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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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po
작품등록일 :
2018.06.28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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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는 이야기 - 열네번째 죄책감 (5)

DUMMY

"개인적인 가족사까지 다 알려줄 수는 없네만, 스텐이라는 이름은 버렸네. 지금 내 목적은 얼터 공작을 막는 것 뿐이지."


에드윈은 시작부터 마무리까지를, 마치 방망이를 깎는 노인처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각기 다른 오묘한 표정을 지었고, 잠깐 동안은 어떠한 상의도 나누지 않았다. 에드윈은 그들을 위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작은 사자상 하나를 탁자 위로 옮기고, 그 위에 손을 얹은 후 창밖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문을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에드윈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앨리스인가? 괜찮으니 들어와라.”


앨리스라고 불리는 검은 머리의 소녀는 작은 발걸음으로 에드윈에게 다가갔다. 검은 머리칼은 윤기와 함께 아름답게 빛났고, 발걸음은 정확했다. 눈에는 신의가, 손에는 정의가, 마음은 용기로 가득 찬 소녀는 다만 인간의 자식이었다. 그녀는 에드윈의 옆에 멈춰섰다. 그러나 에드윈은 옆을 바라보지 않았다. 소녀는 그런 에드윈에게 안부를 물었다.


“오빠, 괜찮아?”


“그래. 괜찮다. 다른 이들은 뭘 하고 있지?”


“쉬고 있어. 그래도 괜찮아 보여.”


에드윈은 사자상에 올려둔 손을 찬찬히 떼고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소녀는 그것을 만끽했다.


“힘들 텐데. 여러 인간이 죽었다. 유능했고, 소중했지. 비록 그들에게는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야.”


“알아. 나도 같은 인간이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난 짐승의 자식이다. 그래서인지 앨리스, 가끔은 네가 부러워.”


소녀는 머리 위에 올려진 큼지막한 손을 상냥하게 떼어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다시 사자상 위에 올려놓은 뒤, 조용히 에드윈의 뒤로 이동했다.


“나는 내가 싫어. 결국은 짐승이 되어버린 내가 너무나도 미워.”


그러고는 에드윈의 등 뒤를 포근하게 감쌌다. 소녀는 얼굴을 가져다 대고, 혈연의 교감을 시도했다. 그렇게 다른 피를 가진 둘은 하나로 이어졌다. 피가 이어지지 않은 남매는 그저 희생자일 뿐이었다. 에드윈은 그녀가 자리를 뜰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온기가 식어갈 때, 뒤를 돌아 작고 하얀 소녀를 바라보았다. 험프티는 아름답게 흐트러져 웃고 있었다. 에드윈은 따라 미소를 지었다.


“추했지.”


“추했어.”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앨리스 폰 레이시스. 50년이라는 혹독한 세월에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렸으나, 끝끝내 믿어온 사람을 찾아온, 사랑스러운 여동생. 지키지 못했던 존재였기 때문에 너무나도 많은 죄악을 삼켜버린 한 마리의 괴물. 에드윈은 이제 그녀를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가오는 종말과 그녀 자신을 삼켜버리는 어둠에서 그녀를 구해 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강렬한 열의를 품고 있자, 그녀는 까치발을 들어 에드윈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리고 비장한 눈으로 무기고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 거야?"


에드윈은 그녀의 질문에, 자신이 확실하게 만들어 놓은 수많은 무기들. 그들의 아버지를 막아낼 무기를 내어 보였다. 그것은 원인을 죽여버리는 두려운 검이었다.


"신을 죽일 거다."


그의 목소리는 험프티에게 확실히 전해졌다.




방에 남은 올리비아와 마그누스는 아무 말 없이 평소처럼 늘어져 있었으나, 세실은 달랐다. 안절부절못하고 주변을 맴돌기도 하고, 어떤 질문을 꺼낼까 말까 하다가 싱겁게 관두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올리비아는 그런 세실에게 느긋하게 말했다.


"세실. 자리에 좀 앉아. 움직이는 건 다리지 머리가 아니잖아?"


세실은 그런 태평한 말을 건네는 올리비아를 얼이 빠진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의문문으로, 아주 살짝은 분노도 섞어 넣은 말을 전했다.


"올리비아. 올리비아는 황당하지 않아요? 계속해서 문양의 힘을 빌리면 2년 뒤에 불구가 될 거래요. 그리고 뜬금없이 그 전에 종말이 찾아오는데, 심지어는 그 사건을 일으키는 게 단장님의 아버지예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안 되지! 나는 그 꼴 나는 거 못 봐. 죽기도 싫고."


세실은 반쯤 포기했다. 심지어는 이런 둘과 한 계절을 보낸 자신이 조금은 자랑스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세실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올리비아랑 마그누스 씨는 어쩌려고요? 가만히 있을 거예요?"


그의 말에 마그누스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 팔을 등받이에 걸친 세상 편한 자세를 고쳐먹었다. 그는 세실에게 걱정 말라는 듯 얼굴을 지으며 한소리 했다.


"아니, 세실. 생각해보게. 에드윈 씨가 그런 걸 왜 이야기했겠나? 그냥 알아놓고 가만있다 죽으라고 말한 건 아닐 테고, 다 방법이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어."


"그러면 그 방법이 뭔데요?"


"글쎄. 그건 에드윈 씨만 알겠지."


마그누스는 그러고선 다시 편한 자세를 취했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사냥꾼은 없고, 무리만 나온다 했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무리 토벌은 군만으로도 충분하니 2년 동안 쉴 일만 남았지. 마그누스는 뭐 할거예요?"


"나는 캠프에 가려 그러네. 잠깐, 이제 곧 5년 다 돼가지 않나? 자네도 레이첼 만나러 가야지?"


"아직 반년 넘게 남지 않았어요?"


"반올림하게나."


"마그누스. 그래도 5년 안 돼요."


세실은 만담을 나누는 둘에게 지쳐버렸다. 그는, 기다란 의자 위에 털썩 주저 앉고는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올리비아는 이야기를 그만두고 세실에게 물었다.


"세실. 너는 뭐 할래?"


세실은 고민했다. 사냥꾼은 모두 죽었다. 타나토스의 절반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니 그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세실은 누운 채로 연신 도리질을 해대며,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타나토스의 반, 사냥꾼의 죽음. 남은 나머지는 하나뿐. 세실은 옳거니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올리비아의 질문에 답했다


"무리를 잡으러 갈래요. 바일 산도 올라갈 겸요."


올리비아는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질렸다는 표정도 함께 말이다.


"그래. 그것도 좋겠네."


어쩐지 태평한 분위기에 잡아먹힌 셋이었다. 에드윈이라는 존재에 어쩐지 모르게 안심한 그들은 이런저런 수다를 나눴다. 잠시 뒤 에드윈과 험프티가 문을 열고 찾아왔고, 에드윈은 세실이 방랑자가 된 이래 처음으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조금은 힘들어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태평하다니. 사냥꾼을 너무 많이 죽여서인지 자네들도 현인 다됐군.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는 정했는가?"


올리비아는 바티칸에 남겠다고 청했다. 마그누스는 다우네른에 캠프로 가겠다 말했고, 에드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은 어프렌스로 가겠다고 일렀다.


"무리 사냥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군. 참, 성하를 뵙고 왔네. 자유령을 내리시더군. 그 말 즉슨, 이곳을 떠나는 자네들은 이제 방랑자가 아니라는 뜻이야."


에드윈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세실은 미소에 압사당할 뻔했으나, 애써 그 무게를 기분 탓으로 돌렸다. 에드윈이 말을 이었다.


"마그누스, 세실. 반가웠네. 잘 가게나."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방을 나서버렸다. 그리고 마그누스와 세실 둘이 사크라토론을 떠날 때까지, 그 누구도 에드윈을 보지 못했다. 마그누스는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여전히 어색한 병사들과 잡담을 주고받았다. 그는 그렇게 있다가 홀연히 게르를 몰고 사라졌다. 다 낫지 않은 손을 가지고 바티칸을 떠났다.


세실은 올리비아에게 금화 다섯 개와 시민권을 받은 뒤 자신이 떠날 곳을 찾기 시작했다. 몇 일간 지도를 보고 올리비아와 이런저런 조언을 나눈 결과, 그는 포르토스에 가서 군에 들어갈 것을 첫 목표로 삼았다. 올리비아는 바올 백작에게 전해주라며 편지를 하나 건넸고, 세실은 고맙다 인사를 전하고는 바티칸을 떠났다. 그렇게 바티칸에는 다섯 명의 기사만이 남게 되었다.




안에서 울리는 소리를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방 안, 제목조차 없는 수많은 책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방 안에서, 여섯 번째 기사 알버트 랭은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등을 보여 반가움을 표했다.


“훗날을 기약하니 만날 날이 오기는 또 오는군요. 반갑습니다. 반신.”


알버트 랭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쓰던 책을 툭 덮었다. 뒤를 흘깃 보고는, 다시 입을 연다.


“당신이 어찌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해결해야 할 때가 된것이겠죠.”


그를 찾아온 조가비는 가면을 벗어 보였다. 알버트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고, 그날을 시작으로 밤은 제철의 과일처럼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기사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빛나는 방에서, 가만히 앉아 자신을 비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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