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계획
마나 번아웃 현상으로 죽은 듯이 잠들었던 이서아.
몇 시간을 꼼짝 않고 잤는지 몸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끄응. 얼마나 잔 거야.”
저녁 9시가 넘어 있었다.
“부장님은 뭐하고 계시지?”
눈 뜨자마자 부장님 먼저 생각난 건, 시간만나면 입 맞추겠다던 사람이 연락도 없고 조용해서 궁금했을 뿐이다.
“뭐, 꼭 키스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나저나 출출하네. 뭐 먹을 거 없나?”
균형 잡힌 도시락은 조금 질렸다.
“부장님한테 같이 먹자고 해볼까? 아······. 벌써 먹었겠구나. 그럼 오래간만에 친구들 불러내서 술이나 한잔해야겠다.”
다시 젊어진 친구들의 얼굴을 보게 될 걸 생각하니 기대됐다.
“민지는 지금 남친이랑 만날 싸우다가 3년 후에 결혼하지 아마? 크크큭”
휴대전화기를 찾아 전원을 켰다. 독고민 때문에 꺼둔 상태라는 걸 이제야 확인한 이서아.
친구들 단톡방엔 메시지가 200개가 넘게 있었고, 독고민은 톡 메시와 문자 메시지로 도배를 해 놨다.
그 사이에 부장님의 메시지가 보였다.
“어? 부장님 연락했었나 보네? 근데 무슨 일이지? 회사 일인가?”
바로 부장님의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3시간 전에 온 메시지였다.
-자는 것 같아서 메시지 남깁니다. 일어나면 연락 주세요. 보고 싶습니다.
‘헉!’
보고 싶다는 마지막 말에 입을 가리고 숨을 들이켰다.
입은 실실 웃고 있었지만 아직 자각하지 못한 이서아.
“보고 싶다니······. 이 말이 본래 이렇게 심쿵 한 말이었나?”
독고민이 하는 말은 질척이는 더러운 말로 들렸는데 막상 부장님이 보고 싶다 말하니까 꿀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이서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심호흡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후우······. 나대지 말고 진정하자. 일단 친구들한테 연락을 좀 하고······.”
거절당했다.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 술 마시자고 메시지를 남겼지만 다들 쉬는 중이란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내일 출근해야 한다며 주말에 보자고 한다.
결국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건 부장님인데, 바른 생활을 할 것 같은 공리안 부장. 그라면 벌써 잘 준비하고 누웠을 것 같았다.
“괜히 자는 거 깨우는 거 아니겠지? 늦었으니 내일 연락해야겠다.”
부장님께 연락하는 건 내일로 미루고 뭐 할지 궁리하다가 심야영화표를 예매했다.
독고민이랑 보려고 했다가 못 봤던 그 영화. 그 후에도 절대 안 본······.
“혼자 볼 테다!”
번화가 근처에 얻은 원룸이라 주변에 편의 시설이 꽤 많았다.
십여 분만 걸어가면 대형 쇼핑센터가 있고 그곳 상층에는 영화관이 있다.
핫도그와 음료를 사서 들어가자 바로 영화가 시작됐다. 심야 영화인데도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시작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그때 들어오는 남녀 한 쌍의 커플이 앞자리에 앉으며 화면을 가렸다.
아는 얼굴이었다.
‘커헉! 독고민, 오수영 대리?’
너무 놀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렇게 피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입을 틀어막고 이서아는 영화 팸플릿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뒤 뒤쪽 입구 근처 빈자리로 이동했다.
‘젠장. 왜 허구 많은 영화관 중에 여길 온 거야. 그것도 나랑 보기로 했던 영화를’
꼴 뵈기 싫었지만 돈이 아까워서 그냥 나갈 순 없었다.
하지만 영화가 눈에 하나도 안 들어왔다.
결국 영화는 반도 못 보고 나온 이서아.
짜증이 밀려왔다. 영화 보는 내내 쪽쪽 거리는 두 사람만 보여서, 사실 그 외에도 다른 커플들도 그랬다. 유독 두 사람만 눈에 또렷이 보였을 뿐이다.
“영화 보러 왔으면 영화를 봐야지 말이야.”
이서아는 눈알을 씻고 싶었다.
“못 볼 걸 봐버렸어. 쯧.”
결국 야밤에 거리를 활보하게 된 이서아. 갈 곳이라곤 원룸뿐이었다.
그때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싸우는 소리였다.
원룸 방향이라 다가갈수록 점점 크게 들렸다.
띠링!
이서아는 퀘스트 창을 열지 않아도 어떤 퀘스트가 도착했을지 감이 왔다.
“설마 나 보고 저 싸움 말리라는 건 아니겠지? 나 싸움도 못하는데.”
【퀘스트 : 데이트 폭력 근절!
사랑이란 이름하에 벌어지는 폭력. 이대로 두고 볼 순 없다.
데이트 폭력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도와라.
※보상 : 액티브 스킬, 카르마 포인트 300점, 능력 포인트 8점】
“데이트 폭력이라고?”
이서아는 퀘스트를 보고 서둘러 걸었다. 자신도 남편의 폭행으로 죽었던 경험이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코너를 돌자 어떤 남자가 한 여자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욕지기를 뱉는 모습이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들 멀리 돌아갔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가 하도 흉흉하게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 질세라 머리채를 잡힌 그녀도 만만치 않았다.
“이거 놔 새꺄. 너 신고할 거야. 이 미친 새꺄.”
이서아는 속으로 ‘와!’ 하며 여자의 기세에 감탄했다.
‘이러고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주변을 보니 다행히 CCTV가 있었다.
‘일단 신고부터’
이서아는 영화 보느라 걸어둔 비행기 모드를 풀고 112에 전화를 걸었다.
그 순간이었다.
열받은 남자가 발을 들어 올렸고 발길질에 여자가 대차게 차일 것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이 눈에 들어왔다.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 여성은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급작스러운 폭력이라 주변에서 말릴 틈도 없었다.
“어? 어? 안 돼!”
신경을 집중하는 순간 이서아 눈엔 그 남자의 움직임이 아주 천천히 보였다. 그리고 들어 올린 다리를 염동력을 이용해 더 높이 끌어올려 남자 몸을 뒤로 날려 버렸다.
콰장창!
내려진 셔터 앞으로 날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꼬라박힌 남자. 너무 세게 던져졌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에선 웅성 거렸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여자는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당황해하고 있었다.
“허억, 허억.”
이서아는 자신이 하고도 믿기지 않아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네 말씀하세요!
휴대전화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이서아.
타인의 목소리를 들으니 떨리던 손이 진정되었다. 이곳의 주소와 상황을 설명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멀리서 경찰차 소리가 들렸다. 그녀 말고도 또 다른 누가 먼저 신고를 했었다고 한다.
그때야 머리를 흔들며 천천히 일어나는 남자.
창피한지 더 사납게 욕을 하며 달려들었다.
“이런 썅X이 이제 사람을 패? 야이 씨XX아!”
이서아는 여자에게 달려드는 남자의 다리를 염동력을 이용해 잽싸게 뒤로 잡아 뺐다. 정확히 말하면 다리를 붙잡아 세운 것이다. 그로 인해 상체가 앞으로 기울며 바닥과 입맞춤을.
빠악!
이서아는 자신이 한 행동이지만 차마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소리만 들어도 엄청 아플 것 같았다.
“으······.”
지나던 사람들도 황당해서 자리에 멈추어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서아는 여자에게 다가가 괜찮으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 옆엔 다른 아주머니가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경찰차가 도착하자 그 아줌마가 증인으로 따라가겠다고 말했고, 경찰은 CCTV 위치를 확인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천리안 스킬과 카르마 포인트 300점, 능력 포인트 8점이 주어집니다.]
이서아는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남편에게 죽기 전 폭행당하던 순간을.
‘나의 미래 세계는 아직 진행 중 일까?’
만약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 세계에 계신 부모님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그 세상은 존재할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생각이 복잡해졌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생각을 지우고 상태 창을 열어봤다.
방금 상황을 보니 여자도 힘이 세야 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능력치를 골고루 올린 후. 나머지는 힘에 투자했다.
[-]
힘 12
민첩 10
근력 10
마나 32
지능 24
행운 18
(능력 포인트 0)
이서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겉보기엔 가늘고 연약해 보이지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니 힘이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궁금한 방향을 정한 뒤 그곳에 보상받은 스킬을 사용해 봤다.
‘천리안!’
스킬을 사용하자 미량의 마나가 소비되는 게 느껴졌다.
조금 더 멀리 주시했더니 카메라 줌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주변의 배경이 끌어당겨지면서 멀리 떨어진 건물과 사람들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크게 보였다. 천리안은 건물 벽을 넘어 그 뒤까지 볼 수 있었고,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허! 소리까지?’
시야가 가까워지니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원룸으로 가는 방향을 바라봤다.
두 블록 길 건너에는 고급 빌라 촌과 고급 오피스텔이 있는 동네.
주변엔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꽤 운치 있는 곳이다.
그 뒤로는 마봉산 낙타공원이 있고 마봉산 봉우리에는 낙타루가 있다.
밤이라 공원에 오르는 산책로 외엔 깜깜했다. 산책로엔 그래도 사람들이 오르는 게 보였다.
도심에 있는 산이라 그 높이가 높지 않고 봉우리가 두 개로 낙타등처럼 생겨 낙타공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렇지 않아도 방 안에서 염동력 연습하기엔 이제 비좁은 것 같아 원룸 건물 옥상에서 연습할 생각이었는데.
“옥상 보다 마봉산 숲이 더 좋겠어. 눈에도 안 띄고 밤엔 사람도 없고.”
마봉산 낙타공원을 염동력 훈련 장소로 제격이었다.
천천히 부자 동네를 가로질러 걸었다.
온통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넘치는 곳이다. 가로등부터 잘 다듬어진 조경. 곳곳에 놓인 벤치까지도 참 예뻤다.
공원에 오르려면 이 동네를 지나쳐야 했다. 반대쪽 길도 있지만 한참 돌아가야 한다.
삐뚤어진 심보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부럽고 샘나서 더 마봉산 낙타공원을 찾지 않았던 것도 있다.
“여기 오피스텔은 얼마 정도 하려나.”
이서아는 걸으면서 상점을 열어 이곳의 오피스텔 가격을 알아봤다.
“매물이······ 있으면 좋겠는데. ······있다! 근데, ······월세랑 전세만 있네?”
월세 보증금은 얼마 안 했지만 월세가 비싸서 패스, 전세는 카르마 포인트 29,500점 (시가 2억 9500만원)이었다.
“매매도 아닌 전세가 이 정도라니. 후덜덜하네. 어차피 전세금은 돌려받을 수 있으니까. 전세로 살아도 되겠는데?”
마봉오피스텔은 1년 전쯤 새로 지어진 신축 건물이었다.
이서아는 바로 포인트로 결제했다.
[마봉오피스텔 301호, 전세 계약서와 카드키가 도착했습니다.]
결제를 하면 부동산에서 전화가 오고 계약서를 쓰기 위해 도장 들고 찾아가야 할 줄 알았는데, 그런 불편함이 생략되었다.
인벤토리에서 꺼내 서류를 살펴보니 정상이었다. 서류엔 임시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너무 간단해서 실감이 나지 않는 이서아.
“뭐야. 조금 허무한걸? ······지금 사는 원룸은 내일 낮에 내 놔야겠다. 어차피 재계약 일도 다가오니까.”
[원룸을 부동산에 내놓겠습니까? Y/N]
“노노노노, 주인아주머니께 말씀드려야 하니까 일단 노.”
카르마 포인트는 109618점 남았다.
명상 몇 시간만 해도 카르마 포인트가 쭉쭉 오르니 금방 복구될 것이다.
“이제 나도 이 동네 주민이란 말씀? 당당히(?) 공원을 이용해 볼까?”
오른발과 오른손이 같이 나가는(?) 씩씩한 걸음으로 공원을 올라갔다.
잘 닦인 공원길을 오르다 보면 곳곳에 약수터로 가는 구불구불한 숲길이 있다.
그녀는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왠지 으스스 한데? 오피스텔 옥상에서 연습할까?”
마봉오피스텔은 건물은 꽤 높아서 원룸 옥상보다 더 눈에 안 띄긴 한다.
“아냐, 일단, 올라온 김에 적당한 곳이 있나 둘러보자.”
멀리 가로등으로 충분히 밝았지만 숲길로 조금 깊숙이 들어가니 점점 어두워졌다.
하지만 어둡지만 비교적 잘 보였다.
“본래 이렇게 잘 보였었나? ······아무래도 도심 불빛 때문인가 보네.”
이서아는 천리안 스킬로 인해 눈이 밝아졌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약수터로 가는 방향이라 사람들 발길로 길이 다져져 있었다. 숲길임에도 바닥은 비교적 걸을만했다.
심호흡을 하니 꽤 상쾌했다.
“공기 좋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 갓밝이 전에 내려가면 되겠어. 어디 앉아서 명상할 장소를 찾아봐야겠다.”
감각 스킬로 주변을 살펴보니 샛길 중간에는 작은 육각전통정자가 있었다.
염동력을 이용해 그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보는 이가 없으니 마음대로 염동력을 사용할 수 있어서 정말 편했다.
“진작 여기로 올걸 그랬어. 영화관 말고,”
염동력을 운용하며, 발바닥에 살짝 힘을 주어 도약했더니 주변 배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귓가에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휙휙 들리고, 높아진 민첩과 좋아진 시력(천리안)을 사용해 다음 도약 장소까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감각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와아아! 경공술이 따로 없잖아.”
발바닥에 내공을 실어 가볍고 빠르게 움직이는 보법.
이서아는 내공 없이도 염동력만으로 가능했다.
타탓.
육각전통정자가 있는 제법 널찍한 장소에 도착한 이서아.
높아진 근력 때문인지 힘 때문인지 몰라도 착지도 생각보다 안전해서 몸에 무리가 없었다.
숨도 차지 않았다.
이서아는 자신을 두 팔로 감싸 안고 몸을 흔들며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으헤헤헤헷, 나 완전 재능 있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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