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풀리지 않을 오해
차 안의 칙칙한 오랜 침묵을 깬 건 민하진이었다.
“차는 어떤 걸로 고를까요? 물건을 아주 많이 많이 실을 수 있는 게 좋겠죠?”
“...”
아무도 대답이 없자 유난히 쾌활한 척을 하며 민하진이 재차 말했다.
“우왕, 산타클로스가 된 기분일거야. 선물을 가득 싣고 달리자 달려. ♪흰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어떤 루돌프가 좋을까?”
민하진이 노래도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과도하게 두리번거리는 시늉까지 했지만 여전히 모두들 아무 반응이 없었다.
“...”
그러자 결국 민하진은 핸들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아 뭐, 그만한 일에 다들 풀이 죽어서 이래?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지. 그 아저씨 복이 거기까지였나부지.”
“...”
민하진은 누군가와 대화하는 걸 포기한 채 창밖을 두리번대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쳇, 덤프트럭은 이런 거 운전하는 거랑 다를 텐데... 택배 트럭은 너무 작을 것 같고 그래도 그게 좋을려나?”
이제 저승사자들이 탄 차는 제법 차량들이 많이 보이는 큰 길 쪽을 달리고 있었다. 지나쳐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김혁도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는 중이었다. 이때 옆을 스쳐가는 버스를 보며 민하진이 말했다.
“음, 버스에다 물건을 왕창 몰아넣는 건 어때요? 엄청 많이 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들고 날아갈 때도 떨어질 염려도 없고.”
김혁은 앞서가는 버스 뒤꽁무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너 버스 운전은 할 수 있겠냐?”
“모르죠. 뭐 한번 해보는 수밖에.”
“우리야 상관없지만 신중해야 돼. 도로에선 다른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는 문제니까.”
김혁은 최대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없는 식으로 일처리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뭐 영화에서 보니까 처음 해본다는 사람들이 버스도 잘 몰고 비행기도 막 몰고 그러던데요?”
민하진의 엉뚱함에 마침내 오랫동안 말이 없던 떠중이가 한심하다는 듯 대꾸했다.
“야 그건 영화니까 그렇지.”
“일단 해보는 거야. 안 되겠으면...어, 그래! 늬들이 뒤에서 밀면 되잖아.”
“뭐? 진짜 어이가 없네.”
민하진이 백미러를 보고 기가 찬 표정을 짓는 떠중이를 보며 씨익 웃었다.
“왜? 뭐가? 사람들 많은 데선 늬들이 밀고 그대신 안 보이는 데선 내가 들고 갈게. 그럼 되잖아. 응? 내가 운전하는 연기도 못할까봐?”
김혁은 운전을 하는 건지 운전하는 연기를 하는 건지 헷갈리는 몸짓을 하는 민하진을 보면서 상상했다. 대형 버스 운전석에 앉아 연기하는 민하진과 버스 뒤에서 몸을 투명하게 한 채 차를 미는 저승사자들이 떠올라 슬몃 웃음이 났다. 워낙에 힘이 세니 한 명씩 교대로 밀면서 따라 가도 될 일이었다. 어쩌면 오히려 그게 더 안전할지도 몰랐다.
“그보단 물건을 가득 실은 이상한 버스가 돌아다니면 불필요하게 사람들 관심을 끌지 않겠어?”
주은정이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민하진은 여전히 쾌활하게 대꾸했다.
“안이 안 들여다보이는 걸루 하면 되지. 왜 관광버스 같은 거 있잖아. 의자 막 뜯어내고 하면 공간도 넉넉할 거고. 어때 내 생각이? 그냥 트럭이 더 낫겠어요?”
민하진이 이번엔 김혁을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김혁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하늘을 날려면 사방이 막혀 있는 게 유리하긴 했다. 물건들의 낙하를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까.
“아니, 버스 그거 괜찮을 것 같은데?”
“그쵸?”
김혁의 대답에 민하진의 얼굴에 또 의기양양한 표정이 떠올랐다.
“제법이네. 어중이가 오랜만에 괜찮은 생각을 다 해냈어.”
말을 아끼는 주은정마저도 칭찬을 늘어놓자 민하진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말투는 공격적이었다.
“야! 내가 어중이라고 하지 말랬지?”
“왜? 어중이 떠중이 얼마나 귀여운 별명인데? 그런 별명은 뭐 아무나 갖냐?”
다시 화제가 엉뚱한 쪽으로 흐르는 것 같아 김혁이 말을 잘랐다.
“자 자 이제 정해졌으니 빨리 버스를 구해야지.”
“근데 어디 가서 구하죠?”
“버스 회사 주차장?”
떠중이의 간단한 대답에 민하진이 물었다.
“거기가 어디 있는데?”
“나야 모르지.”
“어휴, 그런 하나마나한 소리를.”
“각자 훝어져서 도심을 훑든 보이는 경찰서나 부동산 사무실 같은 데 찾아 가서 지도라도 보고 오자구.”
“네.”
“길 엇갈리니까 여기다 차 세워놓고.”
“오늘은 마트만 싹쓸이 할 거죠?”
“아무래도 그게 급선무니까. 더 필요한 건 마을 사람들한테 물어봐서 차차 진행시키도록 하고. 버스랑 마트 위치 확인되면 바로 와. 이제 정말 진짜 서두르자.”
길 한 켠에 차를 세워둔 채 저승사자들은 모두 몸을 투명하게 하고 각자 뿔뿔이 동서남북으로 흩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넷은 차로 다시 모였다. 맨 먼저 도착한 건 주은정이었고 그 다음에 떠중이 그 다음에 김혁 그리고 마지막에 민하진이 도착했다.
“부동산 사무실 지도를 봤는데 이 도시엔 관광버스 차고지를 가진 회사는 찾을 수 없었어요.”
떠중이는 부동산 사무실에 들렀던 모양이었고
“멀지 않은 곳에 고속버스터미널은 있던데요. 음 가까운 곳에 대형마트는 두 개 있고 좀 더 작은 중소형 마트는 꽤 여기저기 있지만 버스 세울만한 주차 자리가 확보되는 데가 별로 없어요.”
주은정은 하늘을 배회하며 이곳저곳 눈여겨 보고 온 모양이었다.
“음 저어기 관광호텔이 하나 있는데 거기 주차장에 관광버스 몇 대가 서 있긴 한데 그건 좀 그런가요?”
민하진이 갔다 온 곳엔 관광호텔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김혁이 둘러본 곳엔 특별한 곳이 없었다. 눈에 띄는 경찰서에 들어가서 도시 지도를 훑어 봤고 거기서 지금 말한 고속버스터미널과 마트 위치들, 관광호텔을 대충 훑어보긴 했지만 그보단 다른 새로운 문제 거리를 들고 온 터였다.
“근데 말이야. 은정아, 한조야!”
“네.”
“네.”
“너희들이 좀 곤란하게 됐어.”
주은정이 정말 천진한 눈동자로 김혁을 향해 되물었다.
“네? 뭐가요?”
김혁은 좀 난감했지만 경찰서에서 들은 대로 말했다.
“내가 경찰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말야. 너희들 얼굴이 몽타주로 뿌려질거래.”
“네? 몽타주요?”
떠중이가 기겁을 한 얼굴로 소리쳤다.
“일단 택시기사가 목격한 인상착의대로 너희 둘의 몽타주를 작성할거라고 하더라고. 너희들 인상을 꽤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어.”
“진짜 우리를, 얘랑 나를 강도로 단정지어버린 거예요?”
떠중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헐! 저승사자 최초로 공개 수배되는 건가?”
민하진의 말에 주은정이 조용히 대꾸했다.
“야, 넌 지금 농담이 나와?”
“뭐 어차피 잡히지도 않을 건데 뭔 걱정?”
김혁은 재빨리 말했다.
“근데 강도가 아니고 살인용의자야.”
“살인이요? 맙소사.”
떠중이와 다르게 주은정은 상대적으로 이성적인 눈빛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그 여자를 발견했나보군요.”
“그런가봐.”
“으, 진짜 이게 뭐야?”
“하지만 보면 알 텐데요. 금방 죽은 사체도 아닌데...”
하지도 않은 범죄로 의심받는 건 아무리 저승사자라도 기분 나쁜 일임엔 분명했다. 떠중이는 짜증스럽게 반응하고 주은정은 반박으로 반응하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뭐 어쨌든 수상하니까 일단 잡고 보자는 거겠지. 암튼 이미 벌어진 거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오늘 할 일은 해야지?”
“그래 모르고 있는 것보단 낫잖아. 몽타주라도 잘 나오는 게 낫겠지? 그 아저씨가 잘 기억하고 있어야 될 텐데.”
“야! 민하진. 진짜 니 일 아니라고 그럴래?”
“헤헤, 미안. 난 되게 재밌네. 이런 경험을 어디서 해보겠어? 우리가.”
떠중이가 사납게 노려보자 민하진은 재빨리 김혁에게 말을 걸었다.
“버스는 고속버스로 해요? 관광버스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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