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마트2
이제 남은 건 최대한 저승사자들이 마트 내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CCTV에 안 찍힐 방법과 문이 열려 경보가 울릴 때에서부터 경찰이나 보안업체가 도착하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 버스에 모든 물건을 싣고 아무도 모르게 유유히 빠져나갈 가장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는 거였다. 김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음, 내부에 CCTV는 몇 개나 될까?”
“그냥 보이는 족족 싸그리 부서뜨리는 게 빠를 텐데요?”
민하진의 말에 떠중이가 급히 반대하고 나섰다.
“안돼, 그럼 돈을 더 써야 하잖아.”
아까까지만 해도 택시비로 금덩이를 턱턱 내놓던 떠중이가 이러고 나오자 모두들 조금 궁금한 표정이 되어 바라보는데 민하진이 말했다.
“아니 넌 또 왜 갑자기 스크루지 영감처럼 구는 건데? 모든 걸 하룻밤새 다 써버릴 것처럼 굴더니만.”
그러나 떠중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진지한 표정에서 여기까지 오는 내내 침묵했던 이유가 돈 씀씀이에 대한 어떤 생각들을 하느라 그랬던 모양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떠중이의 마음 속 변화가 어떻든 지금 상황에선 맞는 말이었다. 도둑 아닌 도둑이기로 한 지금 어떤 식으로든 물질적 피해를 입힌다면 그걸 보상하는 게 맞았고 좀비 사태가 얼마나 길지 알 수 없으니 가지고 있는 돈을 잘 써야 한다는 걸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 돈 관리를 맡은 떠중이에게 그런 생각들이 자리 잡혀 가고 있다는 반증이라 오히려 다행스럽기도 했다. 아무도 말이 없는데 여전히 민하진만 떠들어댔다.
“그럼 우리 모두 변장을 할까? 응? 우리 정말 TV에 나오는 거야? 마트에 침입한 검은 4인조.”
혼자 신이 나서 허리에 손을 얹어 가며 무슨 포스터라도 찍는 양 하는 민하진의 모습이 들떠 보이는데다 여전히 어린애 같았다.
“그냥 우리 모습은 드러내지 말고 재빨리 해치워버리는 게 낫지 않아요?”
떠중이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김혁을 향해 물었다. 이 말에 먼저 반대한 건 주은정이었다.
“그런 장면이 공개되면 이 마트가 계속 영업 할 수 있겠어?”
김혁으로선 호텔에서 차 키로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직접 실행했던 주은정을 봤었기 때문에 이 말에 좀 의아하기도 했지만 곧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쩌다 한 개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이 거대한 공간의 허공을 가득 메운 채 수많은 물품들만 이리저리 휙휙 떠다니는 현상이 CCTV에 잔뜩 찍혀 있다면 그 영상을 본 인간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김혁이 한마디 덧붙였다.
“역시 CCTV를 가려야겠지?”
이번엔 민하진이 먼저 대답했다.
“그럼 최대한 안 찍히게 몰래 다가가서 페인트라도 확 부어버릴까?”
“안돼, 그건 안 지워지는 거 아냐? 부수는 거랑 뭐가 다르냐? 그냥 뭘로 덮거나 테이프로 가리는 게 좋겠어요. 나중에 떼어낼 수 있으니까 그건 손실은 아니잖아요.”
떠중이는 이제 확실히 돈을 덜 써야 하는 쪽으로 머리가 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너무 일이 많지 않아?”
주은정은 염려하면서 다음 말을 덧붙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해야 되는데?”
“여기 와서 확인해보면 되지. 여긴 전체를 다 보여주는 거 아냐?”
“그렇겠지.”
김혁은 일정 간격으로 화면이 바뀌는 모니터들에 잠시 눈길을 주다가 말했다.
“일단 CCTV 다 가려진 거 확인될 때까진 모습 드러내지 말고. 확인 끝나면 물건들은 1층 현관문 앞에 모아서 쌓아놓는 걸로 하고 음, 문만 열려도 경보시스템이 작동한다니 정말 문 열리면 곧바로 버스에 싣고 떠날 수 있게 해 놔야 해.”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민하진은 역시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누가 와봤잔데 뭘 그렇게 진짜 도둑들처럼 숨죽여가면서까지 이래야 될까요? 지옥에서 온 우리가 뭐가 무서워서요? 네?”
주은정이 마치 철없는 딸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세상을 혼돈스럽게 하고 어지럽히는 것도 죄라니까?”
“어차피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자체가 그건데 뭘. 참나.”
민하진은 계속 삐죽거렸지만 김혁의 손짓에 모두들 몸을 투명하게 한 채로 매장으로 날아갔다.
매장 안에는 세상의 모든 물건들이 있는 것만 같았다. 가지런히 정돈된 상품들은 어둠 속에서 내일의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때 아닌 밤손님의 방문을 받은 셈이었다.
김혁에겐 저승사자가 된 후 한 번도 취급할 일이 없었던 물품들이기도 해서 그 엄청난 양과 가짓수가 더 낯설기만 했다. 인간에게 이렇듯 많은 물건들이 필요했던가?
모두들 일상용품 매대에서 찾아낸 덕트 테이프를 한 개씩 잡고 몸을 투명하게 한 채로 최대한 벽에 붙어 이동했다.
그날 밤 마트의 CCTV에 찍힌 유일한 도둑 관련 영상은 어둠속에서 저절로 움직이는 덕트 테이프들뿐이었다. 그리고는 계속 암흑만 녹화돼 있었다. 가려진 화면 뒤에서 벌어진 일을 저승사자들만 아는 일이었다.
내부의 모든 CCTV가 가려지자마자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였다.
민하진이 재빨리 김혁 옆에 붙는 바람에 1층 생필품 매장을 함께 돌게 되었고 주은정과 떠중이가 지하 식품 매장으로 내려가게 됐다. 최대한 필요한 것 위주로 각각 버스의 반을 채울 분량만큼씩만 가지고 1층 현관 문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저승사자들에겐 불을 켜는 게 별 의미가 없어서 불도 켜지지 않은 널찍한 마트 안에서 때아닌 쇼가 펼쳐졌다.
민하진은 어느 때보다 신이 나서 때때로 끼야호 하는 환호성을 지르며 통로를 돌아다녔다. 마치 스케이트 선수라도 된 것 같은 포즈로 빈 카트 두 개에 각각 양쪽 발을 넣어 롤러스케이트처럼 타고 다니기도 했고 아크로바틱을 하듯 카트 위에 물구나무를 선 채 함께 미끄러져 나가기도 했다.
김혁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신기한 기분으로 그런 민하진을 입을 벌린 채 바라보기만 했다. 저 과도한 발랄함을 말려야 할지 그냥 둬야 할지 모를 기분이었다.
“하진아, 제발 좀!”
민하진은 기쁨에 찬 채 소리 질렀다.
“전 정말 아빠랑 마트 올 때마다 이게 정말 해보고 싶었어요. 꼬마 때는 아빠가 카트에 태워주기도 했지만 그건 너무 어릴 때라서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요?”
히죽거리는 민하진을 바라보며 김혁은 더 이상 말리진 않았다. 아빠랑 마트에 온다고? 하진의 부모님은 꽤 다정한 부부였던 모양인가 생각했다. 하진은 정말 그 시절로 돌아간 아이처럼 즐거워보였다.
좀 시끄럽다고 누가 달려올 것도 아니고 민하진도 그냥 노는 게 아니라 빈 카트를 옮기는 과정에서 하는 행동이라 딱히 뭐라 할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민하진이 물건들을 망설임 없이 카트에다 쌓아가는 동안 김혁은 허공만 휙휙 헛돌고 있을 뿐이었다.
쌓여 있는 물건들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뭐부터 챙겨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김혁이 인간으로 산 17년 동안에도 쇼핑이란 건 거의 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땐 너무 가난했었고 이런 대규모의 쇼핑몰도 없던 시골이었으니 당연했다.
인간이 고립된 채 극한 생존 상황에 떨어졌을 때 가장 필요한 게 뭐지? 음식 말고는 딱히 머리에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악마가 짜준 환상 속에서 가끔 이보다 더 화려하고 큰 백화점이나 마트를 다니긴 했지만 거의 여자들을 따라다니는 정도였지 본격적으로 뭘 사들이거나 한 기억은 없었다. 아무리 환상을 여러 번 겪었고 그 속에서 인간처럼 살아본다고는 하지만 이미 악마에 의해 모든 게 세팅된 상황에 떨어지는 경우라서 뭔가가 필요해서 쇼핑한 기억도 거의 드물었다.
일곱 번의 환상, 사랑을 하는 동안 사야 하는 물건들은 생필품들이기보단 거의 생존과는 뚝 떨어진 아름다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꽃, 보석, 와인, 향수 등 화려한 포장지에 T싸인 것들.
결국 저승사자로 산지 너무 오래됐기 때문에 인간의 습성보다 저승사자로서의 습성이 더 몸에 밴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40년이란 세월이 또 한번 실감이 났다.
김혁이 여전히 결정을 못하고 빙빙 도는 동안 민하진은 혼자 곡예와 놀이를 섞은 행동으로 카트 옮기기를 하면서도 문 앞엔 꽤 많은 상자와 물품들을 옮겨다 놓고 있었다. 이제는 카트를 타는 일에 싫증이 났는지 빈 카트를 힘껏 밀어놓고는 그보다 더 빨리 날아가서 상품들과 충돌 직전에 세우는 아슬아슬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봤을 때는 빈 카트를 따라잡는 일은 식은 죽 먹기라 재미가 덜 했는지 물건들이 쏟아질 듯 아슬아슬하게 쌓인 카트까지 휙 밀어버렸다.
결국 물건이 담긴 상자들이 바닥에 쏟아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혁의 어이없는 시선을 눈치채고 민하진이 멋쩍게 웃었다.
김혁은 그때야 자신이 할 일을 발견했다. 물건을 고르는 일은 민하진에게 맡기고 자신이 물건들이 가득 담긴 카트를 안전하게 옮기는 일을 하기로 말이다. 떠중이가 있었다면 분명 소리를 지르고도 남았을 일이었지만 김혁이 휙 날아가서 한 말은 이랬다.
“물건들 상해. 옮기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넌 카트만 채워.”
“네. 근데 진짜 선배님은 어떻게 한 개도 못 골랐어요?”
“그러니까, 난 봐도 뭐가 필요할지 잘 모르겠다.”
이번엔 김혁이 멋쩍게 미소지었다.
“공간이 한정돼 있으니까 너무 같은 걸 많이 담진 마.”
“알았어요.”
그렇게 일은 자연스럽게 분담됐다. 한 카트가 거의 천정까지 닿을 것처럼 똑같은 상자들이 쌓여 있는 걸 보고 김혁이 물었다.
“근데 이건 너무 많지 않아. 좀 빼야 될 것 같은데?”
김혁이 똑같은 상자들의 상표를 들여다보며 묻자 민하진이 재빨리 말했다.
“아! 이건, 여자들한텐 꼭 필요한 건데요. 그게...”
우물쭈물거리는 민하진, 김혁은 엉뚱한 이 아이가 또 무슨 생각으로 같은 걸 이리 많이 쌓아 놓은 것인지 정말 몰라서 다음 말을 기다리며 빤히 바라만 봤다. 상자에 씌어진 상표명은 처음 보는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머뭇거리던 민하진이 재발리 말해버렸다.
“그건 여성용품이에요.”
“여성용품?”
김혁이 너무 순진하게 물었기 때문에 오히려 민하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거긴 그러니까 여자들이 많잖아요. 그러니까...”
민하진은 정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대다가 간신히 대꾸하는 듯 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싶어하는 얼굴로 김혁의 눈치를 보며 자신없는 말투로 말했다.
“한달에 한번... 그거, 음, 마술에 걸리는 거를...”
“아... 음, 그거!”
이번엔 김혁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제야 뭔지 감이 온 것이다. 김혁은 황급히 카트를 밀어 민하진 옆을 떠났다.
환상 속에서 경험한 결혼 생활은 딱 한번, 맨 처음 서정과의 결혼생활뿐이었다. 그러나 그건 너무 먼 과거에 있었던 일이다. 뒤늦으나마 뭘 말하는지 알아챈 것도 그 덕분이다.
이런 건 여자가 아니라면 정말 인식도 못할 물품들이라고 생각하며 김혁은 카트에서 상자들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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