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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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토라도라
작품등록일 :
2018.05.29 17:28
최근연재일 :
2018.08.1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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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1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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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톡신 vs 이프리트

DUMMY

"이프리트 니임!"


허겁지겁 달려온 샐러맨더에게 들고 있던 정령을 건네며 불의 왕이 혀를 끌끌 찼다.


"수가 몇인데 화산에서 한 명을 못 막아?"


"면목...없습니다.."


"방금 그놈은 누구지? 감히 내 앞마당에서.."


"톡시카...독이 미쳤습니다, 이프리트님."


죽다 살아난 하급정령 하나가 덜덜 떨며 소리쳤다.


"다짜고짜 쳐들어와선 이프리트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더니 안 계신다니까 문답무용으로 날뛰기 시작해선...다쳐도 회복할 수가 없으니 지역의 이점이 없습니다!"


"톡시카? 톡신? 독이 여기 왔다고? 방금 그게 독이야?"


신호탄이라도 되는 듯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땅이 쩍쩍 갈라지며 용암과 불꽃이 금 사이로 솟구쳤다.


사방이 화산이다 보니 분화가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 피어나는 붉은 꽃은 드문드문 청옥빛이 섞여 있었다.


"쩌적-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쩍!"


"우와아아앗!!"


"꺄아아아아악!!!!"


겁에 질린 정령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점점 커지던 금에서 얼마 안 가 거대한 뭔가가 구멍을 뚫고 튀어나왔다.


온몸에 청록색과 진보라색이 은근 어울리게 섞인 갑주를 두른 괴물이 개가 물을 털듯 몸을 흔들며 여기저기 묻은 용암을 털어냈다.


이프리트의 두 배는 되는 크기에 액체로 만들어진 것처럼 표면이 번들거리는 여섯 개의 휘어진 손가락과 발가락, 등에는 거미처럼 생긴 네 개의 긴 다리가 뻗어 나와 움찔거렸고, 갑옷에 여기저기 달린 이빨투성이 입이 배고프다는 듯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끝에 손가락 네 개 달린 손이 붙은 꼬리가 이리저리 정신 사납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손가락 끝과 손바닥에도 이빨이 빽빽한 입이 하나씩 붙어있었다.


머리 대신 목 위로 둥둥 떠 있던 세 개의 작은 독 덩어리가 꿈틀대며 눈과 입의 형상으로 변했는데, 할로윈 호박 같은 입에서 소름이 절로 돋는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프리트으...."


완전히 눈이 뒤집힌 독이 불의 왕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자길 속인 거짓말쟁이를 밟아 꺼뜨리기 위해.


"드디어 찾았다."


◉◉◉◉◉◉◉◉◉◉◉◉◉◉◉◉◉◉◉◉◉◉◉◉◉◉◉◉◉◉◉◉◉◉◉◉◉◉◉◉◉◉


"타이달페르노(Tidalferno : 해일염[海溢炎]"


"포이저너스 스웜(Poisonous Swarm : 맹독의 군세)


불꽃으로 이루어진 해일이 산보다도 높게 솟아오르며 하늘을 붉게 물들였지만, 보랏빛 독으로 만들어진 수십, 수백억 마리의 꿈틀거리는 생물이 벽이 되어 덮쳐오는 열기의 파도를 가로막았다.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 싸우는 독과 불이 파편을 튀길 때마다 무언가 재로 변하거나 녹아내렸다.


"끝내준다~캬하하하!"


천재지변 사이에서도 따로 분류해야 마땅할 대재앙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판에 뭐가 그리 웃긴지, 구경하던 아쿠네이라는 박수까지 쳐가며 정령계가 떠나가라 웃고 있었다.


옆에서 인어처럼 생겼지만 머리카락과 하반신의 지느러미가 전부 찰랑대는 물로 만들어진 정령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물었다.


"아쿠네이라 님? 그만 물러나시는 게..이러다 휘말리면.."


"에이~걱정 그만하고 즐겨, 머메아. 독과 불이 맞붙는 건 처음 아니냐. 이런 걸 놓치긴 아깝지."


"그래도..저 정도 힘이 이쪽으로 날아오기라도 하면 저로썬 아쿠네이라 님을 지켜낼 자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아쿠네이라가 콧방귀를 뀌자 코에서 바람 대신 물이 뿜어져 나왔다.


"누가 누굴 지켜? 바다로 강이 흐르는 거야, 그 반대가 아니라. 뭐가 오면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걱정 말고 관람이나 해, 기껏 데려왔더니 안절부절 못하긴....나중에 딴 애들한테 자랑하면 부러워 죽으려고 할 걸?"


"부러워하기보단 동정할 거 같습니다만.."


웅얼대는 불쌍한 비서를 무시한 채 목까지 뻗으며 지켜보던 아쿠네이라가 대단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나저나 톡시카, 저 녀석도 참 대단해. 이프리트 홈그라운드까지 쳐들어간 것도 모자라서 싸움을 걸어? 용케 안 밀리고 버티네...혼 좀 나봐라 이프리트, 이 여우같은 녀석.."


"아쿠네이라 님! 피하십시오!"


독과 불로 뒤덮인 바위들이 충격파로 인해 사방으로 운석처럼 날아가고 있었고, 그 중 특히 큰 하나가 그들이 앉아 있던 장소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 흘긋 쳐다본 정령왕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 주변에서 반짝이는 수백 발의 물방울이 바위를 향해 총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와르르르...."


쏟아지는 수탄(水彈)에 꿰뚫린 바위가 조약돌이 되어 떨어졌지만, 싸움에 정신이 팔린 물의 여왕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것들은 왜 안 오는거야? 기껏 불러놨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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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죽어! 죽어버려 이 불쏘시개 새끼야!"


"톡신! 톡시카! 내가 잘못했어! 내 잘못 맞으니까 최소한 얘기라도 들어 줘! 제발!"


"닥쳐! 그 빌어먹을 주둥아리, 열리는 꼴만 봐도 속이 뒤집히니까 닥치라고!"


'아하이고..돌아버리겠네..'


이프리트는 울고 싶었다.


자기가 뿌린 씨앗, 자기가 수확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걸 감당해야 할 줄은 몰랐다.


화산 투성이인 불의 영지, 열기가 그 어느 곳보다도 넘치기에 정령계에서 불의 정령이 최고로 강해지는 장소였지만 그럼에도 날뛰는 독을 멈추기엔 충분치 않았다.


앞뒤 안 가리고 공격을 퍼부으면 지형의 보정을 받는 자신이 화력으론 압도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영웅을 선택한 톡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대결을 통째로 말아먹을 수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멈추기 위한 속박용 기술만으론 먹히는 게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긴 힘을 조절하고 있는데, 완전히 꼭지가 돌아간 독은 불의 왕을 진심으로 죽이려고 날뛰고 있었다.


'애초에 여긴 왜 온거야? 벌써 대결이 끝났을 리도 없고. 맡은 영웅을 내버려두고 정령계로 돌아오다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금인가 뭔가 하는 돌을 구하려고 정령계까지 돌아왔었다고 카르타스에게 들었을 땐 기겁을 했지만, 설마 두 번 그러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기들 기준으로 판단한 게 잘못이었다.


'역시 아무리 급해도 이 녀석한테 가는 게 아니었어.'


뭐 때문에 다시 온 건지 알 수 없지만 아까부터 근처에서 느껴지는 물의 기운 덕에 누가 그녀에게 사실을 말해준 건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아쿠네이라..눈치도 좋은 녀석이 자기가 먹을 밥 아니라고 재를 뿌려? 날 물 먹인 빚은 나중에 반드시 갚아주마.'


당장은 독의 지배자를 멈추고 봐야 했다.


최소한 한 명은 더 있어야 아무도 죽지 않고 진정시킬 수 있을 텐데, 전부 어디 있는 걸까? 이 정도의 소란을 눈치 못 챘을 리도 없고.


"죽어버려! 이프리트!"


"말로 하자..말로..아 제발 조옴!"


톡신의 손에 들려 있던 거대한 톱이 이프리트의 머리 한가운데 찍히며 몸을 정확히 반으로 쪼갰다.


둘로 나눠진 불의 왕이 양쪽으로 서서히 쓰러지다 땅에 닿기 직전, 푸른 불꽃으로 변하며 양쪽 방향에서 톡신의 몸을 휘감자 그녀의 몸에서 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꺼먼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고통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그녀가 이프리트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불을 독으로 덮어버리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보라색의 진흙 같은 독이 불을 덮을 때마다 불꽃이 그 위를 뚫고 솟구치며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점점 커지는 불길이 위로 솟으며 거대한 날개의 모양을 갖추더니, 종점에는 불타는 새가 톡신을 발톱으로 움켜쥐고 있는 듯한 형상으로 변했다.


"더는 못 참겠다."


태양처럼 타오르는 눈동자를 빛내며 노란 불꽃으로 만들어진 부리에서 이프리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말로 하자고 했어."


거대한 날개를 한 번 퍼덕이자 대륙을 사막으로 바꾸고도 남을 열풍과 함께 불사조가 날아올랐다.


또 하나의 태양처럼 사방으로 빛을 뿌리며 솟아오르던 불의 왕이 가장 큰 화산의 봉우리 위에서 멈췄다.


까만 연기 때문에 들여다볼 수도 없는 구멍 속에서는 후끈한 기운이 펄펄 풍겨 나오고 있었다.


"같이 목욕이나 할까?"


"이거 놓지 못해! 이 빌어먹을...."


"이럽션(Eruption : 분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개를 접으며 화조(火鳥)가 분화구 속으로 날아들었다.


독과 불이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천지를 찢는 굉음과 함께 구멍 속에서 시뻘건 용암이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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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하여간 진짜 민폐덩어리들이라니까 둘 다.."


눈살을 찌푸린 채 사방으로 날아가는 불덩이를 보던 아쿠네이라가 투덜거렸다.


이프리트의 영지야 어찌 되든 자기 알 바 아니지만, 그놈 때문에 생긴 쓰레기가 자기 사는 데까지 굴러오는 건 달갑지 않았다.


"관람료 치고 이번만 해 준다 내가.."


한쪽 팔을 위로 올리자 공기 중에서 나타난 맑은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팔을 휘감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비설 헌터즈(Abyssal Hunters : 심해의 사냥꾼)"


손가락 끝으로 수십 개의 물줄기가 뻗어나가며 각양각색의 바다 생물 위에 올라탄 전사의 형상으로 변해 불덩이를 향해 날아갔다.


창과 칼을 꼬나쥔 물의 인형들이 함성을 지르며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불붙은 바위들이 조각나 떨어지는 모습을 보던 아쿠네이라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털며 물었다.


"화산재는 니가 알아서 할 거지? 시무르그?"


".....저걸 언제 다 치우냐, 우리 애들만 또 신나게 고생하게 생겼네."


펄쩍 뛰어오르며 고개를 돌리는 비서와는 달리 진즉에 알고 있었다는 듯 뒤에 나타난 바람의 왕을 돌아보지도 않으며 심드렁하게 말하는 아쿠네이라의 관심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화산에 쏠려 있었다,


"뭐하다 이제 오냐? 아까 진짜 끝내줬는데. 정령계에서 제일 빠른 놈이 밍기적거리긴.....니가 끝이야? 딴 애들은?"


"지금 왔어요."


아쿠네이라 옆의 흙이 솟아오르며 두 명을 뱉어냈다. 하나는 젊은 모습의 다오였고, 하나는 몸의 구름이 온통 칙칙한 회색으로 변한 번개의 왕이었다.


"카르타스와 할 얘기가 좀 많았거든요. 많이 늦었나요?"


대답이라도 하듯 시꺼먼 화산재가 피어오르던 분화구에서 굉음과 함께 이번에는 시퍼런 불기둥이 아까보다 더한 기세로 솟아올랐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열기에 머리카락이 온통 흐트러진 물의 여왕이 차가운 물로 만든 빗으로 머릴 빗으며 투덜거렸다.


"보면 몰라? 빨리 자리나 잡아, 기껏 좋은 구경거리 만들어 놨더니 왜 이제야 와서 참.."


"아니."


돌처럼 굳은 얼굴로 앞으로 나서는 다오의 발밑으로 금이 쩍쩍 퍼져나갔다.


"말려야겠어요. 전부 좀 도와주세요."


"뭐? 다오, 미쳤어?"


사방으로 물을 튀기며 벌떡 일어선 아쿠네이라가 펄펄 뛰며 소리쳤다.


"이 재밌는 걸 왜 말려?"


대답 대신 직접 보라는 듯 다오가 말없이 화산이 있는 방향을 엄지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반짝이는 꿀빛 안개가 용암투성이 땅 사이로 솟아오르고 있었는데,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가는 독안개는 땅에서 넘실대는 불꽃은 물론이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정령들까지 잡아먹듯 뒤덮고 있었다.


안개 속으로 사라진 정령은 신음도 제대로 못 내고 전부 재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메스 컨테미네이션?(Mass Contamination)"


시무르그가 직접 보고도 못 믿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톡시카 저거, 진짜 막 나가네. 아무리 화났어도 이건 아니지."


"저걸 그대로 놔두면 이프리트의 영지는 물론이고 얼마 못 가 우리 쪽까지 퍼질 거예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다오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신들은 어떨지 몰라도, 전 다 썩은 흙은 싫거든요. 그러니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에히고.."


체념한 듯 다오를 따라나서는 시무르그 주변으로 돌풍이 몰아쳤다. 바람이 걷히자 한때 바람의 왕이 있던 자리엔 네 개의 날개를 가진 거대한 새가 서 있었다.


"재밌는 거래서 왔더니..일만 잔뜩 하게 생겼네."


둘을 번갈아보던 아쿠네이라가 분풀이라도 하듯 근처에 있던 돌맹이를 걷어찼다. 짜증난다는 표정이었지만 어느새 연파랑색, 연록색, 짙은 남색 등 다양한 물빛으로 일렁거리는 투명한 갑주가 온 몸을 덮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로 만든 것처럼 찰랑이는 머리카락이 길어지며 머리를 감싸더니 지느러미가 달린 투구의 형태로 변해 얼굴을 가렸다.


마지못해 한다는 아쿠네이라의 태도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던 다오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번개의 왕을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카르타스?"


멍하니 서 있던 정령왕이 땅의 눈초리에 어색한 듯 앞으로 나섰다.


회색이던 구름이 시꺼멓게 변하며 속에서 번개와 천둥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지만, 쭈뼛거리는 모습이 싸우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오히려 여기만 아니면 되니까 어디든 다른 곳에 있었으면 하는 듯 했다.


"그런데 말이다, 다오."


훨씬 깊어진 목소리로 시무르그가 머릴 갸우뚱거렸다.


"누굴 막아야 하는진 알겠는데, 애초에 누가 잘못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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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놈한테 미친 소리 들어먹을 미친놈아아아악!"


한 때 톡신이 했던 소리를 그대로 하며 백색으로 빛나는 불꽃의 갑주를 입은 이프리트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지구를 지키느냐.


아니면 자기 집을 지키느냐.


"나중에 뒷수습 어쩌려고 이러는 건데에에에!!!"


정령왕은 강하다. 이건 말이 필요 없는 사실이다.


휘하 정령은 물론이고, 유일한 숙적인 뱀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강자. 그게 바로 정령왕이다.


하지만 그런 정령왕이기에, 싸울 때 암묵적인 룰이 있다.


인간들끼리 싸울 때 "급소는 차지 않기." 나 "먼저 울면 진거." 같이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어기면 이겨도 패자 취급을 받는 그런 룰 말이다.


이러한 룰 중 하나가 바로 "어떤 기술은 쓰지 않기."


'위험해서'라고 말은 하지만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정령왕이 서로의 안위를 그 정도로 신경 쓰는 것은 아니고, 실상은 민폐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좀 덜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뒷정리가 극도로 귀찮아진다.


아쿠네이라의 씨플립(Sea Flip : 바다역류), 다오의 랜드 리젝트(Land Reject : 대지의 거부) 등 정령왕마다 최소 한 개 이상 가지고 있는 이 기술들은 대부분 내버려두면 몇 십 년이고 지속되지만, 며칠만 가도 정령계 전체를 뒤집어놓을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톡신이 지금 발동시킨 메스 컨테미내이션(Mass Contamination : 대량오염).


위력 자체도 최상급 정령이 아니라면 닿자마자 소멸할 만큼 강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는 대신 양이 늘어난다는 특성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온 정령계를 덮을 때까지 퍼져나가는 최악의 독안개였다.


"이런 걸 내 영지..그것도 내 눈앞에서 뿌려?"


흰색으로 빛나던 이프리트 주변의 불꽃이 전부 푸르스름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먼저 시작한 게 누군데?"


팔 한쪽이 통째로 날아간 톡신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상처부위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남아있는 팔 주변으로 청옥빛 독이 꿀렁거리며 짐승의 앞발 같은 모양으로 뭉치고 있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얼굴을 가린 채 영혼 없는 웃음을 내뱉던 이프리트의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나온 불꽃이 타닥거렸다.


손을 떼자, 태양에서 떼어온 불꽃으로 만든 듯 이글거리는 가면이 얼굴 위에서 빛났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주변에 있던 불꽃과 열기가 전부 이프리트를 향해 모여들며 톡신의 근처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불의 왕의 손바닥 위에 생겨난 주먹 만한 크기의 파란색 화염구(火炎球)를 본 그녀의 얼굴이 기분 나쁘게 일그러졌다.


"아니긴 뭐가 아냐."


독기와 열기를 흩뿌리며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만 보던 둘의 손이 동시에 앞으로 뻗어나가마 벽력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스타페르노(Starferno : 태양염[太陽炎])"


"퓨트리드 바라지(Putrid Barrage : 역병의 파도)"


불과 독이 아가리를 벌리고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덤벼들었지만 열기의 송곳니와 독기의 발톱이 서로의 목덜미에 박히기 직전, 둘 사이에서 흙과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이 솟아올랐다.


갑자기 요동치는 땅 위에서 균형을 잃은 톡신과 이프리트의 머리 위로 물로 이루어진 수천 개의 무기가 쏟아져 내렸다.


"이게 뭔..."


"아쿠네이라?"


갑자기 쏟아지는 공격에 허둥대던 이프리트의 주변으로 백색 뇌광이 번쩍이더니 번개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창살이 불의 주위를 둘러쌌다.


"이프리트. 다친 데 없나?"


"카르타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고작 이 정도 감옥, 빠져나가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그러지 말아주게."


"방금 공격..아쿠네이라에 다오까지 왔어?"


자길 잊지 말라는 듯 톡신 주변으로 거대한 회오리가 몰아치며 사방으로 퍼져나가던 독안개를 몽땅 휩쓸어 빨아들였다.


"...시무르그도 있다네."


"..다 들켰구나.."


"........"


알록달록한 독과 섞여 몰아치는 토네이도 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내 몸 다 썩는다! 좀 돕지?"


"간다, 가."


출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현신한 아쿠네이라가 숨을 깊게 들이쉬기 시작했다.


"시무르그! 이쪽으로 던져!"


회오리가 몸을 털듯 거칠게 요동치더니, 채찍처럼 땅을 내리치며 속에 있던 뭔가를 수룡을 향해 뱉어 날렸다.


"아쿠아틱 저지먼트(Aquatic Judgement : 물의 심판)"


수룡의 입에서 짙은 남색의 물대포가 뿜어져 나오며 날아오던 독의 여왕을 휩쓸었다.


"자..잠깐! 죽이면 안 돼!"


너무 늦은 이프리트의 말은 쏟아지는 물소리에 묻혀버렸다.


해일이 대지를 때리는 듯한 굉음이 걷히자, 그제야 새로 생긴 구멍 한가운데 진흙투성이가 된 채 대자로 뻗은 톡신의 모습이 드러났다.


완전히 탈진했는지 괴물 같던 모습은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죽었냐?"


공중에 떠 있던 아쿠네이라가 땅으로 내려오며 묻자마자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덩어리가 움찔거렸다.


"어으으으..."


"살았다! 살아있어!"


"그럼 비켜봐. 마무리해야.."


"안 돼애애애애!"


손을 들어올리며 다시 공격준비를 하던 아쿠네이라에게 달려든 카르타스와 이프리트가 함께 그녀를 막아섰다.


"아쿠네이라. 이쯤 하게."


"여기서 더 하면, 쟤 진짜 죽을지도 몰라."


"죽으면 어때?"


날개를 접으며 내려온 거대한 새가 위에서부터 바람에 쓸려가듯 사라지더니,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시무르그가 팔짱을 낀 채 걸어 나왔다.


"어차피 우린 다시 부활하잖아. 카르타스야 그렇다 치고, 이프리트 너까지? 집이 이 꼴이 됐는데 웬일이야? 평소 같으면 말려도 날뛸 녀석이."


"......"


"아 맞다... 죽여선 안 될 이유가 있었지?"


"비꼬지 마세요, 시무르그."


땅에서 솟아오른 다오의 모습은 다시 노파로 돌아가 있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게 식어있었다.


"정령이 죽으면 영웅에게 나눠준 힘도 사라진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다오..."


눈을 피하며 얼굴을 돌리던 이프리트가 아쿠네이라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눈에서 다시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쿠네이라..너..도울 게 아니면 잠자코 있을 것이지.."


"나? 내가 뭘?"


"이이익.."


"이프리트."


불의 왕을 가로막은 카르타스가 고개를 흔들며 속삭였다.


"여기까지 하세. 부탁이네."


"...제엔자앙.."


아랫입술을 깨물며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뒤돌아선 이프리트가 엉망진창이 된 영지를 둘러보는 동안, 카르타스가 톡신을 안아들었다.


"난 이 녀석부터 데려다놓고 오지. 계속 여기 놔둬봐야 좋을 게 없으니."


"네 영지로 데려가게?"


번개의 왕이 고개를 흔들었다.


“독의 섬에 데려다놓겠네. 그곳에 제일 독기가 많으니, 회복도 빠르겠지.”


"알아서 해라. 그럼 이제 진짜 끝난 거지?"


질렸다는 표정으로 아쿠네이라가 기지개를 피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했다.


"더 볼 것도 없고, 난 이만 가련다. 오랜만에 운동하니 좋네."


"그럼 나도.."


"아니, 시무르그 당신은 이프리트의 영지 내에 남아있는 독안개가 밖으로 새어나오기 전에 모아서 톡신의 섬으로 옮겨 주세요. 땅 속에 스며든 독기는 제가 처리하도록 하죠."


단호한 다오의 말에 바람의 왕이 입을 열었다 닫으며 정말 싫다는 표정으로 궁시렁거렸다.


"난리친 건 저 둘인데 왜 치우는 건 내가.."


"시무르그."


"알겠어,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애들 불러올게."


둥실 떠올라 가볍게 하늘로 솟구쳐 날아가는 시무르그를 바라보던 다오가 카르타스와 이프리트를 향해 눈을 돌렸다.


".......잘 있어요."


욕보다 더 찝찝하게 느껴지는 작별인사를 내뱉고 흙이 되어 무너져 내리는 다오를 멍하니 보던 카르타스를 향해 아쿠네이라가 혀를 찼다.


"그러게 왜 거짓말을 하고 그랬어~"


"아쿠네이라."


카르타스의 온몸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튀어올랐다.


"그만."


개의치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후, 사방으로 물을 뿌리며 사라진 물의 여왕이 있던 자리를 한참 동안 노려보던 카르타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이프리트..다녀오겠네."


대답은 없었다.


'톡신이 깬다 해도, 모든 걸 알아버린 지금 순순히 지구로 돌아갈까?'


엉망이 되어버린 영지를 묵묵히 수리하는 이프리트의 초라한 뒷모습에 차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며 떠나가는 카르타스의 입에서 참고 있던 탄식이 흘러나왔다.


"지구는 끝난 건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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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영웅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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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Epilogue +2 18.08.17 361 3 14쪽
75 최종결전 - 6 18.08.16 309 1 22쪽
74 최종결전 - 5 18.08.15 226 1 17쪽
73 최종결전 - 4 18.08.14 219 1 16쪽
72 최종결전 - 3 18.08.13 253 1 27쪽
71 최종결전 - 2 18.08.12 219 1 19쪽
70 최종결전 - 1 18.08.10 242 1 18쪽
69 부활 18.08.09 207 1 19쪽
68 통수 - 3 +1 18.08.08 224 1 26쪽
67 통수 - 2 +1 18.08.07 213 1 21쪽
66 통수 - 1 18.08.06 224 3 15쪽
65 The Pledge 18.08.05 217 1 20쪽
64 압도 18.08.03 221 1 15쪽
63 드디어 만나다 +1 18.08.02 223 2 23쪽
62 Welcome to the Madhouse - 3 +1 18.08.01 219 1 19쪽
61 Welcome to the Madhouse - 2 18.07.31 187 2 19쪽
60 Welcome to the Madhouse - 1 18.07.30 227 2 18쪽
59 돌입 18.07.29 210 2 21쪽
58 토사구팽(兎死狗烹) - 2 +1 18.07.27 227 3 21쪽
57 토사구팽(兎死狗烹) - 1 +1 18.07.26 228 1 16쪽
56 설득 +2 18.07.25 242 1 19쪽
55 굴복 +2 18.07.24 220 2 24쪽
54 유혹 18.07.23 269 2 20쪽
53 The Long Run 18.07.22 224 1 19쪽
52 대면 18.07.20 232 1 16쪽
51 기억하기 싫은 것 - 2 18.07.19 254 1 16쪽
50 기억하기 싫은 것 - 1 18.07.18 255 1 17쪽
» 톡신 vs 이프리트 18.07.17 300 3 22쪽
48 발각 18.07.16 243 1 17쪽
47 Switcheroo - 2 18.07.15 244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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