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와 총잡이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아이덴타워
작품등록일 :
2018.07.15 19:51
최근연재일 :
2023.07.24 23:35
연재수 :
245 회
조회수 :
30,188
추천수 :
1,386
글자수 :
1,817,375

작성
19.10.23 23:25
조회
91
추천
6
글자
26쪽

100회 - 우리가 고르는 운명

DUMMY

레스와 자신의 팔에 꽂혀 있는 주삿바늘을 뽑고 캘러헬이 말했다.




“수혈은 이 정도만 하지. 라카키가 여기 있는 한 갑자기 죽진 않을 거야.”




“라카키? 페어리 씨의 이름인가요?”




아자리의 말에 대답하듯 페어리가 한쪽 팔을 휙휙 흔들었다. 캘러헬이 지혈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카키는 그 뒤를 쫓았다. 여자들한테 담요가 저절로 날아왔다.




“먹을 거 가져올게. 화장실은 저쪽에 있어.”




두 사람은 어디로 향하고 나서 보이지 않았다. 샤카자이아가 자기 몸에 담요를 두르며 소곤거렸다.




“정령을 보는 건 처음이야.”




레스가 눈알만 굴려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페어리는 엘프들의 친구라고 들었는데.”




“추장님조차 젊었을 때 이후로는 본 적이 없다고 하셨어. 정령은 낯가림이 심하고 있는 그대로의 환경을 좋아하는데 세상이 달라져서 거의 사라진 거 같대.”




아자리가 게슴츠레 그를 노려보았다.




“댁은 어떻게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입을 멈추지 않죠.”




“너는 어때. 전에 본 적 있어?”




“저도 처음 봐요. 페어리는 사진에도 안 찍혀요. 자기가 원할 때만 모습을 드러내죠. 분명 전차에서 만났을 때도 근처에 있었겠군요.”




“너하고 파스낙도 눈치 못 챘다면 실력이 대단한가 보네.”




아자리는 자신의 고깔모자에 진 주름을 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저들은 존재 자체가 마법이에요. 제약이 붙어 있지만.”




“제약?”




샤카자이아가 말을 받았다.




“페어리는 다른 존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자신들끼리 규칙을 정했어요. 사람은 물론이고 무생물도 포함해서. 어기면 자신들이 태어났던 차원으로부터 쫓겨난대요. 그 점을 빼면 페어리들이 다룰 수 있는 마법의 수준은 저나 파스낙이 쓰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요. 학교에서 배운 거라 어떻게 대단한지는 잘 모르지만요.”




“그럼 라카키 씨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캘러헬 씨랑 같이 다니는 건가?”




“아뇨. 그들의 강함은 차원을 넘나드는 권한으로부터 나와요. 추방당하면 힘도 잃어버리죠. 이건 오래전부터 검증된 사실이에요.”




레스가 다시 끼어들었다.




“난 아직도 헷갈리는데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지 못한다’라는 기준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야? 싸움을 돕는 것도 간접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짓일 텐데.”




“난들 알겠어요. 이건 제 생각인데 라카키 씨가 직접 말하는 대신 글자로 의사 표현을 하는 거랑도 관련이 있을 거예요. 대화만 했는데도 다른 사람이 불쾌했다고 느껴서 규칙 위반이 된다고 상상해봐요. 라카키 씨는 살기 위해 입을 닫은 거예요.”




“너무 불쌍하다! 자기 마음대로 목소리도 못 낸다니!”




샤카자이아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지만 레스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보기엔 그냥 괴짜라서 그런 거 같은데.”




캘러헬과 라카키가 돌아왔다. 그가 쟁반에 담아온 음식들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콘플레이크하고 생강차야. 배고플 텐데 이거밖에 없어서 미안해. 원래 일이 끝나면 장을 보는데 오늘은 갈 틈이 없었어.”




샤카자이아는 그릇에 담긴 콘플레이크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숟갈로 뒤적거렸다. 음식을 낯설어하는 그녀에게 캘러헬이 말을 걸었다.




“와시추가 만든 거지만 먹을 만해. 오트밀보다 맛있어.”




레스는 음식을 받지 않고 계속 누워 있었다. 아자리가 그에게 물었다.




“안 먹어요?”




“속이 안 좋아. 먹자마자 토할 거 같아.”




먹여준다고 해도 먹을 수가 없는 모양이니 그의 몫은 일단 캘러헬이 받았다. 일행들은 뭔가 먹고 나서야 곤두섰던 신경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생강차에는 꿀이 듬뿍 들어있었다. 캘러헬은 우유를 한 숟갈 떠서 새끼 새에게 모이를 주듯 라카키에게 먹여주었다.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 너희들은 어쩌다가 이 판에 끼어들었니?”




아자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지긋할 정도로 기나긴 하루였다. 설명하기 복잡도 하거니와 다른 사람에게 쉬이 털어놓을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들 말없이 밥만 먹었다. 분위기와 일행들의 표정을 읽고 캘러헬은 사정을 대강 짐작했다.




“말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죄송해요. 그래도 가능한 저희하고 엮이지 않는 편이 좋아요.”




그가 살짝 웃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둬. 해가 뜰 때쯤에는 어떻게 될지 또 모르니까.”




계속 찻잔을 노려보면서 얼굴에 김을 쬐던 샤카자이아가 고개를 들었다.




“실은 여태껏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언제 말을 꺼내나 싶었다. 마토아카의 딸.”




캘러헬은 자기 앞에 있던 그릇을 옆으로 치우고 팔꿈치를 무릎에 대었다. 샤카자이아는 뜸을 들여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언제 보셨나요?”




“10년 전에. 너희 마을을 떠나고 곧바로 여길 지나갔어.”




아자리하고 레스도 숨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샤카자이아가 다음 질문을 고르기도 전에 캘러헬이 연달아서 말했다.




“무슨 사정으로 마토아카가 널 내버려 두고 간 건지는 나도 잘 몰라. 나도 계속 물어봤지만 끝까지 대답을 피했거든. 가능한 한 엮이지 않는 편이 좋다고만 했어. 지금 너희들처럼.”




아자리가 말했다.




“여러분들은 무슨 관계였나요?”




그가 관자놀이를 손으로 두드리면서 말했다.




“그냥 아는 사이. 레오는 한때 부족의 정찰병이었고 마토아카도 비슷한 일을 했으니 마주치는 일이 많아서 자연스레 친해졌지. 나하고 마토아카는 엄밀히 말하면 친구의 친구야.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면 레오도 만나봐.”




샤카자이아가 조바심을 내면서 급히 물었다.




“다른 건 없나요? 어디로 갈 건지는 말하지 않았나요?”




“전혀. 미안하다.”




샤카자이아는 실망을 참지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레스하고 아자리도 덩달아 기분이 우울해졌다. 캘러헬은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는 표정만 지었다. 샤카자이아가 코를 훌쩍거렸을 때 팔짱을 끼고 생각에 빠져있던 라카키가 캘러헬의 귓가에 대고 뭐라 속삭였다. 잠시 뒤에 캘러헬이 자기 얼굴에 손을 대며 오만상을 쓰며 집중했다.




“기다려봐. 워낙 오래전 일이라 빼먹은 게 있었어.”




아자리가 물었다.




“뭔가 떠올랐나요?”




“신전, 유적, 폐허처럼 오래된 장소에 대해 아주 집요하게 물어봤었어. 난 한때 모험가였으니까 그런 곳은 빠삭했거든.”




레스가 중얼거렸다.




“폐광촌의 그 유적···.”
















새벽이 깊어지자 바람이 한결 더 싸늘하였다. 타티아나는 하딘과 같이 말을 타고 있었다. 거리에는 가로등은커녕 건물 그림자 때문에 달빛조차 거의 없어 눈앞이 먹물처럼 컴컴했다. 타티아나는 귀를 쫑긋거리고 반사적으로 외쳤다.




“뒤에 누군가 있어요!”




하딘은 타고 있는 말의 배를 걷어차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타티아나도 같이 몸을 수그리자 그가 중절식 권총을 뽑아서 나타나는 놈들에게 쏘았다. 말을 탄 채 쫓고 쫓기는 사람들이 총을 쏠 때마다 창백한 그림이 한 장씩 풍경에 찍혔다.




총성을 듣고 온 자동차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자동차가 이쪽을 향해서 도로를 막았는데도 하딘은 멈추지 않고 레버 액션 소총을 꺼냈다. 그는 한 손만으로 소총을 꼬나쥐고 돌진해오는 자동차의 운전석을 향해 쐈다. 운전기사가 총에 맞는 순간 페달을 밟고 있던 발이 떨어져서 속도가 줄었다. 그 틈에 하딘은 순식간에 스핀 로딩을 하면서 앞에 보이는 타이어까지 쏴버렸다.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말은 거의 멈추다시피 한 자동차의 앞부분을 짓밟고 지붕을 타서 건너편으로 뛰어넘었다. 곡마단에서도 못 볼 묘기를 체험하느라 둘은 몸이 크게 들썩였다.




“굉장하네요!”




타티아나의 칭찬을 흘려넘기고 하딘은 하던 일에나 집중했다. 묘하게도 추격자들은 더 나타나지 않았다. 긴장은 끝까지 풀지 않았으나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없으니 하딘도 말을 모는 속력을 줄이고 숨을 돌렸다.




“이상한데. 너무 빨리 포기하잖아.”




“끝까지 목숨 걸고 싸울 각오 따위 놈들한테는 없어요.”




“뭐였던 간에 우리한텐 다행이군.”




큰 도로에도 매복하는 적은 없었다. 도시를 뒤숭숭하게 만들던 그 많은 적은 버리고 간 쓰레기 따위의 흔적만 남겼을 뿐 이젠 없는 모양이다. 전술적인 판단으로 정비를 위해 후퇴를 한 건지, 아니면 그저 사기가 바닥나서 꽁무니를 뺀 건지 모르겠으나 희망이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오늘 밤은 드디어 조용해진 거 같군. 지겨운 하루였어.”




타티아나가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사람들이 제 말을 믿어줘야 할 텐데요.”




“내 말은 믿을 거야.”




하딘은 다시 속력을 올렸다.
















깜빡 졸았던 레스는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그의 눈 바로 앞에 깃털로 장식된 무언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계속 노려보다가 그게 꿈 덫이라고 불리는 공예품임을 레스는 기억해냈다. 눈알만 굴려서 옆을 보니 아자리가 꿈 덫이 매달려 있는 낚싯대를 그의 머리맡에 세우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기운이 없던 레스는 억양이 완전히 사라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당신한테 필요해 보여서요.”




“내가 박식한 편은 아니지만. 이런 용도는 절대 아니라고 확신해.”




깃털 달린 물건이 코앞에서 흔들리고 있으니 정신 사나웠다. 꿈 덫이 일종의 조준기 역할이라도 한 건지 그 사이로 엿보이는 천장의 나무무늬가 잘 보였다. 아자리가 낚싯대의 휠을 감자 꿈 덫이 위로 올라갔다.




“이 은신처는 캘러헬 씨하고 친구들밖에 모른대요. 아침까지는 푹 쉬어도 될 거 같아요.”




“꿈 덫은 어디서 가져온 거야.”




“캘러헬 씨가 언니의 엄마한테서 선물 받았던 거래요.”




아자리는 쪼그리고 소피의 팔걸이에 머리를 기댔다. 쉬고 싶은 거라면 더 좋은 방법도 많을 텐데 굳이 여기 있다는 건 자기한테 용무가 있다는 거겠지. 그래서 레스는 말을 걸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고 있어?”




“고민하고 있었어요.”




“무슨 고민?”




“고민을 말할지 말지 결정하는 고민.”




레스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묵혀둔 마음은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만 해도 기분이 나아져.”




아자리의 표정은 햇빛을 반사하는 얼음 같았다. 투명하고, 차갑고, 서서히 사라져가는 듯이 서글펐다. 그녀는 무릎을 가슴에 대고 양팔로 눈가를 감쌌다.




“파스낙이 저한테 여러 가지 환상을 보여줬었어요. 목이 매달린 엄마랑 아빠, 학살당한 황무지의 원주민들과 불타버린 마을, 그리고 당신이 배신하는 모습.”




“그랬군.”




“전 제가 독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그 광경을 떨쳐내지 못하겠어요. 여기까지 해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당신하고 언니 덕분이에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있었지.”




“제가 정말 당신들의 친구가 맞을까요? 전 그저 당신과 언니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존재가 아닌가요? 파스낙에게 싸움을 걸자고 먼저 제안했으면서 결국 저 혼자서는 그 녀석한테 당하기만 했고요.”




“우리가 가지 않았더라도 녀석이 우리를 찾아왔을 거야. 피할 길이 없었던 건 알잖아.”




“알아요. 알고는 있어요. 그런데···.”




레스는 아자리가 매인 목을 가다듬을 때까지 기다렸다.




“전 당신이 너무 걱정돼요. 모든 일이 잘된다 치면 전 가족을 되찾을 거고, 언니는 어머니의 행방을 알아내고 부족이 이주할 땅도 볼 수 있겠죠. 하지만 당신에게 남는 건 뭐죠?”




“내 명분은 충분히 말해주지 않았던가.”




“파스낙이 보여줬어요. 유목민들의 땅에 석유가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다고. 사실인가요?”




“대체 그 자식이 뭘 보여줬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맞아. 잔뜩 있지.”




“이런 말을 하긴 정말 싫지만. 당신의 민족은 구원받을 수 없어요. 그 어떤 영웅이나 위대한 왕도 시대의 조류를 바꿀 수는 없어요.”




“굳이 말 안 해도 알아. 우린 파멸하겠지.”




돌 부딪히는 소리가 사람의 말로 바뀐 듯 덤덤히 그는 토로했다. 레스는 나직하게 자신의 말을 이었다.




“끝없는 사막화 때문에 가축에게 풀을 먹일 곳이 줄고 있어. 영역 때문에 부족들끼리는 쉬지 않고 싸워대고. 몇 안 되는 밥벌이는 교역인데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말해봐야 입 아프지. 전통을 포기하고 문명으로 향하는 젊은이도 이미 많아. 네 말대로 변화는 이길 수 없어.”




“레스···.”




“혹시 그것들이 네 책임으로 느껴진다면 넌 진짜 멍청한 거야. 마왕이 돼서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생각일랑 집어치워.”




“대체 무엇이 당신을 지탱하는 거죠?”




“옴니아 무탄타르 니힐 인헤리트.”




“네?”




난생처음 듣는 말에 아자리는 당황했다. 레스는 ‘아차’하고 둘러댔다.




“잊어버려. 이야기를 조금 돌려서. 피카니 머리에 화분을 떨어트렸던 날 기억해? 네가 나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도?”




그녀는 소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요?”




“고스란히 돌려주지. 네가 세상을 구할 필요는 없어. 세상이 우릴 구해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내 운명은 내가 골랐어. 난 이제 입 다물고 잘 거니까 너도 어서 쉬어.”




아자리는 멍하니 있다가 지나간 기억들, 그리고 온갖 감정들이 복받쳐서 속으로부터 무언가가 왈칵하고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행여 흐느끼거나 우는 소리라도 냈다간 자신의 친구가 또 걱정할까 봐 아자리는 양손으로 코와 입을 감쌌다. 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빨개진 눈가를 소매로 쓱 닦고는 조용히 일어났다.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다가 그녀는 레스의 몸에 덮여있는 담요를 위로 올려주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레스는 한 사람의 기척이 저편으로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또 다른 인기척이 다가오는 걸 느꼈다. 성인 남자의 발소리였다. 레스는 눈을 감은 채 자기 근처로 온 캘러헬에게 말했다.




“나 피곤한데요.”




“난처한 화제였는데도 잘 마무리했군. 추억이 보통 각별한 사이가 아니면 못 할 일이지.”




“사실 오래된 사이는 아니에요. 겪은 일들이 굵직해서 그렇지.”




“어차피 진통제 없이 견디느라 잠도 못 자잖아. 시늉은 그만해.”




레스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눈을 뜨고 저쪽을 보니 캘러헬이 다리를 꼬고 탁자에 앉아있었고 라카키는 어느새 자기 옆에 앉아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볼일입니까.”




“직접 마주 보고 얘기하고 싶었어. 자넨 강해. 저 아가씨들이 믿고 따를만하군.”




“아니, 전 쟤네들한테 신세만 지는데요.”




“깃발을 들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봤어. 뛰어내리는 순간에 둘 중 하나가 겁을 먹어서 합이 안 맞았으면 균형이 틀어져서 곤두박질쳤겠지. 하지만 샤카자이아는 자넬 믿고 같이 뛰었어. 의지할 수 있는 사내라는 걸 아니까.”




레스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땐 뵈는 게 없었으니까 그랬겠죠. 저도 뭐 좀 물어봐도 됩니까?”




캘러헬은 끄덕였다.




“왜 차장이에요? 위장 신분이었다는 건 아는데 하필 왜?”




“철도는 남자의 로망이니까.”




라카키가 말했다. 목소리가 방금 만든 피리로 연주한 노래 같았다. 변성기가 아직 지나지 않은 소년의 것 같았는데 여자아이처럼도 느껴졌다. 레스는 캘러헬을 노려보았다.




“진심입니까?”




“전차 좋잖아?”




“뭐, 새삼 놀랄 일도 아닌가. 바게트 빵으로 총 든 사람도 죽여대는데.”




“피만 묻은 거지 죽인 거 아냐. 하여튼, 전차는 도시에서 가장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잖아. 라카키가 도와주니까 제일 대담한 위장 신분을 골라봤지. 나도 시험 삼아서 해본 건데 결국 안 들키더라고.”




라카키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바게트 빵으로 사람을 죽이는 건 물리적으로 특이한 일이 아니야. 탐은 와일드번치를 소탕했을 때 건빵으로 저격도 막았어.”




캘러헬이 입술에 손을 대고 쉿 하는 소리를 냈다.




“끼어들지 마. 떽이에요 떽.”




레스는 어떻게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몰라서 시험 삼아 오른손이나 움직였다. 손은 말을 듣기는 했으나 갓 부러졌을 때만큼이나 아픔이 전류처럼 뼛속까지 흘렀다. 캘러헬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급하게 말했다.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뼈하고 근육은 억지로 제자리를 찾았지만 신경계는 엉망이야. 손만이 아니라 온몸이 다 그렇지. 보통 그만한 부상을 회복하려면 한 달은 걸려.”




라카키가 붕대와 막대기를 가져오자 캘러헬이 레스에게 부목을 해주었다. 일단 붕대가 감기고 나니 아픈 게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저희에게 정말 잘해주시는군요. 심지어 전 수배범인데.”




“같은 적을 둔 입장이기도 하고. 친구의 딸까지 나타났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게다가 레오도 구해줬고. 라카키가 파장으로 느꼈대. 파스낙이 갖고 있던 계약서가 파기돼서 레오한테 걸려있던 저주가 풀렸어.”




“아. 그때 일어났던 영문 모를 기운이 그거였나.”




캘러헬이 작게 웃었다.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줄게. 탄약도 원하는 만큼 써. 난 자네들이 좋아. 그리고 언젠가 살길이 막막해져서 방황할 거 같다면 탐정이 되는 것도 생각해봐.”




“그건 어려워요. 영영 쫓기는 신세인지라.”




캘러헬은 꺼내려던 말을 삼켰다. 방금 들은 말이 의미심장했다.




“영영 쫓긴다고?”




“지금 저한테 걸린 수배하고는 다른 얘깁니다. 제가 부족으로부터 추방당한 거랑 관계있는 거예요. 사연이 깊어서 친구들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알았네.”




둘은 한 차례 뜸을 들이고 대화를 쉬었다. 다음 화제를 꺼낸 건 라카키였다.




“가족은?”




“없어. 처음부터 없었어.”




캘러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목민 사회에서 고아들은 차별받는다고 들었지. 아비와 어미의 얼굴을 모르는 놈은 신을 받들 자격이 없다고 했던가. 힘든 시절을 겪었겠군.”




“그랬죠.”




“차별받고. 추방당하고. 그런데도 고향을 위해 싸우는군. 왜?”




“돌아갈 곳을 갖고 싶으니까요.”




레스는 목소리를 깔았다. 캘러헬은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라카키가 이야기를 다 듣고 딴청을 피우다가 근처에 놓여있던 레스의 물건에 눈길이 끌렸다. 라카키가 그쪽으로 날아가서는 여기를 보라며 손짓했다. 캘러헬이 손대도 되냐고 눈짓으로 물어보자 레스는 작게 끄덕였다. 그가 레스의 권총을 꺼내서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오리칼쿰으로 만든 싱글 액션 리볼버라니. 놀랍군. 분명 주문 제작품일 텐데 어디서 났지?”




“스승님한테서 훔쳐왔어요. 얼마짜린지는 저도 몰라요.”




“자네의 스승이라. 그것도 들어보고 싶은데 나중으로 미뤄야겠지. 이건 롤링 블럭 단발 소총인가. 총들이 주인을 닮았어. 한물갔지만 튼튼하고, 또 나설 때는 확실해. 개머리판에는 뭐라고 새긴 거야?”




“비나예 아하니.”




그 말을 듣고 라카키가 갑자기 푸웁! 하고 웃음 새는 소리를 냈다. 캘러헬은 옅게 웃었다.




“시선으로 죽이는 자. 비나예 아하니들은 자기들 잘난 맛에 취해 살다가 자멸했지. 세상살이란 실로 그래. 자만에 빠져서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한계가 뚜렷하거든.”




“요즘은 사람들이 너무 폭력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거 같습니다. 살인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잊어버린 거 같아요.”




“우리가 남 말 할 처지야?”




그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레스는 긴장이 풀려서 드디어 웃었다. 캘러헬은 그 모습을 보면서 골몰히 생각에 빠졌다가 뭔가 떠올렸다는 듯이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라카키를 바라보고 손짓했다. 어디론가 날아간 라카키가 곧 색이 이상하고 걸쭉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들고 돌아왔다. 캘러헬이 그걸 받아서 탁자에 소리 나게 놓았다. 레스가 물었다.




“뭡니까.”




“포션. 자네 같은 평범한 사람도 마실 수 있도록 예전에 준비했었지. 마침 자네 몸에 내 피도 흐르고 있으니 효과는 확실할 거야. 인체가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면 평소에 쓰지 않는 부위에서 체력을 끌어모아서 사람을 고조시키지. 이건 아드레날린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약에 영양제를 섞은 거야. 맛은 보장 못 하지만 약효가 도는 동안에는 기운도 나고 오른손도 원래만큼 움직일 거야.”




레스는 눈을 반쯤 감았다.




“그런 게 있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요?”




“하지만 약효가 끝나는 순간 죽음을 체험하게 될 거야. 어디까지나 고통을 잊게 해주는 거지 몸은 낫지 않아. 몸이 나을 정도로 효과가 분명한 것은 보통 사람이 먹었다간 죽어. 자네가 감당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가 한계야.”




“그럼 당신이 싸울 때 쓰지 그래요? 솔직히 제가 나설 차례도 없을 거 같은데.”




캘러헬은 한숨을 쉬고 진지하게 말했다.




“들어봐. 일단 나한텐 포션이 필요 없어. 그리고 나하고 라카키는 무적이 아니야. 우리가 비장의 일격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서 그래.”




“그야 당신들이 쌔니까 그렇게 부르겠죠.”




“강화 인간들은 괴물의 유전자를 이용해서 변이됐어. 다른 말로는 괴물을 상대하는 요령이 그 강화 인간한테도 통한다는 뜻이지. 그리고 내 몸에는 세지도 못할 만큼 다양한 괴물의 피가 흘러. 덕분에 나는 다른 카우보이들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해졌지. 하지만 내 제자들이 다음에도 마냥 당하고만 있을까?”




“이런.”




마음 한편으로 캘러헬에게 만사를 맡겨두고 안심했던 레스는 다시 위기를 느꼈다.




“거의 모든 종류의 괴물을 사냥할 때 쓰는 수법이 나한테 통해. 또 보면 알다시피 나는 알비노라서 햇빛도 약점이야. 자외선 정도는 라카키가 해결해주지만, 아침이 되면 불리해지는 건 사실이지.”




라카키가 이어서 말했다.




“우린 원래 상대가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딱 한 번만 나서서 싸워야 해. 안 그러면 상대가 미리 대비하니까. 우린 여태껏 꾹꾹 참다가 당신들을 구하러 나타난 거야.”




레스는 이해했다.




“그래서 일격이라고 부르는 건가.”




캘러헬이 탁자에 놓인 유리병을 톡톡 두드렸다.




“나도 쉬이 당해줄 생각은 없지만 이길 거라는 보장이 없어. 자넨 원래 싸워서는 안 되는 상태지만··· 최후의 상황에 대비해야지. 그리고 또 하나.”




이번에는 캘러헬이 품속에서 총알을 꺼냈다. 총알의 색이 특이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레스는 곧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은 탄환?”




“은은 마법을 잘 받아들이는 물질이지. 톤토가 예전에 나더러 쓰라고 만들어준 거야.”




라카키가 뜬금없이 푯말을 들어 올렸다. 푯말에는 [마탄]이라고 적혀있다. 레스가 손짓을 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똑같은 소리 하기는 싫은데. 그거야말로 당신이 써야 할 물건 같은데요.”




“예전에 시험해봤는데 이 총알을 감당할 수 있는 총이 없었어. 제대로 발사되기도 전에 총이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지.”




라카키가 이번에는 레스의 옆으로 날아와서는 다른 푯말을 들어 올렸다. [마탄의 사수]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자네의 권총은 오리칼쿰이잖아.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금속 말이야. 어쩌면 이 총알은 자넬 만날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캘러헬은 말을 마치고 은 탄환을 유리병 옆에 세웠다. 레스는 저게 좋은 물건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반응으로 인상을 쓰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저 총알이 평범한 총을 박살 낼 만한 반동을 낸다면···.”




“자네 팔은 또 박살 나겠지. 하지만 나보단 그쪽한테 있는 게 나을 거 같으니까.”




“내 팔자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또 있어요?”




캘러헬의 손짓을 보고 라카키가 저편으로부터 무언가가 가득 담긴 그릇을 들고 왔다. 실내가 어두워서 잘 안 보였는데 안을 보니 껍질이 까진 마늘이 가득 담겨 있었다. 보통 누군가가 먹을 걸 가져온다면 그 행동의 의미는 아주 직설적으로 전달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레스는 그것을 손으로 가리키고 묻는 표정을 지었다. 캘러헬이 단호하게 말했다.




“자넨 총알투성이 몸을 더러운 호숫물에 담갔다가 나왔어. 감염되지 않으려면 잔뜩 먹어.”




마늘이 가지고 있는 항균력은 페니실린과 테라마이신을 뛰어넘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 세균과 박테리아도 마늘을 이길 수 없다. 게다가 혈액 순환 촉진까지 된다. 다만 레스에게는 그런 사실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레스가 께름칙한 얼굴로 마늘을 집어서 코에 대자 순간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악귀가 퇴치 도구라도 만난 듯 그의 몸짓이 점점 방어적으로 변했다.




“이걸 꼭 생으로 먹어야 해요? 구워서 담백하진 거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데.”




“그건 안돼.”




재판장에서 판사가 선언을 내릴 때나 들을 법한 목소리였다.




마늘의 매운맛은 알리신이라는 성분 때문인데 이 알리신이 항균력을 갖고 있다. 요리나 조리를 통해 이 매운맛을 제거했다간 풍미를 돋우기에는 좋겠으나 항균작용은 사라진다. 캘러헬과 라카키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레스는 뭐 별거겠냐는 생각으로 마늘 두 조각을 입에 넣었다. 씹는 동안에는 1단계, 향이 코를 채우기 시작하면 2단계, 내용물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3단계에 걸쳐 매운맛이 온몸에 퍼졌다. 레스는 진땀을 흘리면서 오만상을 쓰고 고개를 푹 숙였다가 올렸다. 그리고 다른 곳을 바라보며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온 마늘 냄새를 거하게 뿜었다.




“단숨에 먹여야겠군.”




그는 진땀을 흘리면서 몸을 떨고 있는 레스를 소파에 눌러서 단단히 붙잡았다. 라카키는 마늘 그릇에 올라타서 레스의 얼굴 앞으로 날아갔다. 캘러헬이 레스의 턱을 쩍 벌렸다.




“어! 으허 으르허!”




레스의 필사적인 절규는 무시하고 라카키는 자기 머리만 한 마늘을 저 앞에 보이는 입으로 집어넣었다. 도중에는 야구 투수처럼 자세를 잡고 던졌다.




마침 욕실에서 다 씻고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자리와 샤카자이아가 그 광경을 봤다. 마늘이 레스의 입에 가득 차자 캘러헬이 호두까기 인형이나 마늘 다지는 도구를 다루듯 음식을 씹도록 억지로 턱 운동을 시켰다. 아자리가 그걸 보고 물었다.




“푸아그라 만들어요?”


작가의말

100회 기념 분량 대방출. 사실은 분량 조절실패. 전 글을 쓸 때 손으로 생각하는 타입이라 컨디션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그리고 요즘은 항상 안 좋지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마녀와 총잡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현재까지 진행된 분량을 보류하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예정입니다 23.11.28 18 0 -
공지 비하인드 스토리들 - 1 22.09.27 31 0 -
공지 외주 보낸 삽화가 도착했어요 +1 21.12.07 93 0 -
공지 어설프게 그림판으로 그려본 세계 지도 21.01.26 335 0 -
245 245회 - 대의를 위한 계기 23.07.24 26 1 18쪽
244 244회 - 사용 전에 동의를 구하시오 23.07.05 11 0 12쪽
243 243회 - 퍼즐 조각들 23.06.30 12 0 16쪽
242 242회 - 새로운 복장을 요구하는 직장을 조심하라 23.06.29 17 0 13쪽
241 241회 - 피투성이 23.06.07 16 0 13쪽
240 240회 - 얽힌 둘 23.05.29 19 0 16쪽
239 239회 - 죽음의 성녀와 대장장이 왕 23.05.07 26 0 17쪽
238 238회 - 자격없는 자 23.04.21 148 2 14쪽
237 237회 - 흔해터진 전설들 23.03.17 114 2 20쪽
236 236회 - 결말이 보이는 이야기 23.03.03 29 3 14쪽
235 235회 - 배틀 로얄 23.02.08 41 3 14쪽
234 234회 - 몰락과 각성 +2 23.01.29 45 3 14쪽
233 233회 - 공명정대한 방해 23.01.17 30 2 19쪽
232 232회 - 야생에서의 공성전 22.12.28 57 1 13쪽
231 231회 - 또 작전 시간 22.12.07 27 1 16쪽
230 230회 - 유물과 현재 사이 22.11.29 28 2 23쪽
229 229회 - 상담센터 22.11.09 118 1 14쪽
228 228회 - 그 진실 +1 22.11.01 32 2 14쪽
227 227회 - 솔직하지 못 한 친구들 22.10.24 81 2 21쪽
226 226회 - 패자부활전 22.10.10 54 1 15쪽
225 225회 - 기아스 22.09.29 70 2 17쪽
224 224회 - 즐거운 면담 22.09.23 36 1 13쪽
223 223회 - 사춘기 22.09.14 43 2 16쪽
222 222회 - 무형 문화재 +1 22.09.05 55 2 18쪽
221 221회 - 가장 어두운 곳의 위대한 영광 22.08.25 52 1 15쪽
220 220회 - 의문의 쟁탈전 22.08.16 48 1 2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