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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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EORANG
작품등록일 :
2018.07.02 19:16
최근연재일 :
2019.07.0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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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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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글자수 :
186,662

작성
19.01.07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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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21. 흔한 만화 속 주인공

DUMMY

#21. 흔한 만화 속 주인공


30분 전 이야기.


술을 마시던 선호는 화장실로 향했다. 굳건히도 닫혀 있는 건물들 사이를 몇 개쯤 오갔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미 얼큰하게 오른 술기운은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별안간 1학년 때도 하지 않았던 학교 투어를 하게 되어 선호는 유감이었다.


‘무슨 축제한다면서 다 잠가놨어.’


속으로 열백 번쯤 욕지거리를 삼키며 바쁘게 두 발을 움직이던 중이었다.


“야. 너도 화장실 찾아?”


익숙한 목소리가 선호의 발길을 붙들었다. 고개를 돌렸다. 주황빛 조명 아래에 선 구양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짧고도 길었던 두 사이에 긴장감은 자연스레 흩어지던 중이었다. 구양이 선호를 부르는데 별다른 망설임이 없었으니까.


“어. 건물들마다 다 잠겨있네.”


선호가 장대 같은 뻣뻣하고 기다란 다리로 세 걸음 만에 구양의 앞에 섰다. 허탈한 웃음은 덤이었다. 선호의 얼굴에는 취기가 가득했다. 한밤중 학교 안, 축제로 복작한 소음들, 바람에 힘없이 흩날리는 가을 이파리들이 그들의 배경이었다. 구양은 문득 제법 괜찮은 만화 속 한 장면에 선호와 주인공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한참 돌아다녔어. 아직도 찾는 중.”


그렇게 또다시 문득 당장이라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선호를 가득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본능적이고도 지울 수 없는 강렬한 종류의 감정이었다. 당장이라도 선을 이을 펜과 종이가 손에 없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같이 찾을까?”


어느새 선호의 요의는 고개를 숨겼다. 번잡하게 모인 사람들 덕에 두 사람은 평소보다 좁은 거리를 두고 걸었다. 슬쩍슬쩍 스치는 팔과 옷가지가 선호는 신경 쓰였다. 두꺼운 옷에도 뜨겁게 달아오르는 팔의 체온을 구양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잠깐.”


민망할 정도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선호가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아이고!”


결국 선호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짧은 다리로 바삐 걷던 구양이 따라오지 못하고 구수한 소리를 내며 삐끗했다. 순간 중심을 잃고 무게가 한쪽으로 쏠림을 느꼈다. 구양은 눈앞에 보이는 선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괜찮아?”


2초 정도 흔들거리던 몸이 결국 바닥에 추락하기 전이었다. 선호가 제법 능숙한 폼으로 구양의 허리를 잡아챘다. 선호는 중지와 약지만으로 구양의 몸을 지탱했다. 서로 닿는 부위를 줄이기 위한 제 나름의 배려였지만 구양은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 이미 가까울 대로 가까워진 얼굴 간격만으로도 신경이 쏠려버렸기 때문이다. 두근두근. 심장소리와. 하아. 내뱉는 숨소리까지. 노골적으로 두 사람의 감각기관을 타고 서로의 것이 마구잡이로 섞였다.


“어. 괜찮아. 미안.”


구양이 풀려버린 다리에 힘을 주고 자연스럽게 선호의 품을 벗어났다. 다시 몸을 일으키기까지 구양의 몸짓은 자연스러웠지만 둘 사이는 자연스러움을 잃었다.


“......”

“......”


침묵은 길었다. 짧은 접촉이었지만 그 사이에 나눈 감정은 결코 짧게 추스를 수 없었다.


“화장실 찾아야지.”


눈알을 위와 아래, 좌와 우로 굴리던 구양이 어색함을 뚫고 말을 꺼냈다.


“그럴까? 가자.”


화장실을 찾는 것은 더 이상 둘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구양아.”


평소보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선호가 구양을 불렀다.


“어. 왜.”


퉁명스럽게 받아쳤지만 구양은 그의 목소리에 설레고 있었다. 이제 선호를 만날 때 구양을 차지하는 가장 큰 감정은 설렘이었다. 선호의 작은 몸짓이, 일상 같은 무심함이 그리고 구양을 부르는 목소리까지 선호를 이루는 모든 것이 구양의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격하게 울렁이는 매 순간 덕에 선호에 대한 멀미가 생길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저번에 한 말 내가 많이 생각해봤어.”

“무슨 말?”


구양은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있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선호가 둘 사이의 작은 다툼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집고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진로 고민 얘기했을 때 내가 너무 쉽게 얘기했던 것 같아.”


선호의 진지한 고백에 구양은 순간 다시 그날의 감정이 몰려와 어지러웠다. 언제 생각해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주제였다.


“아니야. 그냥 현실적인 말이었지.”


아무리 힘든 주제라 해도 더 이상 선호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위로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미안해. 네 고민이 가볍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


‘사람 미안하게 만들어.’


구양은 혼자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라도 읽은 것인지 듣고 싶은 말을 골라 해주는 선호가 너무 예뻐 보였다.


“나도 미안해. 나는 내가 자신이 없어서 그랬던 거야.”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지극히 옳은 말에 화가 난 것은 결국 구양 스스로에 대한 문제였다.


“구양이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구양이 걸음을 멈추고 선호를 바라보았다.


“나 꿈 포기 안 하려고. 그림 그릴 거야. 계속. 그러고 싶어졌어. 네 덕에.”


지금 구양의 마음은 벅차오르고 있었다. 선호를 가득 자신의 세계에 그려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부터 계속 말이다. 애초에 포기하고 말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비추는 선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삶에 들어온 모든 것이 내 이야기가 될 거야.’


선호는 그것을 깨닫게 해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래. 멋있네. 나는 네가 무슨 선택해도 응원할게.”


선호가 활짝 웃었다. 그것은 진심만이 가득 담긴 웃음이었기에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구양은 여전히 폭 파인 그의 보조개가 귀엽다 느껴졌다. 마음의 방향을 정하고 나니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보이지 않는 광활한 광야에서 나설 길을 만든 기분이었다. 캄캄한 장막이 걷혔을 때 보이는 것이 결코 꽃밭은 아닐지라도 그곳이 구양이 살아갈 자리였다.


“이제 갈까? 애들 기다리겠다.”

“화장실부터 가자.”

“아. 맞다.”


긴장의 맥이 탁 풀린 둘은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킥킥거렸다.


“드디어 찾았네.”


그러고도 한참을 발걸음을 맞춰서야 결국 열려있는 화장실을 찾았다.


“먼저 가지 말고. 구선호. 알았지!”


화장실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던 구양이 뒤를 돌아 말했다. 그녀는 검지를 선호의 코에 가볍게 가져다 댔다 뗐다. 계단 세 칸의 차이가 두 사람의 시선을 맞춰주었다.


“당연하지.”


선호는 가볍게 웃으며 구양의 손가락을 잡아 내렸다. 약속 아닌 약속을 하고 선호는 화장실에 들어섰다. 선호는 화장실 거울 속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이 못생겨 보였다. 술기운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도, 며칠 잠을 설쳐 볼가에 도돌도돌 올라온 트러블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는 왜 이래.’


손으로 머리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다잡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결국 달라질 것 없는 모습에 실망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미안. 가자.”


왁자지껄한 학교 안 분위기가 묘하게 두 사람을 들뜨게 했다.


“아. 우리 너무 오래 자리 비운 거 같은데 아이스크림이라도 사갈까?”

“그럴까?”

“애들 또 같이 들어가면 장난 아니게 놀리니까 내가 먼저 들어갈게. 알았지?”


구양이 코를 찡긋했다.


“그래.”


선호는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진우와 민준, 청아의 반응에 순순히 수긍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짧은 데이트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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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33. 사실 다 오해야. 19.05.13 32 0 14쪽
32 #32. 그러나 그랬다. 19.05.06 38 0 12쪽
31 #31.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19.04.15 46 0 13쪽
30 #30. 그날, 별안간 로맨스 19.04.01 5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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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흔한 만화 속 주인공 19.01.07 57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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