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버스1
버스로 생필품을 실어 나르는 일에 또 어떤 문제가 있을까 생각해보면서 김혁은 대답했다.
“고속버스는 아무래도 노선 아닌 델 달리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거야.”
“그렇겠죠? 역시 관광버스가 좋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민하진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며 말했다. 김혁은 거리를 달려가는 관광버스를 상상해보며 생각했다.
아무려면 어떠랴. 어차피 버스 내관뿐 아니라 외관도 손을 봐야 할 터였다. 한번만 사용할 게 아닌데다 물건을 실어 나를 목적에 맞는 버스로 계속 사용하려면 추적도 피해야 하니 외관 역시 바꿔놓을 필요가 있었다.
김혁은 이번엔 여자의 은색 차를 보며 말했다.
“아마 이 차도 수배중일 테니 근처에서 버려야 해. 그 호텔, 여기서 안 멀지?”
민하진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던데 어, 차로 가면 좀 다를지도 몰라요. 아시잖아요. 하늘길하고 도로 사정 다른 거.”
민하진은 주은정을 슬쩍 한번 곁눈질하곤 재빨리 안 본 척을 했다. 주은정은 별다른 반응 없이 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길을 안내 할 사람도 차를 운전할 사람도 민하진이었다. 거리상으로 봐도 굳이 따로 움직여가며 일을 나눌 필요는 없어보였다. 상자를 들고 오래 걷는 건 시간이 너무 걸려서 안 될 일이니 최대한 버스 근처까지 간 다음 차를 버리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럼 일단 이 차로 호텔까지 갔다가 차는 다른 데 버리자고.”
“네.”
모두들 차에 올랐다.
“아, 이것 참 골칫덩이다.”
차 뒷좌석에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자를 가리키며 떠중이가 말했다.
“이제 알았냐? 뭐든 많이 소유하면 그만큼 무거워지고 힘들어지는 거야.”
민하진이 시동도 걸기 전에 아는 척부터 하자 떠중이는 비아냥거렸다.
“아이쿠, 대단한 명상가 납셨네.”
“뭐 좋은 말은 너만 하란 법 있냐?”
얘네들은 왜 대화를 얌전히 하지 못하고 늘 싸울 듯이 하는 걸까? 생각하며 김혁이 서둘렀다.
“자 빨리 가자.”
차는 곧 출발했고 도심지 외곽의 꼬불꼬불 좁은 길들을 달려 그리 머지않은 곳에서 멈췄다. 관광버스가 줄지어 주차돼 있는 호텔은 약간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는 사람만 찾아갈 법한 장소, 호텔이라기엔 초라하고 오래된 낡은 3층짜리 건물이었다.
모두가 상자와 함께 은색 차에서 내리고 난 다음 민하진은 차를 출발시켜 시야에서 사라졌다. 좀 멀리까지 차를 끌어다놓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이후 나머지 셋은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움직였다. 눈치를 살펴 주차장 벽을 훌쩍 뛰어넘어 호텔 주차장에 세워진 관광버스들 중 가장 바깥쪽에 세워진 버스로 살며시 다가갔다. 버스 문은 주먹 하나가 가볍게 통과하고 나자 곧바로 열수 있었다.
이미 밤이 무르익어 주차장에 출입하는 차들은 없었지만 소음이 약간 크게 나서 잠시 멈칫했지만 다행히 아무도 나와 보진 않았다. 저승사자들은 차 안을 슬쩍 둘러보고 상자를 미리 실어놓았다.
“떠중아, 넌 여기 잠깐 있어.”
주은정이 주도적으로 말을 하자 떠중이는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왜? 뭘 하려고?”
“차 키 가져오게.”
주은정이 운전석 백미러에 걸어 놓은 커다란 선글라스를 집어들더니 덧붙여 말했다.
“저야 어차피 얼굴이 알려질 예정이니 저한테 맡기세요.”
운전용 짙은 다갈색 선글라스는 모양도 모양이려니와 주은정의 얼굴에 너무 커서 예쁜 얼굴의 반을 다 가려버렸다. 짧은 머리에 짙은 색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주은정의 모습은 약간 기묘한 매력을 풍겼다.
김혁은 먼저 걸어가버린 주은정을 따라가며 몸을 투명하게 했다. 검은 옷의 소녀가 어떤 행동으로 차 키를 얻어낼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뭔가 생각해둔 게 있는 모양이니 하는 대로 지켜볼 생각이었다.
주은정은 호텔 프런트로 천천히 다가가 말했다.
“저기.”
“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호텔 프런트를 지키던 불그스름한 오라를 가진 젊은 남자 직원은 몸에 배인 친절한 태도로 대하고 있었지만 먼저 주은정의 범상치 않은 모습에 일단 생경한 표정을 잠깐 지었다가 얼른 지웠다. 위 아래로 차려 입은 고객의 특이한 검은색 복장에 짧게 눈길을 주곤 다시 커다란 선글라스에 눈을 고정했다.
주은정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 관광차에 묻어 온 관광객인데요. 버스 안에다 핸드폰을 놓고 온 것 같아요. 객실을 아무리 뒤져봐도 없네요. 버스에 가서 좀 찾아 봐야 될 것 같은데 버스 문 좀 열게 도와주실래요?”
주은정의 모습은 분명 놀러 온 사람의 행색은 아니지만 주차장에 주차된 관광버스가 한 여행사 것뿐이므로 호텔에 머물고 있는 관광팀을 누구라고 하지 않아도 직원은 이미 알아듣고 있었다.
“아, 봄밤 즐기기 축제에 오신 팀이시죠? 몇 번 버스죠?”
“바깥쪽에서 두 번째인데...”
주은정은 고개를 돌려 바깥 버스를 살피는 척까지 했다.
“네, 잠시만요.”
프런트 직원은 알겠다는 듯 전화기를 들었다.
프런트 직원이 이런 저런 처리를 하는 동안 김혁은 봄밤즐기기 축제는 또 뭔가 생각했다. 처음 들어보는 축제였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시기니 꽃구경을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대체 봄밤에 즐길만한 게 뭐가 있지? 생각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봄바람, 봄햇살, 봄내음 그런 거라면 모를까, 대체 봄밤에 뭘 하면서 즐기려고 먼 길을 버스까지 타고 오는 건지 알아낼 길은 없었다. 아마 이 도시에서만 열리는 어떤 축제가 있는 모양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차 키를 가지고 중년 남자가 주춤주춤 프런트 쪽으로 다가왔다. 검푸른 오라를 가진 남자는 약한 술냄새를 풍기며 적당히 술이 오른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쯤엔 이미 주은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프런트 직원은 넓지도 않은 실내를 두리번거리다가 차 키를 든 남자에게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말했지만 결국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남자는 혼자서 버스로 갔다.
버스들이 세워진 쪽은 후미진 곳이어서 특별히 가로등 불빛이 미치지 않아서 더 어두웠다. 어둠속을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버스 부근에서도 아무도 발견할 수 없자 툴툴거리듯 말했다.
“젠장, 핸드폰 같은 건 미리 미리 잘 좀 챙겨갖고 다녀야지 잘 밤에 오라가라야? 오라고 해놓고 가긴 또 어딜 갔고? 참 정신없는 여편네들이라니까.”
남자는 버스 문에 차 키를 꽂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다음 버스 실내에 불을 밝히고 한참 의자나 바닥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전체를 한번 훑어봤다.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버스에서 내려 다시 버스 문을 잠그곤 프런트로 돌아갔다. 그리곤 애먼 프런트 직원에게 화난 말투로 쏘아댔다.
“내가 다 찾아봤는데 버스엔 아무것도 없어요. 그 여자가 또 오거든 자기 주변이나 좀 잘 찾아보라고 하고 나한테 다시 오라가라 전화도 걸지 마슈. 에잇, 귀찮게시리. 술맛 다 떨어졌네.”
주은정은 어느새 몸을 투명하게 하고 프런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남자의 방까지 따라갔다. 선글라스는 이미 어디다 벗어뒀는지 쓰고 있지 않아서 민하진이 동상 뒤에다 목걸이를 떨어뜨릴 때 같은 실수는 절대 하지 않았다. 김혁은 남자 뒤를 따라 다니긴 했지만 기본적으론 주은정이 하는 양을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주은정은 남자의 호텔 방안으로 사라졌다. 얼마 후 방문이 열리고 주은정이 걸어 나왔다.
물론 방금 전까지 남자 손에 들려 있던 차 키를 가지고서였다. 하지만 복도의 CCTV를 염두에 둬선지 몸은 투명하게 하고 차 키만 최대한 벽에 붙여 이동시켰다. 김혁 눈에는 다 보이지만 사람들 눈에는 문이 저절로 열렸다 닫히고 물건만 기이하게 벽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만 보일 거였다. CCTV가 공개되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날 거였다.
김혁은 자신이라면 차 열쇠를 들고 그냥 방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 주은정은 특이하고도 주도면밀하다.
주은정이 CCTV에 얼굴이 찍히지 않으면서 오히려 미스터리한 영상을 남기는 쪽을 택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 같았다. 당장 내일 버스가 사라진 걸 알더라도 이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뉴스에 보도가 안 될 확률이 더 높았다. 호텔 측에선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면 안 되겠기에 저런 영상을 공개하지 않을 것이고 그런 은폐가 오히려 사건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버스 도난 사건에 대한 뉴스가 더 적어질 확률이 컸다. 그런 생각일까?
내일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단순히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어쩌면 상황을 더 재밌게 만들고 싶은 주은정만의 장난스러움이 묻어난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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