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9화 마트3
김혁이 다시 민하진이 물건들로 채워놓은 카트 쪽으로 다가갔을 때 하진이 말했다.
“음 이제 대충 된 것 같아요. 근데 버스 외관도 바꿔야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물감 스프레이로 하면 되겠죠? 몇 개나 필요할까요?”
“아 참, 버스 바닥에도 뭘 좀 깔아야 되지?”
김혁은 이제야 버스가 떠올랐다. 물건들을 내부에 쌓기 전에 먼저 바닥을 고르게 만들 필요가 있었던 거다. 의자들을 뜯어내느라 구멍 뚫리고 대충 밟아 뭉개 놓은 바닥에 그냥 물건들을 놓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면 쓸리다가 생채기가 날 수도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게 필요하네.”
“그러게요.”
일단 나머지 카트를 현관문 쪽으로 밀어 놓고 그들은 맨 처음 덕트 테이프를 찾아냈던 층에 올라가 돌아다녔다.
그곳 역시 인테리어 용품들이 가득 차 이게 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아내기도 힘들 정도로 다양한 물건들로 빽빽했다.
“와우, 정말 세상엔 좋은 게 많다니까. 거기 마을 집들 내부도 이런 것들로 꾸며주면 참 좋을 텐데요. 거긴 정말 외관은 예쁜데 안이 너무 삭막해요.”
김혁도 그곳 사람들이 아무리 좁은 공간에 살더라도 집안 내부를 꾸미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존이 먼저였다.
“지금 그것까지 해주는 건 오바야. 우린 거기 말고도 더 많은 사람들을 도와줘야 할 테니까.”
“네, 알아요.”
물감 스프레이를 찾아다니는 와중에도 색색의 물고기들이 떠다니는 어항, 멋진 화분들, 갖가지 모양을 낸 조화들과 각종 아기자기한 조각 장식들과 인테리어 소품들, 한 폭의 그림처럼 드리워진 커튼들과 블라인드들, 화려한 벽지들을 휙휙 둘러보곤 민하진은 아쉬운 눈길을 거뒀다.
그러더니 1시를 가리키고 있는 벽시계를 바라보곤 민하진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선배님, 혹시 모르니까 다른 층도 좀 돌아볼게요. 원래 여자들한텐 필요한 게 많다니까요?”
그리곤 자신이 들고 있던 물감 스프레이를 김혁에게 덥석 맡기고 대답도 듣지 않고 위층으로 훅 솟구쳐 올라가버렸다.
김혁이 바닥에 깔 장판 한 롤과 물감 스프레이들을 가지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식품이 가득 실린 긴 카트의 행렬을 이끌고 주은정과 떠중이도 1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지네처럼 길게 줄을 이어 올라오고 있는 카트들의 앞과 뒤를 맡은 둘은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주은정이야 원래 무표정하다지만 떠중이의 표정은 눈에 띄게 시무룩했기 때문이었다. 김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생각보다 물건이 많은 것 같은데? 이거 다 버스에 실을 수 있을까?”
막상 모두 모아놓고 보니 꽤 많은 물량이었다. 얼핏 봐도 버스를 꽉 채우고도 남을 양이었다.
“하진이는 어디 갔어요?”
주은정도 쌓여 있는 생필품들을 한번 둘러보면서 물었다.
“뭐 여자들한테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서 뭔가 가지러 갔어. 금방 올 거야.”
모두들 물건들을 버스 모양처럼 미리 쌓아봤다.
“좀 빼야 되겠어요. 이거 전부는 다 못 실어요.”
“맞아. 이렇게 보는 거하고 실어보면 또 다를 거야. 일단 재빨리 실을려면 최대한 비슷하게는 맞춰놓고...”
“난 더 이상 양보 못해.”
갑자기 떠중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김혁은 의아해서 바라봤다.
“늬들 왜 그러냐? 아래층에서 뭔 일 있었어?”
“아니 은정이가 제가 골라내는 족족 시비를 걸면서 못 담게 막잖아요.”
“다 정크푸드니까 그렇지.”
“오래 두고 먹어야 되는데 지금 정크푸드니 웰빙이니가 무슨 소용인데? 안 그래요 선배님? 얘는 지금 사람들이 무슨 피크닉이라도 가는 줄 아는지 신선한 거, 고급진 것만 찾는다니까요.”
“없으면 모르지만 벌써부터 통조림이니 과자니 군것질거리로만 먹고 살 순 없잖아.”
“오래 두고 먹는 건 그게 제일 낫다니까?”
티격태격하는 폼새가 마치 어린 신혼부부들 같았다.
“둘 다 맞는 말이긴 한데...”
김혁은 그들이 골라온 식료품 카트들을 돌아봤다. 쌀, 라면, 각종 통조림들, 각종 가루식품봉지들, 초콜릿과 과자들, 신선한 채소류와 과일들이 가득찬 카트들은 그 둘이 티격태격한 결과물이었다.
“뭐 일단 식품은 다 싣고 생필품 중에 꼭 필요하지 않은 걸 좀 빼자.”
열심히 골라낸 하진이에겐 미안했지만 지금은 식료품이 더 중요했다. 생필품 중에서도 급하지 않은 것과 꼭 필요한 걸 분류하거나 양을 좀 줄여서 한쪽으로 빼놓는 동안에도 민하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얘는 대체 뭘 하고 있는데 안 와?”
주은정이 약간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또 엉뚱한 짓 하고 있는 거 아닐까?”
떠중이도 이제 조금 기분이 나아졌는지 대화에 참여했다.
“가보자.”
모두들 위로 솟구쳐 올라 민하진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발견했을 때는 모두들 놀랐다. 민하진은 4층 의류 매장에 있었다. 화사한 색깔의 독특한 문양이 프린트된 진주빛 원피스를 입고 반짝거리는 밤색 구두를 신은 채 전신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행복한 표정을 지은 채 이리저리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이리 저리 살펴보는 민하진의 모습은 정말 딴사람 같았다. 발랄한 17세 소녀의 모습과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 동시에 느껴졌다. 김혁은 민하진을 보며 옷차림만으로도 사람이 저렇게 달라 보일 수 있는 건가를 생각했다. 늘 검은 옷에 질끈 묶은 포니테일만 보았다보니 그 모습이 완전히 새롭고 낯설기까지 했다.
“야! 민하진!”
주은정이 빽 소리쳤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민하진이 돌아봤다. 살짝 넋이 빠진 듯 바라보던 김혁의 눈에는 그 몸짓마저 느리게 재생되는 화면처럼 보였다. 길게 풀어헤쳐진 긴 머리칼이 출렁이며 느리게 공중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왔어? 나 어때?”
민하진은 방긋 웃으며 넓게 퍼지는 풍성한 플레어 스커트의 양 끝을 잡고 펼쳐든 채 사뿐히 절하는 시늉을 했다.
“야, 진짜 지금 한가하게 이럴 때냐?”
떠중이가 보통 목소리로 핀잔했다.
“이때 아니면 언제 이래보니? 너도 한번 입어볼래? 한조야, 선배님도. 아직 1시밖에 안 됐잖아요. 시간은 충분하다니까요?”
벽시계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대체 너는...”
주은정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하며 김혁을 바라봤다. 뭔가 한마디 해주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김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민하진이 재빨리 말했다.
“앞으로 변장해야 할 일도 있을지 모르는데 옷도 좀 있어야 되지 않아요? 내 생각은 그런데?”
민하진은 옷걸이에 걸린 옷들 중에 다른 원피스를 빼내 주은정의 몸에 대보기까지 한다.
“응? 어때? 은정아, 이거 한번만 입어보자. 넌 완전 이쁠 거야.”
“아 왜 이래? 너나 입든가.”
주은정은 붕 날아 제 몸을 옷에서 멀찍이 떨어뜨렸다. 민하진은 그 옷을 제 몸에 대고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세상엔 좋은 게 너무 많아. 가끔 이 검은 옷이 싫증 날 때면 고급 부띠끄나 백화점 명품샵 같은 데 둘러보면서 살짝 입어보고 그랬어. 근데 늘 섭섭했던 게 아무도 봐줄 사람이 없다는 거였거든. 늘 잠깐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만 보다가 다시 검은 옷으로 갈아입을 땐 더 쓸쓸해졌어. 근데 오늘은 봐줄 사람들도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좀 봐주세요. 네? 선배님.”
민하진의 애처로운 눈빛을 바라보자니 좀 안쓰럽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중단된 짧은 생에서 해보지 못한 많은 일들에 대한 아쉬움, 그런 것들은 결코 환상으로만 채울 수 없을는지도 몰랐다.
지구의 생생한 숨결을 느끼고 싶지만 올 수 없는 악마나 인간 세상을 인간처럼 돌아다닌다 해도 인간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소소한 행복들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저승사자들이나 모두 매한가지였다. 이곳에 속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밤마다 빈 도서관을 찾는 주은정, 매장 옷들을 훔쳐 입어보며 거울을 들여다보는 민하진, 개인방송 BJ의 스튜디오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떠중이. 모두 뭔가를 그리워하고 채우고 싶어한다는 게 짐작되니 더 애처롭게 느껴져서 김혁은 민하진을 핀잔할 수가 없다.
“아, 맞다. 저 좀 잠깐.”
떠중이가 급하게 혼잣말을 하더니 사라졌다.
“야, 넌 또 왜 그래?”
주은정은 아무 말도 안하는 김혁이나 두 애들의 철딱서니 같은 행동에 못마땅한 듯 했지만 김혁은 좀 어리둥절한데다 당황스러운 기분을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역시 애들은 애들인가? 자신은 물건을 싣고 떠날 생각에만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전혀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잠시 후, 떠중이가 나타났을 때 그의 손에는 전자 기기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넌 또 왜 그래? 돈 아껴야 된다매?”
주은정이 톡 쏘자 떠중이가 약간 미안해진 얼굴로 말했다.
“혹시 좀비 영상을 찍어야 될지도 모르고 우리 기념사진이라도 하나 찍을까 해서.”
“기념사진?”
민하진이 눈을 반짝였다.
“얘 말이 맞잖아요. 우리가 언제 이런 걸 해보겠어요? 어차피 도둑이 된 이상 오늘 해치워버리는 게 나은 것 같아요.”
왠지 일이 점점 더 커지는 모양새였다. 떠중이는 캠코더를 작동시켜 민하진을 찍기 시작했다. 민하진은 들뜬 채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찍는 걸 좋아하는 떠중이나 찍히는 걸 좋아하는 어중이나 물 만난 고기들처럼 능숙하고도 유연하게 행동했다.
“나 다른 옷도 입어볼래.”
민하진은 여러 매장의 행거들에서 다른 옷들을 챙겨 탈의실로 사라졌다.
“그거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주은정은 팔짱을 낀 채 바라만 보다가 캠코더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우리가 누군지 아무도 찾을 수 없을 텐데 뭐.”
그 말을 하는 떠중이의 얼굴이 조금 쓸쓸해보였다. 모두의 모습은 죄를 태우는 동안의 기간을 더해 그 시간만큼 성장한 모습으로 저승사자가 되기 때문에 죽을 당시의 모습과 약간 다르기도 했지만 떠중이가 가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본다고 하는 걸 보면 꼭 안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몽타주가 작성된다는 걸 알고 걱정하던 떠중이였기 때문에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게 김혁은 더 이상하게 여겨졌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떠중이는 내내 말이 없더니 그 짧은 침묵의 시간동안 벌써 모든 상황을 받아들인 것일까?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일지 씁쓸함일지 김혁으로선 떠중이의 속마음이 궁금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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