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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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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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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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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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는 이야기 - 스물세번째 기쁨 (3)

DUMMY

“검은 휘두르지도 못하고, 달리기도 엉망이군. 다행히 눈이 좋아 피하는 건 잘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지쳐 앉아 헐떡이는 세실에게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누가 그의 모습을 봤더라면 혹사라도 시키는 줄 알았겠지만, 보통 성인 기준의 간단한 체력검사를 치렀을 뿐이다. 세실은 대부분의 기준에 있어 미달이었다. 그에게 있어 뛰어난 점이라고는, 날아오는 것을 보고 잡아채거나 피하는 것뿐이었고, 독특한 점은 왼손잡이라는 점 외에는 별 다른 게 없었다.


“별다른 특출난 점은 없구먼. 세실? 받게.”


에드윈이 던진 돌멩이는 세실의 어깨에 맞고 툭 떨어졌다. 그에게는 이제 집중할 힘도, 손을 들어 올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그누스는 탄식하듯 말했다.


“그래도 체력만 기르면 금방 같이 싸울 수 있을 겁니다.”


“그야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체력이라는 게 그리 금방 길러지는 건 아니잖나? 세실. 잠시 쉬고 하나만 더 검사를 해보도록 하세. 물을 좀 가져다주지.”


세실은 고통스럽게 타들어 가는 목을 적시고자 애써 마른 침을 삼켰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대신해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싹 마른 목구멍 안에서는 익숙한 쇠 비린내가 올라왔다. 세실은 이것이 그리도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고 익숙해져야 할 아픔이다. 이전에는 칭얼거림을 들어줄 대상조차 없었지만, 지금은 칭얼거려서는 안 될 곳에 와있다. 물을 받아 마시자 고통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턱에 방울진 물을 소매로 훑는 세실에게, 에드윈은 다른 무언가를 하나 더 건네주었다.


“···칼?”


“칼이라니, 보통 단검이라고 하지. 생각보다 꽤 무게가 있지?”


검보다는 가벼웠지만, 또 생각과는 다르게 꽤 무거웠다. 이 정도면 빠르게는 아니더라도 들고 휘두를 정도는 되지 싶었으나, 에드윈은 다른 것을 요구했다.


“던져보는 건 어떤가. 저기 저 밀짚 인형 보이나?”


보고받는 건 자신 있었지만, 던지는 것에 대해서는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야 그에게 있어서 '던진다'라는 경험은, 물건을 훔치다 들켰을 때 좁을 골목으로 몸을 던지는 게 다였다. 왼손으로 쥐고, 오른손으로 슬쩍 목표를 겨눈다. 그리고 적당한 힘으로 단도를 던진다. 힘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능력뿐인 건 아니군. 뭐, 그거라도 있으면 되네.”


단검은 돌면서 날아가 인형을 툭 맞추고 떨어졌다. 마그누스와 올리비아는 아쉬움을 표했고, 에드윈은 자리에서 일어서려했다. 그러나 세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단검을 주워 돌아왔다. 다시 한번 왼손으로 단검을 들고, 던진다. 이번에는 오른손으로 거리를 재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단검은 아까보다 더 힘차게 날아가 인형의 몸통에 정확히 꽂혔다. 어떻게 했는지는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올리비아는 뒤에서 손뼉을 치고 있었다.


“정정하지. 재능도 있고, 능력도 있기는 하군. 단검 두 개 정도는 벼려달라 해야겠어."


다시 긴 터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수도승은 기다렸다는 듯 슬그머니 다가와 에드윈에게 무어라 귀띔을 해 주고는, 다시 어딘가로 스르륵 걸어갔다.


“자네 방이 정해졌다는군. 자네 방은 317호일세. 참고로 내방은 213호이고, 올리비아와 험프티의 방은 426호. 4층에서 왼쪽으로 쭉 가면 보이는 곳은 성하의 집무실이네. 딱히 들어갈 일은 없을걸세. 오늘은 고생했어. 이만 들어가 쉬어도 좋네. 특별히 일이 생기면 내 자네 방으로 가지.”


에드윈은 세실의 손에 방 열쇠를 쥐여주었고, 각자는 별 다른 말 없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떠나갔다. 방에 도착한 세실은 침대에 몸을 맡겼다. 눈을 스르르 감으면서, 에드윈이 한 말을 되새겼다.


-똑똑똑


누군가가 세실의 방문을 작게 두드렸다. 다리와 팔은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세실을 말렸지만, 혹시라도 중요한 일이면 어쩌나 싶어 몸을 끌고가 문을 열었다.


“응?”


문 앞에는 작고 하얀 험프티가 있었다. 어찌한 일인가 싶어 물어보려 했으나, 세실은 험프티의 초롱 거리는 눈빛을 통해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 세실은 험프티를 방 안으로 들여주었다.


“무슨 일이야?”


“그, 그게. 심심하기도 하고, 헤헤, 궁금한 것도 있고 해서··· 세, 세실? 세실은 어디에서 태어났어?”


소녀에게는 조금 잔혹할지도 모르는 동화를 읊어준다. 세실은 일궈낸 업적도, 내세울 이야깃거리도 없었지만, 험프티는 하나하나를 모두 곱씹어가며 경청해주었다. 시간은 또 둘을 살해하고 지나갔다. 이야기의 끝에는 방안에 있는 둘이 있었다.


“그, 그렇구나. 세실은 조, 좋은 친구도 있었네. 하하··· 한스라··· 한스···”


옛 기억에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 이름이었으나, 세실은 단 한 순간도 그의 마지막 말을 잊을 수 없었다. 죽고 싶을 때면 항상 그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눈물을 흘리면 어느새 또 배가 고팠고, 그럴때면 도둑질을 하며 배를 채웠다. 지겨운 나날은 이제 끝이다.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는 못하나, 이제는 차라리 편안해지거나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세실은 기뻤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험프티가 훌쩍 그의 뒤로 다가갔다. 부드럽고 상냥하지만, 살짝은 서툰 손길로 세실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이, 이야기를 들려줬으니. 자, 잠시만···”


어찌 보면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듯 느껴지기는 험프티의 손. 하지만 그곳에는 상냥함이 있었다. 세실은 가만히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것을 즐겼다. 땋은 머리가 완성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이었다.


“자, 잘 때는 풀어야 해. 마음에 들면 다음에 어, 어떻게 묶는지도 가르쳐 줄게. 올리비아가 항상 내 머리로 장난쳐서··· 자기는 생머리가 어울려서 자기 머리로는 싫다고···”


마음에 들어. 라고 생각했다. 더 상냥하게 말해줄 방법이 없다는 것에 세실은 안타까웠다.


“...마음에 들어. 다음에 시간이 나면 가르쳐 줘.”


“헤···헤헤··· 그, 그럼 이만 가볼게. 나중에 같이 바, 밥 먹으러 가자.”


험프티는 나가면서 문을 조용히 닫았다. 세실은 땋여진 머리를 보며 한스에게 속죄하는 시간을 가졌다. 앞으로는 덜 기억하게 될 그를 위해서.




올리비아와 마그누스. 그리고 험프티는 세실을 찾아와 식사를 권했다. 같이 하는 식사라고 해도 그리 특별한 것은 없었다. 평범한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대부분은 세실을 위한 대화들이었다.


“··· 그렇게 된 거란 말이지. 그때는 이상한 명령을 받아서 북쪽 나라까지 걸어갔지 뭔가. 백작이 배를 몰 줄 알아 다행이었어. 아, 그리고 세실. 금요일과 토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는 미사라는 행사가 있는데, 그때는 방해하지 않게 주의해야 하네. 일요일에는 큰 행사인 교중미사가 있고. 뭐, 우리가 이곳에 오래 머무는 일 자체가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말이야.”


“네. 명심할게요.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혹 여쭤봐도 될지···”


“오, 뭐라도 물어보게. 성심껏 답해주지.”


“듣기로는 문양이 있는 사람에게는 각자 어떠한 능력이 있다는 것 같은데. 무슨 무슨 종류가 있나요?”


세실의 말에 마그누스는, 흐음 소리를 내며 손에 쥔 나이프를 만지작거렸다. 올리비아는 아무 말 없이 음식을 먹으며 간간히 이곳을 바라보았고, 험프티는 이리저리 흔드는 다리를 멈추고 물 한잔을 따라 꿀꺽꿀꺽 마셨다.


“문양이라고는 해도, 이게 있는 사람은 자네와 나, 올리비아밖에 없네. 나는 몸 여기저기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했고, 올리비아는 사람이나 동물 등이 어디 있는지 감지할 수 있게 되었지. 자네는 눈이 좋고 말이야. 에드윈 씨와 험프티는 일단 내가 아는 한 문양은 없어.”


“그렇군요. 그렇다면 각자 사용하시는 무기는 어떤가요? 알아두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아, 그래. 중요한 걸 말 안 했군. 나는 오후에 보여준 양손 검을 사용하네. 손도끼도 하나 들고 있고. 에드윈 씨는 바스타드 소드. 크기는 좀 작지만, 그것도 양손검일세. 험프티는 단검, 올리비아는 보는 대로 활이지. 활이라니, 요즘 시대에는 구식이지만. 하하하!”


잠자코 음식을 먹던 올리비아는 고요를 깨트리지 않은 채 오른 팔꿈치로 마그누스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마그누스는 그만 억 소리를 내며 장난이라는 듯 삐질삐질 웃어 보였다.


“흥, 나 덕분에 다들 위험에서 벗어난 적이 몇 번이나 되는데요. 그리고 모두 통틀어서 제가 가장-”


“그 화살은 빼야지.”


마그누스의 말에 올리비아는 움찔 몸을 경직시켰다. 입을 굳게 다물고 마그누스를 째려봤다. 마그누스는 애써 웃음소리를 더 크게 내어 상황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하하! 물론, 자네가 으뜸 공신인 것은 확실하네만. 역시 부작용이 있고, 금지당한 것도 맞지 않나? 하하하! 하하··· 하···”


아무것도 모르는 세실은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는 데 무리가 있었다.


“저기, 뭘 이야기 하시는건지···”


“별건 아니고.”


올리비아는 이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지러운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그것은, 화살이었다. 가죽으로 쓰인 촉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반짝였다. 하지만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빛을 머금은 뒤 바꾸어서 내보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신기하네요. 다른 화살이랑 다른 점이라도 있나요?”


“당연하지! 보이는 대로 완전 보물이거든. 이 화살에 맞으면 사냥꾼이건 무리건 한 번이야. 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도 있지. 에헴.”


올리비아는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쭉 폈다.


“그럼 마그누스가 말한 부작용은 뭔가요?”


“그게···”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포르토스에서의 밤을 떠올린다. 아픔에 겨워 한참을 헐떡였던 그 날 밤. 고통은 험프티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것과 비슷한 무언가였다. 화살이 왜 호숫가에 있었는지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화살은 올리비아와 떨어져 있었다. 잘 때까지 지니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허나 고통은 몇 시간이고 계속되어 해가 뜰 때쯤에서야 끝이 났다.


올리비아는 이 사실을 다른 일행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큰 힘 하나를 제약당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고통과 싸우며 화살을 사용한 지 네 번째, 올리비아는 한밤을 달리는 마차 안에서 피를 토하고 말았다. 그 뒤 에드윈은 자신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화살을 사용하지 말 것을 올리비아와 약속했다. 다음 화살을 쏠 때면, 그날 밤 화살은 올리비아의 목숨을 앗아가리라.




“··· 그냥 좀 아플 뿐이야. 그래서 웬만해서는 안 써.”


그녀는 다시 화살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역시 화살은 받는 빛을 잃자 덩달아 빛을 잃었다.


“다 먹었으면 이제 일어나세나. 남는 시간은 개인 시간 이라네. 따로 체력 단련을 해도 좋고, 아니면 잠을 자도 괜찮지. 하지만 문은 잠가놓지 말게. 한밤중에 불릴 수도 있거든.”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그누스와 올리비아, 험프티는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세실은 조용히 1층 터널을 향해 걸었다. 훈련장이라 불리는 넓은 평야에는 아무도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만이 존재할 뿐이다. 고정된 횃불에 불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고, 보아놓았던 창고에서 망고슈라 적혀있는 단검을 하나 꺼내왔다. 드넓은 어둠 속 미미한 불꽃 옆은 무언가를 던지는 데 있어 훌륭한 장소였다.


세실이 내는 작은 소리는 어둠을 향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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