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가족1
주은정은 스핑크스의 방 카메라 앞에서 방송 멘트를 읽는 듯한 그 얼굴로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하진아, 들어봐. 그러니까 한조는 건수가 널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너한테도 새로운 사랑을 할 때가 됐나 싶어서 물어본 건데 너가 그냥 화가 나서 날아가버린 거잖아. 그 사이 선배님이 악마가 그 남자들한테 그런 장난 칠 궁리도 한 적 있다고 하니까 혹시나 건수 꿈에 나타나서 장난을 친 건가 생각해봤다는 얘기지. 아무도 너가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는데?”
“으, 진짜 아무리 봐도 우리 엄마 같다니까?”
민하진은 이 말을 내뱉어 놓고는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누가 내가?”
주은정은 이 새로운 말에 흥미를 느껴서 되물었고 떠중이가 한마디 했다.
“오 민하진, 맨날 아빠 얘기만 하더니 첨으로 엄마 얘기했다? 하도 말을 안 하길래 난 또 엄마가 없나 했었는데.”
민하진은 뭔지 이런 대화를 하는 게 싫은지 얼굴에 잔뜩 싫은 내색을 하며 대꾸했다.
“... 뭐 암튼 그 얘긴 넘어가!!”
“...!”
언제나 엽기 발랄한 연기를 일상화하는 아이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표정을 굳히자 아주 달라 보였다. 완강한 고집이 느껴지는 뭔가가 느껴졌다. 떠중이는 선선히 말했다.
“그래. 뭐 하기 싫은 말을 누가 하래? 너가 꺼냈으니까 하는 말이지. 울 엄마는 잔소리 대마왕이었는데 아직도 그 잔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아. 그래도 보고싶다. 울 엄마.”
주은정이 떠중이에게 물었다.
“한번도 본 적 없어? 찾아가 본 적도 없고?”
떠중이는 애잔한 눈길을 한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고 싶어서 떠난 가족이 아닐 테니, 또한 아무리 자기를 죽게 만든 원인 제공자들이라도 가족은 가족이니 그럴 만 했다.
김혁은 생각했다. 그 먼 40년 전의 겨울 무렵, 서정을 한번만 보면 안 되냐고 악마에게 애원했던 적이 있었음을. 그때 악마가 말했다. 이렇게 저승사자로 살고 있는 걸 보면 좋겠냐고. 보고 나서 서정이 남은 생을 맘 편히 살 수 있겠냐고. 그때는 그게 못 견디게 싫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생과 사로 갈라진 다음에는 가족이 있어도 가족 곁을 맴돌아서는 안 된다는 걸 분명히 인식하는 게 중요했다. 우리는 볼 수 있어도 가족들이 보게 해서도, 알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보고나면 만나고 싶고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그런 마음은 누구나 같으리라.
김혁이나 주은정은 남은 가족이 없으니 자연스레 해결됐지만 장한조나 민하진은 여기에 아직 남아 있는 가족들이 있기에 그 마음을 다스리는 게 힘들 거였다. 볼 수 없어서 못 보는 것과 볼 수 있는데 안 보는 건 다른 거니까. 그걸 어떻게 견디는지도 궁금하긴 했다.
물론 지금까지는 악마가 교묘하게 짜준 리스트 덕분에 가족들이 없는 곳 위주로 돌았을 거지만 지금처럼 좀비를 따라 아무 곳이나 닥치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언제 가족을 만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난날 김혁이 병원에서 서정과 갑작스레 맞닥뜨린 것처럼 예기치 못한 순간에 그렇게 민하진이나 장한조에게도 느닷없이 그런 상황이 닥칠 수 있기에 김혁은 남몰래 그런 것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떠중이의 애처로운 모습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는지 주은정이 좀체 하지 않던 자기 가족 얘기를 꺼냈다.
“잔소리만 힘든 게 아냐. 침묵도 힘들지.”
역시 떠중이가 관심을 보였다.
“너야 뭐 잘못할 일이 없으니까 그랬겠지. 넌 잘못 같은 건 하지도 않는 애였을 것 같은데?.”
“어린애가 어떻게 잘못을 안 할 수 있어? 근데 내가 잘못해도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래서 난 스스로 내가 잘못했는지 안 했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만 했어. 친구들은 이렇게 하면 혼나는데 왜 아무 말이 없을까? 그러면서 행동도 더 조심스러워지고. 더 주변을 살피게 되고.”
“그냥 팽개쳐 놓은 건 아닐 거 아냐. 널 믿은 거지. 어쨌든 계속 지켜봐주고 있었다는 거지? 우리 집에 와서 그 속사포 같은 잔소리를 한번만 들어봐도 아 우리 엄만 천사였구나 그런 소리가 절로...”
갑자기 엄마 얘기를 피하던 민하진이 끼어들었다.
“그건 모르는 거지. 평소엔 관심도 없다가 뭐 하나 잘못하면 저렇게 설교하듯 또박또박 가르치는 엄마를 만나보면, 으휴...”
그 짓고 있는 표정만으로도 민하진에게 엄마에 대한 기억은 별로 좋지 않음이 짐작됐다.
“니네 엄마가 그랬어?”
저도 모르게 대화에 끼어들어 놓고 이런 질문을 받자 민하진은 또 다시 난감한 얼굴이 돼 있었다.
“...!”
“아아, 그래서 너 날 그렇게 미워했던 거야? 너네 엄마를 닮아서?”
주은정이 묻자 민하진은 당황스러워하며 대꾸했다.
“내가 널 언제 미워했다 그래?”
“너 나 싫어하잖아. 첨부터 그런 느낌을 팍팍 풍기고 그랬으면서? 선배님이나 한조한테 대할 때랑 많이 달랐어.”
민하진은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거야... 나보다 이뻐서 그런 거지.”
그렇게 둘러댔지만 주은정은 엷은 미소를 띄운 채 물끄러미 민하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진짜야. 내가 질투가 좀 많냐?”
민하진이 목소리를 높여 강조하고 있지만 그 말을 믿을 주은정이 아니다.
“신기하네. 나 같은 유전자에서 너 같은 딸이 나올 수 있단 말이지? 넌 그럼 아빠를 닮은 거야?”
“아니라니까. 우리 아빠가 늘 그랬어. 넌 엄마 아빠의 좋은 점만 골고루 닮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떠중이가 다시 신이 나서 말했다.
“짐작컨대 엄마 외모와 아빠 성격?”
“...!”
“맞지? 그럼 반대로 닮았으면 어떤 사람일 것 같은데? 엄마 성격과 아빠의 외모면?”
민하진은 잠시 생각해 보는 듯 하더니 침묵하긴 글렀다고 생각했는지 주은정을 가리키곤 말했다.
“얘 같은 차가운 성격에 얼굴은 넓데데한 못난, 아니 아니 평범한 여자애였겠지.”
“와 그럼 완전 다른 사람이었겠네? 너네 부모님은 미녀와 야수였던 거야?”
“아니거든? 울 아빤 그냥 잘생긴 얼굴이 아닌 거지. 야수 같진 않았어.”
서로 모여 가족 이야기는 거의 한 적이 없으니 새로이 말할 거리는 풍부했다. 다만 그동안 여러 가지로 서로 배려하느라 못하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을 뿐이었지만 분명 오늘은 특별한 아침인 것만은 분명했다. 떠중이가 먼저 털어놓았다.
“난 어느 쪽을 닮으나 똑같았을 걸. 울 엄마랑 아빤 어디 나가면 오누이냐고 맨날 그러거든. 그래서 다 비슷하게 생기고 성격도 비스무리한 시끄러운 애들만 셋이 있는 것 같았다니까. 확 싸우다가 또 금방 풀어지고 밥 때 되면 엄마는 식탁을 차리고 같이 모여 앉아서 밥 먹고 설거지는 아빠가 하거나 내가 하거나 또 사소한 거 가지고 또 막 싸우다가 풀고 싶으면 먹을 거라도 시켜 먹으면 되고... 그거 하난 진짜 좋았는데, 문제는 어른이 없었다는 거지. 돈을 관리하고 잘 저축해놓고 그런 걸 못하고. 생기는 대로 다 써버리고 그저 다른 사람들 부탁이란 부탁은 다 들어주고. 결국 가족들 모두가 굶게 되는 것도 모르고...”
이 부분에선 다시 침울해지는 떠중이.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 집은 애 둘에 어른 하나. 엄마 앞에서 늘 아빠랑 같이 혼나는 기분이었거든.”
민하진은 그때 생각이 나는지 여전히 퉁퉁한 얼굴로 말을 멈췄다. 대화가 끊길 위기였는데 의외로 주은정이 합세했다. 이건 정말 놀라운 변화였다.
“난 늬들이 부러운데? 우린 누가 보기에도 가장 번듯하고 그럴듯해 보였지만 정말 숨 막혔거든. 난 늘 우리 가족이 쇼윈도 가족 같다고 생각했어.”
“쇼윈도?”
주은정네의 불행한 결말을 알고 있기에 모두들 평소에 묻지 못했던 것들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걸 알아선지 모두들 궁금한 얼굴로 주은정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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