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다섯 번째 괴식 - 짜장 족발 파프리카
오늘은 어떤 괴식을 만들어볼까?
족발은 여름 야식용으로 잘 팔리고
맥주랑 끼워 팔기도 좋다.
돼지고기는 여름엔 하루만 지나도
상태가 안 좋아진다.
빨리 빨리 소진시킬 분량 만큼만 맞추는 게 중요한데
이게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안 맞아 떨어질 때가 있다.
모자라면 좋고 남으면 골치다.
잘못 팔았다가 식중독 시비라도 걸리면
마트 이미지에 치명타가 된다.
시간이 좀 지나서 계속 밀렸던 족발세트가
내 차지가 되었다.
족발. 이게 웬 족이냐.
족은 한자로 발 족자라서
족발은 결국 족족, 또는 발발이라는 뜻이다.
오늘 괴식은 아주 족같은 족스러운 괴식이 될 것 같다.
자, 족같은 괴식에 어울리는 사이드재료는 ...
파프리카는 비교적 유통기한이 긴 야채다.
그래서 진짜 맛이 간 상태는
신선한 상태와는 너무 다르다.
오래 돼서 꼭지가 마르고 얼룩이 묻은
빨갛고 노란 파프리카를
족같은 괴식에 사이드로 픽했다.
이만하면 됐다 했는데
짜장라면이 포장이 튿어져서 바닥에 굴러다닌다.
“아 또 JOT 되버렸어”
점장이 굴러다니는 라면봉지를 보고 한 마디 던진다.
JOT된 라면, 족같은 괴식에 어울릴 것 같다.
원래 내가 즐겨먹는 짜장라면이라
바닥에 굴렀던 면은 포기하고 짜장스프만 따로 챙겼다.
자, 이제 족같은 괴식을 만들어보자
족발은 이미 삶은 거지만
시간도 꽤 지나서
먹고 안 아플려면 한번 더 삶으라는
담당 아줌마의 팁이 있었다.
삶기... 큰 냄비에 물을 붓고
찜기 같은 걸 걸쳐서 뚜껑을 덮어야하는데
나한테 찜기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물을 팔팔 끓였다. 소금도 좀 넣었다.
소독되라고 식초도 한 방울 넣었다.
여기다 썰린 족발을 조금씩 끓어오르는 물에 박아 넣는다
끓는 물에 돼지 족발이 목욕을 한다.
데치기.
혹시 있을지 모를 세균에 대한
나의 방어력을 집중시켰다.
이것도 타이밍 싸움이다.
너무 오래 끓는 물에 집어 넣으면
삶은 속옷 빨래처럼 된다.
족발 고유의 풍미가 다 사라진다.
그렇다고 너무 일찍 빼면
멸균의 효과가 떨어져
데치는 의미가 없어진다.
인생은 역시 빼박의 연속인가,
언제 빼고 언제 박나
타이밍의 예술이 여기서도 크리티컬 포인트가 된다.
이 포인트를 놓치면
빼박캔트의 대혼란에 마주하게 된다.
초단위로 흘러가는 긴장된 순간
!!!
신내림같은 촉이 발동했다
지금이다!
예리한 눈,
민첩한 손.
그리고 순간적 판단력.
본능적 감각의 트리플 액션으로
타이밍을 놓치지않고 족발을 건져낸다.
이 삼위일체적 능력을 가진 자만이
오래돼서 다시 데친 족발을 먹을 자격이 있다
능력자. 그대의 이름은 김.처.묵.
김이 모락모락 먹음직스럽다.
후후 불어서 살짝 뜯어먹어본다.
! 굿~~~
역시 나는 촉이 좋다.
촉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이래도 안 죽는 식중독 세균이 있으면
그래서 내가 탈이 나면
그건 내 팔자다.
내가 폐기품을 갖고가서 야식 만들어 먹는다고 하면
사람들 반응은 딱 정해진다.
“그러다 탈난다 병원 가봤어?”
“쓰레기가지고 음식이 만들어져? 그걸 또 먹어?”
“궁금하다 어떤 음식인지. 한번 갖고 와 봐”
나는 이제 마트의 음식쓰레기 재활용 담당처럼 되었고
처음엔 딱하게 보던 눈빛이 점점
호기심과 개그의 정서로 바뀌었다.
그들의 호기심을 채울 만한 괴식이 되려면
여기다 무슨 짓을 해야하나
딸려온 파프리카를 박박 씻었다.
원래 신선한 건 육질이 단단한데
얘는 워낙 오래돼서 흐물흐물하고 물렁물렁하다.
얘를 마구마구 잘라주었다.
컬러는 워낙 화려한 애들이라
잘라도 비주얼이 나쁘지 않다.
빨간 조각 노란 조각
어릴 때 미술시간에 장난치던 색종이 같다.
초딩때 생각이 난다.
그때 우리 담임쌤이
교대 졸업하고 처음 부임하셨었나 그랬다.
그런데 이 쌤이
얼굴은 예쁜데 말이 험했다.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강했다.
시험 점수가 안 좋은 아이들에게
점수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기 머꼬? 이기 점수가?”
시험지와 점수의 정체성을 학생들에게 되묻는 특이한 쌤이었다.
어느날 미술시간에 나는
작은 내 손에 맞지 않는 큰 가위를 가져온 바람에
색종이를 서툴게 겨우겨우 자르고 있었다.
이런 나를 보며 쌤이 한 마디 던졌다.
“처묵이 니는 뭘 처묵고 커가꼬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몬하노”
자기 딴에는 내 이름으로 개그친거다.
난 무엇보다 나의 필생의 콤플렉스인 내 이름을 가지고
아이들 앞에서 놀렸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처묵. 살 처자(處)에 묵묵할 묵(黙)
묵묵하고 조용하게 한 곳에 머물러 살라는
안빈낙도의 선비 정신이 오롯이 담긴 품격있는 이름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그렇지.
사람 인생 이름따라 간다고
나는 폐기물 재료를 가지고 와서
처묵처묵하고 있다.
처묵이 아니고 처득이면
고상하게 처드시는 인생을 살았을까.
혹시 모르니까 개명 신청할 일 있으면
김처득이라고 할 거라고
폰 메모장에 잘 적어둔다.
오늘도 난 내 운명을 바꿀 노력을 했다. 뿌듯하다.
불을 다시 켜고 냄비를 놓는다
물을 잔잔하게 깔릴 만큼 부어준다.
여기다 마법의 짜장가루소스를 투하
마구 휘저어 주었다.
까만 가루 덩어리가 짜장 국물스럽게 변한다.
잘 녹았다 싶었을 때
파프리카 투하.
빨간 노란 색종이가
까만 도화지에 떠다니는 거 같다.
여기에 족발 투하
그러고 뚜껑 덮고 3분간 다시 끓여주었다.
이 모든 레시피는 절대 검증된 게 아니다.
백퍼 나의 촉 대로 가는 거다.
사실 촉이란 건 많은 경험치에서 나온
새로운 결과에 대한 추정치일 때가 많다.
지금 나는 그래도 며칠 해본 괴식 요리의 경험치가 쌓여져서
새로운 괴식의 레시피를 추정해보는 것이다.
3분 지나서 뚜껑을 연다.
짜장면의 짜장은 아니지만
짜장조무사 정도의 맛을 기대하며 한 입 먹어본다.
음~~ 대박까지는 몰라도
상당히 먹을 만하다.
족발의 구수함과 짜장의 짭쪼름한 단맛이 잘 어울린다.
거기다 파프리카가 얘네들의 기름맛을 조절해준다.
그릇에 보기 좋게 담아냈다.
머릿속에 행복회로를 돌리며 셀프세뇌를 한다
이것은 짜장 오향장육.
내가 신개발한 중국요리의 4차혁명.
요리의 역대급 콜라보가 아닐 수 없다...고
아는 유일한 중국어로
이번 족같은 괴식을 마무리했다
“닟시8놈아”
(중국어 번역 : 밥 처묵었냐)
혼자 묻고 혼자 답한다
JOT또
(일본어 번역: 조금)
한국말처럼 친근한 중국어와 일본어를
한 입 먹고 하고 한 입 먹고 하고
요리와 중국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마스터 하는 기분이다.
역시 인생은 일타쓰리피다.
“닟시8놈아”
“JOT또”
혼밥괴식회 ... 오늘도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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