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봄바람같은
동굴 문이 열리고 마을에 들어가 보니 모든 집들에 불이 꺼져 있어 이전에 방문했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불빛 한 점 없는 괴괴한 고요에 잠겨 있는 세트장 마을은 조명마저 없으니 정말 마을 같은 느낌이 없었다. 마치 쓰임을 다해 버려지고 아무도 찾지 않는 촬영지처럼 쓸쓸한 느낌이 가득했다.
마을 전체가 너무나 고요하다 보니 모두가 잠들어 있는 새벽을 깨우는 노크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건수네 집 문을 몇 번 두드리자 잠귀가 밝은 노인들이 먼저 깼다.
“누구여?”
문이 열리기 전에 약간 신경질적인 남자 목소리부터 날아왔다. 그러나 누군지 확인도 하기 전에 이미 문은 열렸다. 검회색 오라를 가진 할아버지가 앞서 보이고 분홍색 오라를 가진 할머니는 뒤에서 마른 손으로 눈을 부비곤 저승사자들을 바라봤다.
“아니 이 신새벽에 어쩐 일이여, 그때 그 총각들 아녀?”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지금밖에는 시간이 없어서요. 정말 죄송하지만 급히 건수씨 좀 만나봐야 하는데 안에 있습니까? 서둘러 전할게 있는데요.”
“급하면야, 할 수 없지.”
남자 노인은 그닥 반갑지 않다는 얼굴이긴 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은 채 할머니를 돌아봤다.
“잠깐만 기다려봐요.”
할머니가 서둘러 다른 방으로 가고 남겨진 노인과 저승사자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문 사이로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남자 노인이 뒤늦게 한 마디 툭 던졌다.
“좀 들어올란가?”
“아닙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여자 노인이 사라진 안쪽 방에서 얼마 안가 잠에서 깬 부스스한 모습의 건수가 나왔다. 건수는 무심결에 나오다가 민하진을 발견하고는 거의 동시에 까치집을 튼 자신의 머리를 손빗질해대기 시작했다.
“아니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잠깐 나오지.”
건수는 아무 신발을 하나 꿰 신고 마당으로 나오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이 말을 하면서도 건수는 혹시나 얼글에 뭐가 묻지나 않았을지 염려되는지 얼굴을 이곳저곳 열심히 쓰다듬고 있었다.
김혁은 노인들에게 꾸벅 절하고는 자연스럽게 마당을 걸어 나가며 차분히 설명했다.
“동굴에 여기서 쓸 돈과 음식, 생필품들을 좀 갖다 놨어. 여기까지 들일 시간은 안 되고 더 옮겨줄 수가 없겠어서. 이 말을 하려고. 그 정도면 이 마을은 당분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 거야.”
점점 멀어지는 집 쪽에선 노인들이 여전히 문가에 서서 아들과 함께 있는 낯선 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수는 김혁이 하는 의외의 말에 좀 놀란 모양이었다. 짱돌을 찾으러 갔던 3인조가 돌아왔나만 확인하고 가겠다던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볼일도 끝난 마을에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뭔가를 가져왔다니 그럴 법했다.
“뭘 가져왔다는 거야?”
“시장마을도 좀비 천지고 여긴 어디서 특별히 뭘 구하기도 어려운 곳이잖아.”
“그야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낮에 왔으면 여기 모두 같이 옮기면 일이 더 쉬울 텐데 왔을 때라도 날 깨우지 그랬어?”
돌담길 사이를 걸으며 김혁이 대답했다.
“금방 끝났어. 우리 사정이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을 다 깨울 필욘 없잖아. 그래도 냉장이 필요한 것들도 있으니까 오래 방치하면 안 돼. 다음 일은 알아서 처리해주면 좋겠고 마을엔 별일 없나? 돌아온 사람은 없고?”
건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아무도 안 왔어. 연락도 안 된다고 다들 난리야. 아무래도...”
건수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침울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었다.
“전부 좀비가 된 모양이야. 연락도 않는 걸 보면. 그 가족들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 아직 말도 못 했어.”
해가 동쪽 산기슭에서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둘러야만 했다. 건수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면 곤란한 상황이라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안타까운 일이군. 하지만 이 마을의 안전을 위해서도 당분간은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도 더 들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야지. 바깥은 좀 어떻지? 뉴스에선 아직 아무 소식도 없던데. 한번 나가볼까도 했었지만...”
김혁은 3인조가 다녀갔던 병원의 광경을 떠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지마. 이미 세상은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어. 나간다고 별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이만 가야 해.”
오랜만의 소식을 접할 수 있어서 그랬는지 민하진의 존재 때문인지 간다는 말에 건수의 표정이 확연히 바뀌었다. 그건 정말 아쉬움이었다.
“왜? 아침이라도 먹고 가. 지금부터 준비하면 곧...”
“괜찮아. 마을에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나중에 우리가 들를 때 말해주고.”
“하여간 뭐가 그리 급한지 맨날 밥 한 끼도 안 먹고 그래? 섭섭하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어디서든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건수가 그 말 끝에 정말 아쉬운 눈길로 민하진을 바라보는 바람에 김혁은 동굴 문을 연다는 게 너무 세게 힘을 주어버렸다.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어제쳐졌다. 안 떨어진 게 다행이었다. 그 순간 모두가 깜짝 놀랐다. 김혁 자신을 포함한 저승사자들은 김혁의 과도한 몸짓에, 건수는 동굴을 가득 메운 엄청난 물건들 때문에 각자 눈들을 크게 떴다.
동굴 문 앞에는 한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통로를 남겨두고 빼곡히 물건들이 꽉 차듯 쌓여 있었다.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이라 길다란 동굴의 거의 대부분은 짐들로 채워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노인, 아이, 여자들만 남은 그곳의 수고를 최대한 덜어주긴 위한 배려였다.
건수는 일단 문 앞에 가득 쌓여 있는 물건들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미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불빛이 없는 동굴 속이라도 그 물건들의 규모를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니 웬걸 이리 많이, 정말 이걸 다 너희들끼리 옮긴 거란 말이야? 전부?”
떠중이와 민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수는 그저 가볍게 옮길 정도의 양을 상상했었던 모양인지 정말 놀라서 이리저리 눈길을 주느라 바빴다. 김혁은 약간 더 설명했다.
“채소와 과일도 있으니까 그것들 먼저 신경쓰고 돈은 당장 필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어떨지 몰라서 좀 넣었으니 나눠 쓰도록 해.”
“대체 너희들은 정체가 뭐야? 왜 이런 것까지...”
건수는 이쯤에서 의심쩍은 눈길로 변해 있었다.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이유 없는 친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겪어서 알 정도의 나이였다. 이건 너무 과도한 친절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길게 말 할 시간은 없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냐. 우린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으니 걱정 말고 생존에만 신경 써. 이제 우린 간다.”
건수 눈앞에서 몸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혁은 마음이 바빴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나가는 건지 민하진을 바라보던 눈길 때문인지는 본인도 좀 헷갈렸다.
“연락은 어떻게 하지? 번호라도 주고 가.”
건수는 급히 빠져나가는 김혁 일행을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김혁은 좀전의 퉁명스러움이 미안해져서 이번엔 좀 부드럽게 말했다.
“연락? 그건 좀 어려운데? 조만간 다시 들를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그때 얘기해.”
동굴 안에 김혁의 음성이 왕왕 울려댔다. 저승사자들 셋은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 짐들 뒤로 걸어감과 동시에 몸이 사라졌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동굴 안에 건수의 마지막 음성만 크게 왕왕거렸다.
“잠깐만 잠깐...”
좀 뒤미처 짐들 사이를 헤치고 나온 건수는 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동굴 안에도 어슴푸레 밝아오는 그 밖 들판 어디에도 이미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대체 이 사람들은 ... 이게 다 뭐야?”
몸을 투명하게 하고 허공에 뜬 채 그런 건수를 바라보던 떠중이가 말했다.
“지금은 돕는 자. 죽을 때 만나면 저승사자. 우린 그거라구.”
붉게 물든 산의 경계로 태양이 조금씩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좀 멋진 말 없어? 좀비퇴치단. 이거 어때? 우리도 이름 하나 정도는 있어야 되겠어. 사람들한테 누구라고 말할 때 곤란하니까.”
민하진이 발랄하게 소리치자 떠중이가 대답했다.
“검은 4인조라더니?”
“여기선 의로운 이름으로 해야지. 저기선 도둑이었지만.”
“촌스럽게 좀비퇴치단이 뭐냐?”
“그럼 니가 한번 근사하게 만들어 보던가.”
민하진이 약간 씩씩거리자 떠중이가 화제를 돌렸다.
“근데 내가 저번에도 느낀 건데 저 남자 확실히 너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누가? 저 사람이? 정말?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민하진이 곧 큰 눈을 깜빡이며 급격하게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거야 같은 남자로서의 내 느낌이...”
“가자.”
김혁이 그들의 말을 자르고 먼저 날아오르자 둘도 곧 따라 올랐다. 신선한 태양이 떠오르며 뿌려대는 반짝이는 햇살을 받으며 저승사자들 셋은 오두막으로 날아갔다.
이제 조금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한 봄바람을 맞으며 김혁은 생각했다. 이제껏 자신이 받은 건수에 대한 인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나 그때마다 느끼는 이 마음의 정체는 여전히 불분명했다.
무엇이 걱정되는 건지 왜 그때마다 신경이 쓰이고 불안감 같은 게 이는지 이 마음의 정체가 뭔지 날아가면서 내내 생각했다.
질투인가? 어떤 질투? 저승사자들끼리의 관계에 끼어든 인간의 감정을 경계함인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여동생을 걱정하는 마음? 애써 그런 쪽으로 마음을 정리해보려고 해도 김혁도 얼핏 느끼고 있었다. 그건 이성으로서 가지는 질투감임을. 그가 서정에게서나 환상 속에서 경험한 일곱 번의 사랑 속에서 느꼈던 감정과 별다르지 않음을 이미 깨닫고 있어서 더욱 감추고 싶어지는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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