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가난한 사람들3
깔아준 멍석이니 떠중이가 신나서 자세를 잡고 말하기 시작했다.
“어, 이건 둘 다 톨스토이 작품인데 가난한 사람들에선 폭풍우치는 밤이었나?”
떠중이가 이 부분에선 자신이 없는지 주은정을 보자 주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아주머니가 혼자 집을 보고 있었지. 선원의 아내였는데 바다에 나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올지 어쩔지 생각이 많아. 이 걱정 저 걱정 끝이 없어. 게다가 폭풍이 심하게 치는데 평소에 몸이 좋지 않았던 옆집 여자도 걱정이 돼서 그 집에 가지. 그리고 옆집 과부가 죽어 있는 걸 본 거야. 그리고 거기서 뭔가를 훔쳐 와.”
주은정은 별달리 수정해 줄 말이 없는지 잠자코 있었고 민하진이 소리 높여 외쳤다.
“아, 훔쳐 온 게 아기였구나?”
민하진에게 이야기의 포인트를 말할 기회를 빼앗긴 떠중이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긴 했지만 핀잔은 하지 않았고 주은정을 향해 물었다.
“응. 두 아이. 맞지?”
“맞아.”
떠중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여자가 죽은 사람 집에서 뭔가 돈 될만한 걸 훔쳐 와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전개가 되거든. 가난한 사람들이니까 그럴 만도 하잖아. 근데 맨 마지막에 무사히 돌아온 남편이 아기를 데려오자고 할 때 딱 공개하거든. 내가 벌써 데려왔어요, 하고. 그게 정말 감동적이야.”
“아, 그래서 이 경우가?”
민하진이 아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김혁도 잠든 아기 얼굴을 들여다보며 떠중이의 말을 음미해본다. 주은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떠중이는 계속 말했다.
“그래. 비슷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도 그런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거 안 읽어봤어? 이건 좀 유명한 얘긴데.”
민하진이 고개를 가로로 크게 내저으며 말했다.
“음, 아니. 난 원래 로맨스 소설밖엔 안 읽으니까. 더구나 그렇게 어려운 제목이라면 절대 안 읽었을 거야.”
“야, 너무 자랑스럽게 말하는 거 아니니?”
주은정의 말에 민하진이 뾰족하게 따질 법도 한데 갑자기 히죽 웃어버리고 말아서 두 사람은 또 한번 놀랐다. 쟤가 갑자기 번개라도 맞았나 싶은 얼굴로. 떠중이가 기어코 한마디 물었다.
“야, 민하진 너 갑자기 좀 이상해진 것 같다?”
“뭐가? 하던 얘기나 빨랑 해봐. 그래서 그건 무슨 내용인데? 응? 너한테 들으니까 되게 재밌다.”
때아닌 칭찬에 다시 떠중이가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음, 그건, 이 소설 속에도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 나와. 외투가 없는 부부야. 아주 가난한 구두수선공이 외상값을 받아서 외투를 하나 살 생각에 나갔는데 외상값은 못 받고 그 길에서 쓰러져 있는 벌거벗은 남자를 발견해.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고 결국 그 사람한테 자기가 입고 있는 얇은 옷마저 벗어줘.”
갑자기 민하진이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오, 오 나 그거 아는 얘기 같애.”
“말 좀 끊지 말을래? 얘기 그만할까?”
떠중이가 단호한 눈짓으로 말하자 민하진이 다시 얌전해졌다.
“아냐, 말해. 말해.”
“그것도 아내의 겉옷이었는데 그걸 준거야. 낯선 남자한테 선뜻 입혀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음 아마 그럴 걸. 근데 어떻게 외투도 없을 수가 있어?”
“아 옛날이니까 그렇지.”
“그래?”
민하진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지 큰 눈을 껌뻑거렸다.
“그 남자를 집에 데려가자 그의 아내는 웬 벌거숭이를 데려왔나 싶어서 화를 내. 더구나 자기들 먹을 빵도 모자란 형편인데 그것까지 내줘야 하니까 계속 투덜거려. 하지만 결국 그 아내도 착한 사람이라서 벌거숭이에게 동정심을 느껴. 그 남자는 갈 곳도 모르고 자기가 누군지도 몰라서 결국 그 집에서 살면서 구두장이로 일을 하는데 그 남자가 솜씨가 꽤나 좋아서 그 집 형편은 점점 좋아지게 돼.”
민하진이 뭔가 말하고는 싶은데 참느라 입을 막고 있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결말은, 이거 스포일런데 말해도 될까?”
“아 뜸들이지 말고 말해! 말해! 어서.”
민하진이 재빨리 소리쳤다. 이번엔 그 부분이 짐작이 안 가는 모양인지 대답만 재촉하자 드디어 중요한 부분을 떠중이가 말할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사실 천사였어.”
김혁은 그 소설은 읽은 적이 있었기에 내용을 잘 따라가다가 그 부분에서 그 벌거숭이 남자가 천사였던가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갸우뚱거리고 있었는데 민하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응? 내가 이 얘기를 어떻게 아는 거지? 읽은 적 없는 것 같은데 되게 신기하네. 아는 얘기야. 천사. 그래 천사. 마지막에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거지? 맞지? 읽은 것 같진 않은데 어떻게 알지?”
민하진의 호들갑에 주은정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걸 아는 게 그렇게 신기할 정도라고?”
“그럼 신기하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렇게 심오한 제목의 이야기를 내가 읽었단 거잖아. 근데...? 근데 사람은 뭘로 산다는 거야? 일을 열심히 하면 돈을 번다? 선심을 쓰면 복이 오던지 복덩이가 들어온다?”
“푸힛!”
떠중이가 참지 못하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민하진은 절대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천진하고 순진하게 정말 자기가 아는 선에서 말한 거였다.
“그러니까 제대로 좀 읽어야지. 사랑으로 산다는 거지. 사랑.”
“응? 아, 그런 거였어?”
“하늘에서 내쫓긴 천사가 깨달음을 얻은 걸 말해주는 게 그 소설의 주제잖아. 그건 소설로 읽어야지 다 말 못해.”
김혁은 아마도 그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 뒤의 내용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그런 게 분명했다. 비록 짧은 독서 생활이라야 만화밖엔 없어도 읽은 것만큼은 확실히 기억하는 기억력은 좋았었으니 기억나지 않는 건 안 읽은 것이다.
그러나 떠중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저 남자 아기를 데려온 부부가 그 얘기 속 주인공들과 다를 바 없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저 부부에게도 뭔가 행운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욕실 쪽창에 연기를 내뿜으며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남자에게 쌀을 씻어 불에 올리고 가방의 식품들을 정리하던 아내가 물었다.
“근데 여보, 돈 모자라지 않았어요? 생각보다 많네.”
“안 모자랐어. 최사장이...!”
남자는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있는 아이들이 있어서 그런지 좀처럼 슈퍼 주인이 좀비가 됐다는 말을 못 꺼내고 있었다. 여자가 지레 짐작을 하고 말했다.
“최사장이 외상을 줬어? 그 양반이 웬일이래. 평소에도 외상은 절대 안 된다고 하더니.”
“이따가 다 얘기해줄게.”
남자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도둑질이란 범죄를 저질러본 사람 같았다. 좀비에게서조차 뭔가를 훔쳐선 안 됐었다고 홀로 괴로워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돈을 꺼내 보이던 헬멧남과 우비 입은 여자와 달리 저 남자는 돈을 꺼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거였나? 식량도 돈도 거의 없이 겨우 배낭 한 개만큼의 식량을 짊어진 남자가 남의 아이를 덜컥 데려올 생각을 한 건 아무리 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루 굶은 사람이 이틀 굶은 사람을 걱정하기란 쉽지 않다. 내 배고픔이 먼저요. 내 가족 입이 더 우선인 사회에서 어쩌면 무모하달까? 어리석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마음이 굶어죽을지도 모를 아이를 구한 건 사실이었다.
“이 집엔 우리가 천사 역할을 해주자.”
김혁이 말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저승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연민.”
민하진이 혼자 묻고 혼자 대답했다. 떠중이가 대꾸했다.
“야 진짜 잘도 갖다 붙인다. 너는.”
“배운 건 바로 바로 써먹는 거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 저승사자는 연민. 그리하여 세상은 아름답도다.”
민하진이 양팔을 하늘로 솟구치며 연극톤으로 그 말을 했기 때문에 모두들 한바탕 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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