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버스2
김혁과 주은정이 버스로 돌아왔을 때 민하진도 이미 떠중이가 있는 버스로 돌아와 있었다.
“차 키 찾았어?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았어?”
“연기 좀 했지.”
주은정은 미소를 띄운 채 대꾸했을 뿐 상세한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민하진은 기어코 한마디 했다. 마치 자기 영역을 침범당한 사람처럼 골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와, 이제 아주 연극에 맛들였나 보네?”
“옆 버스야.”
주은정은 대꾸하지도 않고 떠중이를 향해 말했다. 떠중이는 상자를 가지고 내리기 전에 제일 큰 금덩이 하나를 꺼내 운전석 의자에 놓아뒀다. 빈 의자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금덩이와 구멍 뚫린 버스 문을 번갈아 보며 민하진이 말했다.
“거기 두면 누가 안 훔쳐갈까? 누가 훔쳐갈 것 같은데?”
“버스값은 둬야지. 그냥 가?”
“그냥 가자는 게 아니고 거기 두기에 불안하다는 거지. 내 말은.”
“어차피 같은 회사 사람일 건데 뭘 그래. 남의 버스에 누가 온다는 거야?”
“그래도 모르는 거지.”
민하진의 걱정도 무시 못할 것이긴 했다. 떠중이는 애매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그런 거까지야 우리가 어떻게 해? 없어지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돈은 돈대로 쓰고 괜히 도둑으로 몰리니까 그렇지. 살인용의자에 강도까지 되고 싶은 거야? 그 몽타주 참 볼만하겠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안전하게 그냥 호텔 직원한테 맡기는 게 나을 걸?”
“음...”
떠중이는 의자 위에 놓아둔 금덩이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해보는 듯 하더니 말했다.
“그럼 포장도 해야 되고 메모도 적어야 하고 필요한 게 많은데? 이대로 불쑥 내밀고 전달해달랄 수도 없잖아.”
“그런 거야 저 안에서 얻으면 되지. 근데 택시비도 한 개 줬다면서 이렇게 큰 버스에도 한 개만 놓냐?”
떠중이는 의자에 놓아뒀던 금덩이를 다시 들어 민하진 앞에 쳐들어 보이며 말했다.
“크기가 다르잖아. 크기가. 이 크기 차이마다 금액 차이가 어마어마할 텐데. 이런 낡은 버스가 얼마나 한다고. 이거면 될 거야.”
떠중이가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모두를 한 번씩 둘러봤지만 그 금덩이의 가격이나 버스 가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새 차도 아니고 진짜 오래 된 버스니까 충분할 거야. 난 이제부터 모든 걸 아껴 쓰기로 결심했어!!”
떠중이의 선언에 민하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기준이 없어. 기준이.”
하지만 저승사자들 누구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떠중이는 상자를 두 번째 버스로 옮겨두고 민하진은 프런트에서 펜과 메모지를 슬쩍 가져왔으며 주은정은 누군가의 여행 가방에서 선물 포장된 상자 하나를 훔쳐오는 일을 각각 동시에 했다.
선물 포장된 포장지를 살살 들어내 찢어지지 않게 벗겨 내 보니 와인이 든 나무 상자였다.
“와인? 비싼 건가? 이 값은 안 지불해?”
민하진이 물었지만 떠중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만지도 모르고 선물용이니까 생계에 지장이 가는 손실도 아니잖아.”
그렇게 말은 해놓고도 주은정을 보고 물었다.
“돈다발 한 개라도 갖다놓는 게 좋겠어?”
“됐어.”
주은정은 곧 딱 잘라 말했다.
“거래처 사람한테 받은 선물이라고 했어. 먹은 셈 치겠지.”
금덩이는 메모지와 함께 조심스레 포장지를 벗겨내고 빼낸 와인 상자 안에 넣어졌고 다시 곱게 포장됐다. 물론 처음 포장됐던 것보단 깔끔한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금덩이를 감추는 데는 성공이었다.
그걸 프런트에 맡기는 건 주은정이 하기로 했다. 저승사자들 모두 투명한 몸으로 따라가 주은정과 프런트 직원의 대화를 바라보았다. 주은정이 어떤 연기로 프런트 직원을 속이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주은정은 다시 큰 운전용 선글라스를 쓰고 프런트 앞까지 뚜벅뚜벅 당차게 걸어갔다. 프런트 직원은 이제야 다시 나타난 주은정을 발견하곤 이번엔 친절한 미소 속에 경직된 표정을 감춘 채 맞이했다. 말투도 이전보다 무뚝뚝해져 있었다.
“고객님을 계속 찾았었는데요. 운전사는 벌써...”
주은정은 그의 말을 자르며 정말 미안함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로 빠르게 말했다.
“아, 아까는 정말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급해서 그만. 제 핸드폰 찾았지 뭐예요. 꺼진 채로 침대 사이에 끼어 있더라구요. 기사님한테 너무 죄송해서 작은 선물 하나를 준비했어요. 이것 좀 그분께 전해주시겠어요?”
표정이 풀린 직원은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점잖게 대꾸했다.
“고객님께서 내일 직접 전달해주시는 건 어떨까요? 어차피 오늘 밤에는 저희도 전달이 어려운데요.”
“아, 제가 내일까지 머무를 수가 없어서요? 전 오늘 떠나거든요.”
“아 네에. 그러시군요. 메모엔 뭐라고 남길까요? 몇 호실에...”
프런트 직원은 의심쩍은 눈빛으로 주은정을 훑어보면서도 포장된 선물을 넘겨받은 다음 메모장을 꺼내들었다.
작은 얼굴의 반이 커다란 선글라스에 가려진 주은정의 무표정한 입술에선 마지막 말이 흘러나왔다.
“안에 메모도 같이 넣었어요. 아침 일찍 전달해주시기만 하면 돼요. 지금 핸드폰 배터리도 없고 우리 가이드도 찾아봤는데 어디 갔는지 안 보이네요. 내일 아침 사라진 걸 알면 당황할 거예요. 그러니까 꼭 가장 먼저 전달해주셔야 해요. 그럼. 잘 부탁해요.”
주은정은 상자에서 집어간 지폐 한 장을 프런트로 내밀었다. 호텔 직원이 표정을 풀고 팁을 받아 챙기고 프런트 안쪽에 선물 상자를 잘 보관해두는 동작을 익숙하게 마무리 짓는 동안 주은정은 조용히 되돌아 나왔다.
허공에 떠서 몸을 투명하게 한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떠중이가 옆의 민하진에게 속삭였다.
“쟨 아무래도 쟤네 할머니 재능을 이어받았나봐. 연기가 제대로야. 진짜 같지 않냐?”
떠중이의 목소리에는 자랑스러움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김혁은 진지하게 떠중이가 주은정을 친구로서가 아니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민하진은 아니나 다를까 충분히 짐작 가능한 대답을 내놓았다.
“뭐,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떠중이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민하진을 바라보던 시선을 옮겨 김혁을 봤다. 김혁은 그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주은정은 호텔을 빠져나오고서도 길 끝까지 좀 더 걸어갔다. 혹시 모를 프런트 직원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었다. 길 끝 어둠속에 닿아서야 몸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젠 필요 없어진 선글라스가 바닥에 뚝 떨어졌다.
그 뒤로 모든 일들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이뤄졌다. 김혁과 떠중이가 몸을 투명하게 한 채로 버스의 앞 뒤를 잡고 살짝 들어 주차장에서 조용히 바깥으로 이동시켰다. 누군가 목격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바퀴가 아주 살짝 떠 있었기에 버스가 저절로 스르륵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다행히 허공에 떠서 지켜보는 나머지 저승사자들 외엔 목격자는 없었다.
시동 켜는 소리도 없었고 불을 켜거나 부릉거리지도 않았으며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한밤중의 호텔 주차장 버스 도난 사건은 그렇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가운데 쉽사리 마무리 됐다.
버스는 그런 상태로 어둠속을 달려 널찍하고 외진 공원 근처에 다다랐다. 재빨리 내부에 설치된 의자들을 모두 제거한 다음 뽑아낸 의자들은 한군데 모아 수북하게 쌓아뒀다.
운전석 바로 뒷줄 의자 4개와 맨 뒷좌석을 제외하고 중간의 의자들이 모두 뽑혀져나간 버스 내부는 아늑하면서도 넓은 텅 빈 공간으로 탈바꿈됐다. 물론 바닥이 흉물스럽게 변해 있긴 했지만 적당한 것 하나를 갖다 깔고 나면 물건을 싣는데 큰 지장은 없을 듯 보였다.
“다 됐다.”
“마트는 어느 쪽이지?”
주은정이 하늘로 높이 떠서 거리를 살피곤 한쪽 방향을 손짓했다. 주은정은 하늘에서 길을 안내하고 민하진은 아무도 보지 않는 운전석에서 홀로 고독한 운전사 연기를 펼쳤으며 김혁은 바퀴만 풀린 버스를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 줬고 뒤에선 떠중이가 힘으로 버스를 밀며 도로를 따라 버스를 이동시켰다.
그렇게 그들은 깊은 밤, 불꺼진 마트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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