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윤이의 무림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완결

김영남
작품등록일 :
2018.05.20 22:25
최근연재일 :
2019.01.11 21:06
연재수 :
144 회
조회수 :
360,736
추천수 :
3,662
글자수 :
842,547

작성
18.07.20 21:03
조회
3,140
추천
38
글자
13쪽

여긴 너무 답답해요 -33

DUMMY

칠 년 전, 적이 침입한 것이다. 적들은 합비는 물론 인근의 성까지 무자비하게 휩쓸어 버렸다. 그 잔혹하고 번뜩이는 칼날 앞에 남궁세가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휘청댔다.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지독한 돌림병이 창궐한 것이다.


무공으로도 막을 수 없었기에 많은 사람이 허망하게 죽어갔다. 그 안에 차기 가주로 인정받은 남궁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가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남궁문이 사랑했던 아내, 상관소소마저 돌림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아내가 병마에 쓰러지자 남궁문은 필사적으로 약을 찾아다녔다. 그 와중에 상관소소는 홀로 생을 마감했으니.


“그때 막내 아씨의 나이가 겨우 세 살이었지.”


“주상이는 괜찮았어요?”


“당시 도련님과 막내 아씨는 친척 집에 피신해 있어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두윤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마음이 서글퍼졌다. 화 할아버지는 화단에서 돌을 골라내며 말을 이었다.


“모든 비극이 거기서부터 시작됐지.”


남궁세가 최고의 인재를 돌림병으로 잃은 남궁무의 슬픔은 대단했다. 적과 싸우다 죽었더라면, 복수라도 할 텐데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연스레 모든 분노와 원망은 둘째 아들인 남궁문에게 향하고 말았으니.


정인(情人)의 유해가 화장장의 불길 속으로 사라지던 날, 세가 사람들은 이렇게 속삭였다.


‘차라리, 둘째가 변을 당했더라면...’



두윤이는 골라놓은 돌들을 꼼지락거리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누굴 미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들 너무 불쌍하잖아요.”


“누가 잘못해서 그리된 것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미워할 사람도 벌 받을 사람도 없는 거야. 세상일이 대부분 그래.”


화 할아버지가 퇴비 자루를 들고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도련님은 어릴 적 가주님을 똑 닮았지. 밝고 착하고, 상냥하고. 가주님을 너무 원망하진 말거라.”


두윤이는 한참이나 화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며칠이 지났다.


두윤이는 그동안 화 할아버지 일을 도왔다. 온종일 바쁘게 움직이느라 심심할 겨를이 없다. 덕분에 심란했던 마음이 점차 안정되었고, 어떻게 하면 주상이를 도울 수 있을까 마음 놓고 고민할 수 있었다.


“쉬엄쉬엄해라. 아직 겨울이 오려면 멀었다.”


화 할아버지가 빨갛게 익은 사과 하나를 건네주신다. 두윤이는 사과를 받아들고는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벌써 찬 바람이 부는걸요? 곧 서리가 내리면 금방 겨울이 찾아올 거예요.”


“허허, 이곳은 태산과 다르단다. 한참 남쪽이라서 겨울이 늦게 오지.”


“그런가요? 재밌네요. 그런데 전 겨울이 좋아요.”


“겨울이 좋다고? 난 싫다. 삭신이 쑤시거든.”


화 할아버지는 등을 두드리며 허리를 폈다.


“태산에서는요. 눈이 아주 많이 와요. 이렇게 허리 높이까지 쌓여요.”


“그렇구나. 여기는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리지 않는단다.”


흙 속 돌을 고르는 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두윤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신기해요. 눈이 녹고 봄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싹이 돋고 꽃이 피잖아요. 추운 겨우내 다들 어디에 숨어있었을까요?”


“글쎄다.”


“더 신기한 일도 있어요. 집 앞에 작은 동산이 있는데요. 매년 같은 꽃이 피어요. 이름은 잘 모르지만요, 정말 하얗고 예쁜 꽃이에요. 그런데 장평 아저씨는 그 꽃을 보고 아무 생각도 안 든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화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단다. 단지 내색하지 않을 뿐이지.”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별말 아니다. 일이나 마저 하자꾸나.”


저녁 무렵까지 화단 작업은 계속되었다. 서리가 내리면 땅이 굳어 일하기가 배로 힘들단다. 열심히 흙을 고르고 있는데 방해꾼이 찾아온다. 여총관이었다.


“가주님께서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두윤이는 전날의 끔찍했던 점심 식사를 기억해내고 인상을 찡그렸다.


“저 안 가면 안 돼요? 오늘은 그냥 객원에서 먹고 싶어요.”


“험험, 세가의 어른이 모두 참석하는 자리입니다. 자리를 비우시면 가주님 처지가 난처해질 겁니다.”


여총관의 말에 두윤이는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왜 다들 저랑 같이 밥을 먹으려고 하죠? 전 거기서 밥 먹기 싫단 말이에요.”


“음, 그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인지라...”


여총관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두윤이를 설득했는데.



저녁 식사에 참석한 두윤이는 가주 남궁문 옆에 앉아 안절부절못했다. 한껏 격식을 차린 대화가 오가자, 음식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멀리서 온 세가의 친척과 지인들까지 참석한 자리기에, 식사라기보다는 잔치에 가까웠다.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은 할아버지가 웃음을 터트린다.


“허허허! 창궁검 대협께서 폐관에 드셨다니. 이는 무공이 한 단계 진일보함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고말고요. 천하십대검객의 명성이 앞으로 더욱 밝게 빛날 것입니다.”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해요. 이 모두가 남궁세가의 홍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하! 맞습니다.”


사람들은 상석에 앉은 두윤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남궁세가에서, 아니 정확하게는 창궁검 남궁무가 두윤이의 존재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다.

사실 천무라는 간판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주상이의 친구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게다. 나이가 손자뻘이라는 것도 문제가 되었고 말이다.


덕분에 천무의 진정한 정체는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한데, 저 아이는 누굽니까?”


사람들의 질문에 남궁문이 이쪽을 돌아본다. 두윤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


“전 주상이 친구예요.”


“허허허! 그러고 보니 주상이가 안 보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남궁문에게로 향한다. 두윤이는 어색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음, 지금 폐관 수련 중입니다.”


“그렇군요. 하긴 그래야 합니다. 무림대회에서는 너무 심했어요. 예선 탈락이 말이 됩니까?”


“그도 그렇지만, 장차 소가주가 되실 첫째 도련님은 운이 나빴습니다. 본선에 올라가자마자 너무 강한 상대를 만났어요.”


“상대가 마왕의 첫째 아들 구문혁 아니었습니까? 어쨌든 그것도 망신이에요. 잘 싸웠지만, 실력 차이가 확연했잖습니까?”


두윤이는 슬쩍 남궁문 쪽을 살폈다. 그의 얼굴이 잔뜩 굳어있다. 보다 못한 여총관이 분위기를 환기하려 나선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한정(茶寒停)에 용정차를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허허, 명차 중의 명차라는 서호 용정차 말입니까? 이거 기대가 되는군요.”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윤이는 그제야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다 식어버린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환한 달빛이 내리쬐는 연못가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 있다. 가주인 남궁문이다.


두윤이는 그냥 갈까 하다가 슬쩍 발길을 돌렸다. 그의 어깨가 처연하리만큼 작아 보인다.


“아저씨! 아저씨라고 불러도 된다고 하셨죠?”


남궁문의 얼굴에 얼핏 미소가 스친다.


“그렇습니다.”


“제발 절 편하게 대해주세요. 불편해 죽겠다고요.”


“······.”


말이 없다. 두윤이는 조심스레 옆자리에 섰다.


“이야기 들었어요. 주상이가 무림대회에서...”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이다. 또한, 폐관 수련 때문에 날 찾은 것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와! 제 부탁을 들어주셨군요. 얼마나 편해요. 아저씨도 그렇죠?”


남궁문의 얼굴에 조금 더 짙은 미소가 지나친다. 두윤이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연못을 응시했다. 환한 달빛을 따라 보름달이 연못 위에 떠 올라 있다.


“이곳에 며칠 있었던 소감을 말해도 될까요?”


남궁문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오른다. 무림을 쩌렁하게 울리는 천무가 과연 남궁세가를 어찌 판단할지 궁금했는데.


“여긴 맛있는 음식이 많아요. 늘어서 있는 전각도 멋지고요. 그렇지만, 전 답답하게만 느껴졌어요. 산해진미를 먹어도 이곳에서는 맛있지가 않아요. 이곳에 있으면서 조금 불행해졌달 까요?”


“······.”


“전 어릴 적부터 태산에서 자랐어요. 아버지는 얼굴도 모르고요. 엄마는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께서는 엄마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을 구하러 나가셨는데, 아직까지 돌아오시지 않으세요.”


남궁문의 시선이 달빛으로 반짝이는 연못에 머물러 있다.


“그래도 전 태산이 좋아요. 그곳에서는 아무도 무공 이야기를 하지 않거든요. 정해진 식사시간도 없어요. 일을 안 해도 되지만, 그러면 조금 불편해지죠. 아저씨, 제가 제일 잘하는 일이 뭔 줄 아세요?”


남궁문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약초 캐는 일이에요. 저번에는 산삼도 캤어요. 그때 제가 얼마나 기뻤을지 아저씨는 상상조차 못 하실 거예요.”


두윤이는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빛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전각 곳곳에서 타오르는 환한 횃불 때문이다.


“전 모두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때로는 행복을 위해 싫은 일도 해야 한다.”


두윤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아요. 저도 어릴 때 그랬어요. 칠복이 아저씨는 매일 장작을 패오라고 하셨죠. 전 장작 패는 일이 진짜 싫었어요. 그래도 꾹 참아야 했죠. 칠복이 아저씨는 장작을 패오지 않으면 정말 무섭게 화를 내셨거든요.”


“그때가 언제더냐?”


“제가 일곱 살 때였어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칠복이 아저씨와 함께 살았거든요. 전 그 반년의 세월이 너무나 싫었어요. 하루는 도저히 못 버티겠더라고요. 그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버렸죠.”


남궁문이 낮게 한숨을 내쉰다. 두윤이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집은 좋았어요. 조금 외롭고 슬플 때도 있는데요. 좋아하는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기꺼이 참을 수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다시 태산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저씨 말씀대로 이곳에서는 때로 싫은 일을 해야 하니까요.”


“······.”


“언제까지 싫은 걸 억지로 해야 하나요?”


남궁문은 힘없이 연못가 바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네 이야기를 좀 더 들려다오.”


“오래 걸릴 텐데요?”


“어차피 할 일도 없구나.”



다음 날 아침, 남궁문은 오랜만에 외원을 찾았다. 예전에는 하루가 멀다고 찾던 곳이다. 버드나무가 멋들어지게 늘어진 정원, 잘 꾸며진 화단이 텅 비어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는다. 봄이 찾아오면 화단은 다시금 꽃으로 만발할 테니까.


“여전하십니다.”


화 할아버지가 힘겹게 허리를 펴신다.


“가주님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이십 년 만에 다시 이 화단을 보는군요.”


“허허허, 이십 년도 훌쩍 넘었지요.”


남궁문은 화단 가까이 다가가 흙을 매만졌다. 참 곱다.


“제가 그렇게 늦었습니까?”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영특하고 머리가 좋은 아이였지요.”


화 할아버지는 자잘한 돌을 솎아 옆에 있는 포대에 담아냈다.


“그 소년은 유독 꽃을 좋아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화단에 피어있는 꽃 이름을 물었고, 직접 물을 주느라 옷이 다 젖어버릴 때도 있었지요.”


남궁문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답했다.


“그 아이는 더 이상 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가의 일원으로 무공을 배워야 했으니까요.”


화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년은 꽃을 싫어한 게 아닙니다. 꽃을 싫어하게끔 강요받았을 뿐이지요.”


“······.”


화 할아버지는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남궁문을 바라봤다. 예전 모습 그대로다.


“가주님께서 다시 꽃을 보러 온 건 아닌 듯하고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남궁문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화단 옆에 앉았다.


“아들 녀석을 어찌해야 할지, 무엇이 진정 녀석을 위한 길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마음을 숨기고 관객 앞에서 연극을 하는 것은 가주님 한 분이면 족합니다.”


남궁문은 지그시 미간을 좁혔다.


“제가 그리하라 해도,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어도 관객들은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허면, 가주님께서도 그만 내려오시지요. 연극은 이미 끝났잖습니까?”


화 할아버지는 포대를 맨 채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남궁문은 텅 비어있는 화단을 한참 동안 응시하고만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두윤이의 무림일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습작을 읽기 전에 (연재 시간) +1 18.05.20 3,749 0 -
144 완전 행복해요! -144(완결) +5 19.01.11 1,801 24 22쪽
143 이별이란 슬퍼요 -143 19.01.10 1,402 16 12쪽
142 이별이란 슬퍼요 -142 19.01.09 1,369 16 16쪽
141 행복해요 -141 19.01.08 1,379 17 13쪽
140 행복해요 -140 19.01.07 1,330 12 11쪽
139 행복해요 -139 19.01.06 1,375 14 12쪽
138 완전 신나! -138 19.01.05 1,345 13 11쪽
137 완전 신나! -137 19.01.04 1,339 14 12쪽
136 귀동이가 부러워요 -136 19.01.02 1,354 12 10쪽
135 귀동이가 부러워요 -135 18.12.31 1,347 14 14쪽
134 귀동이가 부러워요 -134 18.12.30 1,350 14 14쪽
133 짜증나! -133 18.12.28 1,353 17 11쪽
132 짜증나! -132 18.12.26 1,341 16 13쪽
131 짜증나! -131 18.12.24 1,415 14 12쪽
130 빨리 사과하세요! -130 18.12.22 1,443 12 12쪽
129 빨리 사과하세요! -129 18.12.21 1,425 14 12쪽
128 빨리 사과하세요! -128 18.12.19 1,422 14 11쪽
127 생일잔치가 기대돼요 -127 18.12.17 1,437 14 10쪽
126 생일잔치가 기대돼요 -126 18.12.15 1,485 13 12쪽
125 선물을 사러가요 -125 18.12.14 1,378 15 12쪽
124 선물을 사러가요 -124 18.12.12 1,433 12 11쪽
123 선물을 사러가요 -123 18.12.10 1,487 12 15쪽
122 목격자는 싫어요 -122 18.12.08 1,526 13 13쪽
121 목격자는 싫어요 -121 18.12.07 1,491 14 12쪽
120 목격자는 싫어요 -120 18.12.05 1,496 16 12쪽
119 목격자는 싫어요 -119 18.12.03 1,486 16 11쪽
118 목격자는 싫어요 -118 18.12.01 1,581 13 11쪽
117 즐거운 무림대회 -117 18.11.30 1,573 18 10쪽
116 즐거운 무림대회 -116 18.11.28 1,659 14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