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마트5
김혁은 완강히 잠겨 있는 현관문을 가볍게 밀었을 뿐인데 잠김쇠 부분이 통째로 뜯어지며 문이 활짝 열렸다. 요란한 경보음으로 시작된 카운트다운. 그러나 아직은 달려오는 경비원이나 외부 차도 없어 그저 주변만 소란스러울 뿐이었다. 시계가 없어 체크할 순 없지만 금방 끝나리라 생각했으므로 별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건물 밖으로 나와 보니 분명 들어가기 전에 출입문에 최대한 가까이 세워두었던 버스가 보이질 않았다. 마트 앞 광장은 그야말로 원래처럼 텅 비어 있었다.
“어? 우리 버스가 어디 갔지?”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버스가 그곳에 없으니 순간 당황스러웠다. 물건들을 잔뜩 끌고 들고 뒤따라 나오던 애들의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김혁은 들고 있던 장판을 바닥에 던져두고 서둘러 하늘로 떠올라 주위를 둘러봤다. 버스는 꽤 넓은 주차장 끝까지 미끄러져 갔는지 한참 먼 벽에 닿아서 어둠속에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었다.
“아, 민하진 이 녀석...”
운전하는 연기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내리면서 사이드 브레이크를 잠그는 걸 잊은 게 분명했다. 그런 건 이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1분 1초를 다투며 진짜 치밀한 계획 하에 움직이는 도둑들에게라면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실수겠지만 저승사자들에겐 별 문제 될 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외엔 주변 무엇도 달라진 건 없었다. 먼 곳까지 살펴봤지만 이쪽으로 달려오는 차량들의 불빛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김혁은 재빨리 날아가 버스를 장난감 차처럼 훅 들고 와서 현관문 앞에 내려놓았다. 버스 문이 현관문과 가깝도록 방향을 돌려 잡아 세우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잠궜다.
“하여간 민하진 너는 진짜...”
떠중이도 대충 상황을 짐작하곤 장판을 들고 버스에 타면서 뒤따라오던 민하진을 핀잔했다. 민하진은 말이 없었고 김혁이 대신 말했다.
“서둘러!”
핀잔은 나중에 해도 될 일이었다. 지금은 누군가 도착하기 전에 물건을 싣는 게 우선이다.
일 할 때는 모두들 열심, 버스 바닥에 장판부터 촥 펴서 깔고 모두가 민첩하게 움직여댔다. 카트에 실린 식료품들은 카트 째로, 생필품 상자들은 텐트 주머니에 담겨져 쉴새없이 버스 앞으로 날라졌으며 떠중이가 버스 안쪽에서 물건들을 받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역시 텐트에 물건을 너무 많이 담아서 문으로 통과가 안 되는 일도 생겼다. 민하진은 되는 대로 빼내 떠중이 쪽으로 던졌다.
“받아랏!!”
“아야, 너 진짜?”
물건에 맞고 입으로는 핀잔을 하면서도 떠중이는 정말 열심히 물건들을 꼭꼭 쟁여 쌓아갔다. 은근히 꼼꼼한 스타일이었다. 버스 밖에서는 주은정이 버스 아래 짐칸에 물건들을 쌓고 있었다. 사실 그곳에 그런 공간이 있다는 걸 주은정이 열기 전에는 아무도 몰랐었다.
김혁은 40년 전 털털거리며 시골길을 달리던 시내버스 외에는 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버스를 구경할 일이 없었으므로 거기에 그런 게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가 주은정이 짐칸 문을 아무렇지 않게 열었을 때 속으로 깜짝 놀라기까지 했다. 어떻게 지난 40년 동안 저걸 몰랐을 수가 있지? 그래도 세상 곳곳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고 자부하는 40년 차 저승사자인데, 하지만 겉으론 그걸 내색하지 않았고 잠자코 있었다.
민하진은 곧바로 스스럼없이 그 사실을 몰랐다는 걸 고백했다.
“거기 그런 데가 있었네? 우와 신기하다. 역시 캠핑카 경력은 무시 못하겠구나.”
위에서 열심히 물건을 받아 쌓던 떠중이에게 민하진이 아래에 짐칸이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 떠중이 역시 그런 게 있었어? 하고 신기해했다.
그런 와중에 저승사자들의 물건 날라 쌓기 협력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안으로 쌓고 아래 짐칸을 채우는 일이 동시에 펼쳐졌다. 덕분에 물건들이 팍팍 줄어드는 게 금새 눈에 띄었다. 날고 던지고 밀어 넣고 쌓고 모두가 분주하게 빈틈없이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텅 비었던 버스는 꽉 찼다. 하지만 현관문 안쪽에 쌓아둔 물건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이제 그만.”
어느새 버스 문 가까이로 밀려나온 떠중이가 소리쳤다.
“벌써?”
“꽉 찼어. 이제 더 이상 안 들어가.”
물건들은 앞쪽에 남겨둔 의자 4개를 지지대 삼아 꽉 채워졌고 앞 의자 4개에도 커다란 상자들이 블록처럼 단단하게 쌓아올려졌다. 물건들이 앞으로 쏟아질 때 지지해줄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쌓은 것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안 들어가네?”
“버스를 두 대 가져올 걸 그랬나봐.”
텐트 3개에도 물건들을 찢어질 만큼 가득 채워 버스 지붕에 고정시켰지만 물건들은 여전히 바닥에 남아 있었다.
김혁이 버스 지붕에 텐트 3개를 단단히 고정시키고 나서 보니 사방 여러 갈래 길에서 마치 포위하듯 불빛을 번뜩이며 여러 대의 차들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지금 출발해야 저들 눈에 안 띌 수 있어.”
“하지만 저걸 다 놓구 가요? 아까운데.”
현관 바닥에 두 등분으로 나눠 먼저 싣기로 했던 쪽의 물건들조차 전부 다 싣지 못한 상태였다. 언제나 그렇듯 짐작처럼 되는 일은 별로 없다.
“어쩔 수 없잖아. 이런 상태로 거리에서 추격전을 벌일 순 없어. 우린 지금 사라져야 해.”
막상 버스 모양을 보니 더 그랬다. 텐트 무더기까지 주렁주렁 단 이상한 버스로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간 시선을 끌기도 쉬울 뿐더러 오늘 밤 내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일도 어려울 수 있었다.
“어디로 가죠?”
김혁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트는 한적한 곳에 있었고 주변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 만한 곳도 없었다. 거리로 나가느니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게 낫겠단 판단이 들어서였다. 그러자 민하진이 얼른 물건들을 더 가지러 갔다.
“꽉 찼다니까?”
떠중이가 민하진의 등 뒤로 소리치고 민하진은 말보다 먼저 물건을 던졌다.
“잔말 말고 받아. 운전 안 할 거면 운전석까지 다 채워도 되잖아. 꽉꽉.”
결국 버스는 운전대 위, 계단과 앞 유리창까지 물건들로 빼곡해졌다. 민하진은 그래서 못 실은 남겨진 물건들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곤 버스 문을 밖에서 잠궜다.
“물건 값은 얼마를 치를 거야?”
민하진이 돌아서며 묻자 떠중이는 그제서야 미리 제 주머니에 넣어둔 금덩이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아, 맞다. 금덩이.”
떠중이는 불룩하게 튀어나온 주머니를 툭툭 가볍게 치곤 마트 안으로 날아갔다.
애초에 운전하는 연기를 하게 해주면 본인이 버스를 들고 나르겠다고 말 해놓은 민하진이 버스를 들려고 하자 김혁이 서둘러 다가갔다.
“내가 할 테니까 뭐 떨어뜨린 거 없나 잘 보고 뒷정리 하고 따라 와.”
김혁이 버스를 양팔로 들고 하늘로 솟구쳐 오르기 전 얼핏 민하진의 감동에 찬 눈빛을 본 것 같았다.
마트로 들어서는 경찰차와 경비 차량들은 꽤 많았지만 아무도 도둑들이 버스로 물건을 실어갔으리라고 짐작하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엔 활짝 열린 문과 현관 앞에 그대로 놓여 있는 물건들을 보며 경보 시스템에 놀라 좀도둑들이 그냥 도망쳤나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떠중이와 민하진이 투명한 몸으로 잠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는 경찰이나 다른 사람들도 마트에 별다른 피해가 없다고 결론짓고 있는 듯 보였다.
“아무도 없는데요. 문도 망가졌고. 어떻게 들어왔을까요? 경보도 안 울렸는데.”
“미리 들어와서 숨어 있었나부지. 우리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겠지.”
“이건 뭐야? 뭐 이런 걸 훔칠려고 도둑질을 해? 값비싼 것들 다 놔두고. 화장지? 세제?”
“저기 감시 카메라 좀 보세요.”
“저 정도 정성에 이 정도 물건이라...”
어중이와 떠중이는 거기까지 듣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의 대화를 각자 한명씩 맡아 연기하듯 그들을 흉내내며 마치 그 사람들이 된 듯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야기가 끝나자 모두들 한바탕 까르르 웃었다. 너무도 빨리 온 경비들을 피해 달아난 좀도둑들이 된 게 마냥 기쁜 아이들처럼.
까마득히 높은 밤하늘, 구름 위를 달리는 물건들로 가득 찬 버스 한 대와 그 뒤를 따르는 검은 옷을 입은 무리는 그렇게 한참동안 날았다.
“길이 안 보여. 누가 길 좀 보고 알려줘.”
자유자재로 구름 아래로 날아가 길을 잡아 알려가며 계속 날아갔다.
“제가 들까요? 선배님?”
떠중이가 물었지만 김혁은 간단히 대꾸했다.
“이까짓 걸 뭐 오늘은 내가 하고 다음엔 니가 하고 그럼 되지.”
“네.”
어둠속을 한참 날아 가 인적 드문 세트장 마을 앞에 다다랐을 때도 여전히 어두웠다. 날 밝기 직전의 어둠이 가장 새카맣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동굴 앞 수풀에 버스를 내려놓고 이젠 실을 때의 반대 순서로 버스에서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꼭꼭 여민만큼 빼내는 게 약간 지체되긴 했지만 별 문제는 없었다.
모두들 부지런히 동굴 안까지 물건들을 잽싸게 날라댔다. 그것 역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은정이 빈 버스를 숲속 오두막 앞에 가져다두고 보물 상자를 숨겨놓고 오기로 하고 나머지는 세트장 마을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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