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과 마늘 없이 사람이 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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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중턱
작품등록일 :
2018.06.16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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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0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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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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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10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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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3장 - 숲의 주인(5)

DUMMY

입을 대강 헹군 다음 나는 투구의 안면 보호대를 다시 내리는 것으로 이 닦기를 종료했다. 옆구리에 끼운 미친년···아니 엘프를 대강 침대에 내려놓은 다음, 매듭을 다시 묶었다.


“···손이랑 발을 좀 따로 묶어주면 어디 뭐 덧나나?”

“따로 묶었잖아.”

“이게 어딜 봐서 따로야?”

“두 매듭을 이어놨을 뿐, 따로는 맞아. 그리고 계속 시끄럽게 하면 재갈을 다시 물려줄 테니 알아서 해.”

“으···.”


그리곤 침대에 누우려던 찰나, 숲의 주인이 내 앞길을 막아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니 그녀가 가로막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건 그렇고, 그 투구 벗어볼 수 있겠느냐.”

“네?”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란 투로 외쳐 물었다. 이건 좀 실례인데.


“왜, 왜요?”

“아까 저 정신 나간 뾰족 귀가 네 눈을 찌르지 않았느냐. 안광을 보건데 상태는 괜찮은 것 같지만 걱정은 되는구나. 기왕 일을 시켰으니 상태를 살펴주는 정도의 호의는 베풀 수 있느니라.”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토라진 사람치고는 꽤 괜찮은 생각이었지만, 사양하고 싶다.


“괜찮아요.”

“왜? 치료 받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아? 솔직히 이런 숲을 살아서 나가는 것 치고는 좀 대가가 너무 크잖아.”

“크지 않은 것 같아요.”

“···날 너무 과대평가 한 것이냐 아니면 널 너무 과소평가 한 것이냐.”

“과소평가도, 과대평가도 하지 않았어요. 보이는 대로 판단했을 뿐이에요.”


그 말에 그녀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지는 몰라도 조금 자존심 상하는 표정이라 느낄 그 무렵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넌 인성을 잃지 않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법을 잊은 것 같구나.”

“예?”


그리고 그 말은 조금 이상한 말이었다.


“말 그대로, 넌 모든 인식을 과거에 가둬버린 다음 현재를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 나름 세상을 살아본 어른으로서 말하자면, 넌 마치 자신감을 잃고 땅만 바라보며 걷는 어린아이 같다. 네 눈앞에, 네 머리 위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않으려는···.”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아마 저들도 알만한 이야기다. 그래, 인간의 기준에선 그걸 이렇게 말하겠지. 미친 놈.”


자주 들었고, 자주 생각했기에 그 말을 정신 나간 소리라고 넘길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본인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걸 보니 너도 어느 정도는 짐작을 했나보군. 사실 못 맞추는 것이 더 이상하니라. 미치지 않고서야 산 자에 대한 증오를 품을 수야 없지.

네가 산 자들을 증오하진 않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미쳤을 것이라 생각은 했느니라. 아마 네놈이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도 그 까닭이겠지.”

“이, 잊은 건데요.”

“아니지. 잊은 것이었다면 좀 더 안타까워했겠지. 하지만 넌 찾을 수 없는 것이란 듯이 굴었다.”


족집게도 이런 족집게가 따로 있나. 어쩜 이렇게 잘 아는 거지? 말도 안 된다 싶다는 생각이 들 그 무렵,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그녀가 내 투구에 손을 가져다댔다.


“우와아악!!”


나는 화들짝 놀라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역시, 여기에 문제가 있었군.”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이를 닦게 시킨 것도 다 그런 이유였느니라.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머리에 쓰는 가면 같은 것은 벗어야 하기 마련이지. 하지만 넌 벗지 않았다. 예의를 모르는 놈이라기보다는 벗어선 안 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지.

너는 몰랐겠지만, 난 네가 이를 닦는 것을 지켜봤다. 하지만···넌 이를 닦을 때마저 투구의 안면부를 살짝 들어올리기만 했을 뿐이지.”


하나같이 당황스러운 말 뿐이었던지라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얼굴을 보여. 그 안에 대체 뭘 숨겨뒀지?”


숨긴 것. 그래 맞다. 숨긴 것이 있긴 하다. 근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숨긴 건 아니다.


“이, 이 안에는 추한 얼굴이 있어요···!! 아무에게도 보일 수 없어요···. 이 안에 있을 얼굴이 무서워서···그래서 이곳에 온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모르는 척 해주세요.”


벌벌 떨면서 이야기 하는 이 느낌.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어렸을 적에 자신의 잘못을 어른 앞에서 떨면서 이야기 하는 느낌과 비슷했다. 어째서일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참견일 수도 있지만, 지금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발전도 할 수 없도다. 과거에 갇혀서 현재를 바라보지 못하던 이들에게 미래가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알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네가 기를 쓰고서 가리려 했던 것에는 네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네가 반드시 봐야만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다. 눈앞이 어지럽다. 머리가 아파온다. 그런 심정이란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그렇다. 마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다. 고작 충고일 뿐인데,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아프고 눈앞이 어지럽다.


“자, 잠깐만요···. 마, 말하지 마···!”

“벗어라. 벗는 편이 좋다. 괴롭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 말이다.”

“그, 그만···!!”


내가 머리를 감싸 쥐고서 바닥에 무릎 꿇자 민기 형이 걱정스러운 투로 만류하기 시작했다.


“이, 이봐요. 이제 그만 해요. 얘가 싫어하잖아!”

“너야말로 가만히 있거라. 넌 스스로를 과거에 처박아둔 채로 현실을 도피하는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게냐?”


하지만 현실도피란 말을 듣자 잠자코 지켜만 보던 화랑 아저씨도 갑자기 누워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따졌다.


“현실 도피? 얘가 현실도피를 한다고? 당신은 얘를 얼마나 봤다고 해서 현실도피니 뭐니 아무런 말이나 해? 이 자식은 커럽터인 주제에 헌터가 되려고 아등바등 하는 자식이야. 그런데 뭐? 현실을 거부하는 녀석이라고?

그 알량한 마법적 지식과 긴 삶이 뭐가 대수라고 사람을 멋대로 판가름해? 긴 삶을 살았다는 건 결국 늙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건데!”


싸울 상대를 분별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살생유택의 정신이라 말했던 사람치고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용감한 발언이었다.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와중에도 저 무시무시한 숲의 주인이 화라도 내면 어쩌나 싶었는데···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헌터라는 단어에만 집중했다.


“···헌터? 사냥꾼? 현재의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이들 중에서 사냥꾼이 아닌 이들이 얼마나 된다고···.”

“요즘은 몬스터 잡으면 그냥 다 헌터라고 불러! 아무튼, 당신 자꾸만 이 자식이 발전도 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놈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거 존나 실례라고! 알아?”

“현실에 안주하는 놈이란 뜻이 아니다. 인식 자체를 과거에 가둬버린 상태라는 뜻이다. 그럼 여기서 묻겠다. 커럽터···라고 했지. 커럽터 너에게 지금 이 두 놈이 어떻게 보이느냐?

이 두 남자가 어떻게 보이느냔 말이다.”

“어, 어떻게 보이냐니···.”


대답은 어려울 것이 없다.


“잠자기에 적당한 복장은 아니죠···. 과장 아저씨는 지금 양복을 입고 있고, 세상에. 구두 아까 벗지 않았어요? 그리고 민기 형은 국방색 카고 바지에 빨간색 반팔 남방 걸치고 계시고요. 어, 생각해보니 언제부터인가 그 이상한 비옷도 안 입고 계셨네요?”

“···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커럽터. 대체···!”

“내, 내가 작업할 때 입는 옷을 입고 있다고? 무슨 소리야? 심지어 내 남방은 그때 막사에서 버렸어! 제대로 말하는 거 맞아? 혹시 텔레파시 같은 걸로 너한테 대답을 강요하는 거 아니야?”


두 사람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마치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물었다. 다만, 숲의 주인만이 이상할 것도 없다는 듯, 새로운 질문만 건넸다.


“이럴 줄 알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다. 나는 무슨 옷을 입고 있느냐?”

“······말도 안 되게 야한 드레스요. 가슴은 물론 배꼽까지 파인 앞태에 뒷태 역시 꼬리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양 옆이 트여진 레드 카펫 위를 걸어야 할 것 같은 옷이요.”

“역시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나는 지금 그 옷을 입고 있지 않다. 분명히 오늘 너와 처음 만났을 땐 입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 잠깐만요. 커럽터 너. 우리가 입고 있던 근무자 우의 언제 벗었는지 기억해?”


기억 안 난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야 좀 사태의 심각함이 느껴지느냐.”

“······.” “······.”

“···예.”


대답을 한 건 나뿐이었다. 분위기가 몹시 어둡다. 내가 미친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일 줄은···몰랐어요···.”

“···정말 괴로운 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어쩌면 그 투구 안···네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으려는 그 투구 안쪽이 바로 해답일지 모르겠구나.”


가장 감추려는 것에 해답이 있을 수 있다.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이것만큼은 안 돼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강요는 하지 않겠다만, 왜 그런지 이유를 말해줄 수 있느냐?”

“······저희 집엔 거울이 없어요. 혹시라도 제 얼굴을 볼까봐 말이죠···. 그래서 방금 전에 8년 만에 제 얼굴을 본 셈이죠. 겨우 아래턱 정도만 본 정도지만. 근데 제가 알고 있던 그대로더군요. 형편없이 붉게 부풀어 오른 모습 그대로요···.

얼굴을 가리는 건 사람을 대하는 예의가 아니죠. 하지만 보기흉한 모습을 가리는 데에 이유가 있다는 것만 이해해주세요. 제발······.”

“···잠깐만. 붉게 부풀어 올랐다고?”


내 말에 의문을 가진 사람은 과장 아저씨와 민기 형도, 숲의 주인도 아니었다.


“아닌데? 분명히 보랏빛 피부의 갸름한 얼굴이었는데···? 분명히 기억해. 뭐 하는 놈인지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어서 몰래 훔쳐봐서 알아. 분명히 보라색이었어. 남보라 색이라 잊기도 힘든 색이었지.”

“?!”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 엘프 여자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갑작스레 쏟아지는 시선에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며 따졌다.


“뭐, 뭐예요. 내가 못 볼 거 봤어요?”

“보라색···?”

“갸름한 턱선···.”

“나이트 엘프?”

“아 좀! 김민기 넌 한 순간만이라도 제발 진지해져 봐!”


모두가 서로 보라색 피부와 갸름한 턱선이란 말에 다시 한 번 서로를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더니, 이내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저 숲의 주인마저도 말이다.


“왜, 왜 그래요?”

“커럽터야.”

“···예?”


대답하기가 무섭다. 저 과장 아저씨의 표정이 너무 기분 나빴다. 뭘 하려는지 알 것 같았지만, 모르고 싶었다. 제발 그 말만 하지 마. 제발···.


“숲의 주인님 말대로 한 번은 벗어 봐도 되지 않을까?”

“아 진짜 좀!!”


젠장 이럴 줄 알았어.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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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99 임산
    작성일
    18.07.10 23:01
    No. 1

    커럽터인 줄 알았더니 엘프?
    그런데 왜 커럽터처럼 하고 다닐까?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8 중턱
    작성일
    18.07.10 23:11
    No. 2

    엘프란 말은 그냥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나이트 엘프 종족의 피부색 때문에 엘프라고 했을 뿐입니다. 혼동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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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14장 - 기사는 용을 물리쳐 공주와 결혼한다(6) +3 18.10.05 279 11 14쪽
81 14장 - 기사는 용을 물리쳐 공주와 결혼한다(5) 18.10.04 210 7 12쪽
80 14장 - 기사는 용을 물리쳐 공주와 결혼한다(4) 18.10.03 198 4 10쪽
79 14장 - 기사는 용을 물리쳐 공주와 결혼한다(3) 18.10.02 205 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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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12장 - 너와 만나고 싶었어. 아주 많이.(2) 18.09.13 220 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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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11장 - 기다림(2) 18.09.07 252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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