 게다가 여기로 오는 길마저 생략했기 때문에 어떻게 가야 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병원이 있는 도시니까 일단 거기로 가면, 너희들 그 집 어딘지 몰라?
병원까지는 리스트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 집을 찾는 건 별개 문제지만. 김혁이야 저승에 갔다가 곧바로 그 집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그 방이 어디 있는지 전혀 몰랐지만 셋은 그 도시를 온통 훑고 돌아다녔으니 찾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에서 묻는 말이었다. 그러나 떠중이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저희도 좀비 쫓아서 정신없이 막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들어가게 된 곳인데요? 그 근처라면 몰라도 어딘지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가봐야 알 것 같은데, 너희는 어딘지 알겠어?”
주은정과 민하진도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낭패였다. 그 도시 어느 한 구석에 한 남자를 묶어 놓았고 집은 안에서 단단히 잠겨있다.
누군가 혹시 집안으로 들어가 구해줄 수도 있으려나? 또 다른 방문자가 온다면? 문이 안에서 잠겨 있는데다 영상 소리까지 들린다면 문을 안 열어준다고 화는 내겠지만 문을 부수고 들어가거나 신고를 하진 않을 터였다. 남자 스스로 묶인 걸 풀고 탈출한다면 모를까. 그런 걸 상상해보았지만 그건 역시 불가능할 듯 했다. 좀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단단히 묶어 두었기 때문이다. 결국 저승사자들이 찾아내지 않으면 남자는 방치된 채 잘못될 수도 있었다.
“온 도시를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내야죠.”
떠중이가 단호하게 외쳤다. 떠중이는 괴한들에게 납치돼서 감금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에 더욱 감정이입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쁜 녀석들이 자신들의 범죄가 드러날까봐 두려워 열이 펄펄 끓는 떠중이를 병원에 보내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해서 죽게 뒀던 것이다.
김혁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병원으로 간 다음 찾아보는 수밖에 없지.”
“그치만 이 상자를 들고는 리스트로 이동도 안 되잖아요.”
민하진이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도 또 다른 문제거리였다. 리스트로 이동하려면 상자는 놓고 가야만 했다. 물건을 소유한 채 순간 이동은 불가능하다. 상자는 그대로 둔 채 전부 리스트로 이동했다가 스핑크스 방을 처리하고 길을 알아낸 다음 다시 돌아와 상자를 들고 날아간다?
김혁은 리스트의 주소를 살펴봤다. 장회장의 비밀금고 주소지는 오수연이 살던 부자동네에 있었다. 유지성이 입원해 있던 병원은 다른 동네. 각각의 동네는 알지만 이곳에서 그곳까지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또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르는 게 문제였다. 결국은 상자를 들고 길을 물어가며 찾아가게 생긴 것이다.
“여긴 장수동이고 병원이 있는 곳은 시초동이야. 근데 장수동에서 시초동을 어떻게 가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아휴, 물어 물어 가야죠 뭐. 택시를 타든가. 그 병원은 크니까 이름만 대면 찾아가겠지. 이제 우리한텐 돈이 있잖아.”
“택시?”
주은정이 생각도 못했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택시를 탄다고? 민하진은 살아 있을 때도 여기저기 부지런히 돌아다니던 아이라 그런 쪽으론 생각이 빨리 떠오르는 듯 했다. 아니면 저승사자가 된지 얼마 안돼서 그런 건지도. 40년이나 날아다니고 리스트로 훌쩍 훌쩍 이동하는데 익숙해져 버리면 그런 생각은 잘 떠올라지지 않는데 말이다. 뭐 모로 가든 바로 가든 시초동만 찾아가면 되니까.
김혁은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하며 시간 낭비도 줄일 겸 네 명이 함께 움직일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갖고 말했다.
“그럼 그 남자 방은 일단 리스트로 이동해서 찾고 그건 어쩔 수 없이 직접 들고 날라야 하니 팀을 나눠야겠는데?”
김혁이 상자를 보며 말하자 떠중이는 난처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걸 계속 들고 다녀야 한다고요?”
“그럼 어쩌겠냐? 무소유를 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인데. 어차피 상자와 리스트는 따로 따로 움직여야 하니 굳이 넷이 뭉쳐서 돌아다니는 것도 비효율적이고.”
“넌 그런 건 생각도 못하고 신나게 돈 쓸 생각부터 했지?”
민하진이 가볍게 떠중이를 놀리듯 말했다.
결국 리스트로 이동할 수 없다는 게 고민할 거리들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트럭과 식료품을 구하는 것도 가급적 그 지역 주변 도시에서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상자는 어쩔 수 없다 해도 대형차까지 들고 날아가는 건 정말 비효율적이고 역시 시간 낭비니까.
오늘 밤 가장 큰 문제는 상자였다. 상자가 새벽 이전에 무사히 세트장 마을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목표를 둬야 한다. 상자는 트럭과 물건을 구하는 곳에도 있어야 하고 세트장 마을까지 무사히 도착해서 그들에게 전달되야만 한다.
주은정이 말했다.
“이걸 전부 세트장 마을에 갖다 줄게 아니라면 어디다 분산해서 옮겨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우리가 그때 그때 재빨리 가져다 쓰려면요.”
주은정은 이미 오늘 이후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말이 맞았다. 거기에 다 갖다 주기엔 꽤 많은 양이었다.
“그렇겠지.”
김혁은 거점을 어디로 정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봤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여길 들렀다가 다시 떠나는 것도 거리상으로 너무 멀었다. 가까운 곳들에 여기 저기 분산해놓는 게 좋은 방법이었다. 우선 생각난 곳은 병원에서 가까웠던 짱돌 애인집이었다. 그 집은 현재 비어있을 터였다.
“음 그럼 일단 짱돌 애인 집이 병원에서 가까우니까 거기 들러서 조금 남겨두고 또 그 산골 오두막도 비어있고 아무도 안 오니까 거기도 좋겠고 일단 그렇게 하자. 중간 거점은 되겠잖아? 나중에 좀더 좋은 지점이 생기면 그때 더 옮기더라도. 그리고 적당한 만큼 남겨서 세트장 마을에 갖다 주고. 그럼 괜찮겠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간 없으니까 팀을 나눠볼까?”
김혁이 말하자 민하진이 눈을 반짝이며 김혁 쪽으로 다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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