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 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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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여름
작품등록일 :
2018.07.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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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3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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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0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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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아야 할 일

DUMMY

요즘 뜨고 있는 독특한 컨셉의 외서커피.


TW 빌딩 앞에 위치한 이 커피집은 도시 한복판에 있지만 시골다방처럼 디스플레이를 해 두었다.


한창 유행중인 옛 글씨체를 활용한 것도 그렇고, 요즘은 구하기도 어렵다는 80년대의 프로모션용 컵들이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까지 이어진 지루한 비는 투둑투둑 우산을 흠뻑 적실정도로 넉넉히 오고 있었다.


조금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이런 날씨와 외서커피집은 더할 나위없이 잘 어울렸지만, 비 때문인지 손님은 입구 쪽에 하나, 안쪽에 하나 이렇게 둘 뿐이었다.


그리고 안쪽 깊숙이에는, 축 늘어진 소파에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꾹 눌러쓴 남자가 유자차 한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보이는데 문제가 없을 정도로만 밝은, 미약한 조명이 이 커피집의 장점이었다.


짤랑-


비가 샐 정도로 푹 젖은 우산을 탁탁 털며 들어온 지아는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듬직한 덩치를 보고 한눈에 재열을 알아보았다.


적당히 우산을 정리하고는 뚜벅뚜벅, 안쪽 깊숙이 걸어들어온다.


“일찍 왔네?”


어색할 만도 한데, 지난밤 모든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모든 일에 한층 대담해졌다.


“응. 우천취소가 빨리 결정되어서, 시간이 좀 났지.”


슬쩍, 주위를 한번 스캔한 재열이 검은 마스크를 벗는다.


지아가 커다란 백을 축 처진 소파에 던지듯 놓으며 재열 앞에 앉았다.


“여기오는데 남친한테 혼났어.”


“남친도 있어? ”


“응”


“나보다 더 멋있나?”


재열의 부리부리한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응 너보다 훨씬 멋있다.”


재열의 말장난에도 눈길하나 주지 않고 메뉴판을 살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컨셉만 특이하지 막상 메뉴들은 별 다른게 없다.


꼼꼼하게 체크하지만 특별하게 먹고 싶은 게 없어 대중적인 메뉴를 고른다.


다만, 요즘 커피집 답지 않고 종업원이 직접 주문을 받으러 왔고 따뜻한 라떼 한잔을 시켰다.


“근데..”


“응”


“왜 나한테 대뜸 친구하자고 했어?”


주문하자마자 질문을 하며 고개를 45도 정도로 기울였다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아, 그거? 그냥”


재열은 답답했는지 눌러 쓴 모자를 살짝 들어올렸다.


“기자니까, 아는 것도 많을 테고 사람이야기를 진지하게 잘 들어주고..”


“그래서?”


“그리고 왠지 모르게 편했어.”


“편하면 다 친구하자고 하냐?”


“설마 예뻐서라던가 그런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니지?”


흔한 남매사이에서 남동생이 누나를 쳐다보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럴 리가.”


역시 이쪽도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는 듯 반사적으로 대답을 내놓는다.


입술을 잘근 문 재열이 3초정도 눈을 내리깔고 고민하더니 말문을 다시 연다.


“사실은,,”


사실은.


뭔가가 나올 거 같다는 촉에 직감적으로 포인트를 캐치하는 기자의 눈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재열은 긴장했던 입술과 시선을 한꺼번에 풀며 편안한 눈빛으로 돌아온다.


“너무 힘들어서 뭐라도 하고 싶었나봐.”


짙은 눈썹, 강한 턱, 부리부리한 눈빛, 큰 키와 대한민국 최고의 4번 타자다운 당당하고 우람한 어깨.


스물일곱의 혈기왕성한, 거칠 것 없는 남.자.


그러나 아무리 철갑처럼 단단한 껍질을 가진 생물이라도 보드라운 속살이 있기 마련인 것처럼, 재열은 그 강한 이미지 속에 숨겨진 여린 속살을 조개가 발을 내밀 듯 살짝, 내보였다.



너무 힘들어서.


살면서 한번이라도 죽을 만큼 힘든 벼랑 끝에 몰려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럴 때는 누구나 흔히 하는 상황파악이나 계산도 소용없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된다는 것을.


자세한 사연이야 아직 알 수 없지만, 지아가 부드러운 머리칼을 스윽, 한번 끌어 올렸다.


“그래. 알았어. 더는 묻지 않는다. 만만하다는 거지? 그런 말 자주 들어.”


쿨하다.


“라떼 나왔습니다.”


마침 주문했던 라떼가 나뭇잎모양의 하얀 커품을 달고 테이블로 왔고 후룹, 한모금 가볍게 입술에 적셨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재열의 표정이 한층 가볍고 밝아졌다.


사실은,


그 뒤에 더 붙이지 않은 말들이 있다.


너무 힘들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재열은 가늘게 눈을 내리깔았다.


본인만 모르고 있을 뿐, 사실 지아는 몇몇 유명인들에게 소문난 인터뷰어였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다보니 하지 말아야할 이야기까지 했던 몇몇 인터뷰이가, 그 내용을 기사로 쓰거나 소문이라도 내면 어쩌나 안절부절 했지만 문제가 될 만한 일은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고.


보통의 기자들이라면 굴러들어온 떡을 그냥 내치지 않는다.


그래서 웃고는 있지만 이 사람이 어떤 기사를 쓸까, 항상 긴장해야 하는 게 유명인들이다.


그러니 지아의 편안함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절댔던 이들이 얼마나 가시방석이었겠는가.


하지만 기사는 물론 알음알음 소문조차 나지 않았다.


이렇게 입이 무겁다보니 몇몇 인터뷰이들에게 호평이 나면서, 일을 시작한지 1년 만에 지아는 예의있고 센스있으며 믿을 수 있는 인터뷰어로 업계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단, 본인만 모를 뿐.


당연히, 산전수전 겪은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가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다.


물론 그날 느낌이 너무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소문난 인터뷰어의 명성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으니까.


여튼 더는 묻지 않아준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사람 진짜 없다. 비와서 그런가봐. 평소엔 꽤 붐비거든.”


내부를 한번 주욱 스캔하던 해보니 사람들이 북적였을 때와는 다른 풍경이다.


“그래서 더 좋은데?”


최고의 슈퍼스타는 붐비는 건 딱 질색일테니까.


“흠, 그래서 무슨 인생상담인데?”


평소 독서량 만랩. 상담 프로그램 애청자. 인터뷰 스킬 만랩. 친구들이 새벽에 전화하고 싶은 여자 1위.


말은 안했지만 상담이라면 자신만만하다. 물론 자기 앞가림과는 별개의 문제.


“음,....”


재열이 잠시 머뭇, 하고 뜸을 들인다. 오늘 날씨처럼 꽤 무거운 모양이었다.



“그....”


“그?”


“연....애상담?”


“아...”


아.


연애.


자신만만하던 지아의 눈빛이 한여름 땡볕아래 타들어가는 깻잎마냥 생기가 없어진다.


하하하하하하....


그건 나도 모르는데..


연애라는 말을 듣자 습관처럼 주먹을 스윽, 입으로 갖다 댄다.


어떤 고위급인사, 혹은 전문가를 만나도 대화가 가능한 지아였지만, 연애는 책을 본다고 돼는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성찬이외에는 ‘연애’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잔뜩 기대하고 일부러 시간을 낸 재열에게 모른다고 하기에는 누나로서의 가오가 상한다.


“그래그래, 말해봐. 여자 맘은 여자가 잘 알지.”


깍지 낀 손을 머리 뒤로 붙이며 몸을 뒤로 젖혀 앉았다. 편안한 자세로 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었다.


“뭐가 그리 급해. 시간은 많은데.”


재열이 유자차를 다 마시고 남은 유자건더기까지 스푼으로 떠먹으며 와작와작 소리를 냈다. 그래도 아직은 친하지 않으니 선뜻 말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냥”


“...”


“항상 을로 살아왔는데, 그게 벌써 5년째인데”


“응”


“이제는 너무 지쳐서 그만할까 말까 고민중이야. 남자가 더 좋아해야 좋다고 하잖아 사람들은. 그래서 그 말 믿고 지금까지 기다렸거든.”


“보기 드문 순정파구나”


“순정파? 훗,”


이미지로만 봐서는 여자 여럿 울리고 이리저리 갈아탈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근데 그런 을의 연애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이제는.”


“그렇지..”


“여자들은, 자기를 믿고 기다려주는 남자에게 결국 올까?”


지아는 순간, 헌신하다 헌신짝 된다는 흔한 연애 고사를 떠올렸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여자친구들에게 많이 들었던 레파토리. 남자에게 듣는건 처음이지만 연애문제에 남녀가 뭐가 그리 큰 차이가 있을까.


사람이란 간사해서, 자기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상대에게 더 잔인하게 대하게 된다. 머리로는 마음을 받는다는 게 고맙다고 생각하지만 행동은 그 반대인 것이다.


순간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갔다.


“혹시, 그 사람은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 거야?”


“음.... 응.”


“하지만 그 사람하고는 잘 안 되는 거구나?”


“뭐, 솔직하게 말해서 잘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은 얘한테 아예 관심이 없으니까. 그래서 지치면 금방 나한테 올 거 같아서 이렇게 오래 기다린거야.”


“5년을?”


“응.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어.”


역시.


아, 이 얼마나 쓸데없고 소모적인 일이란 말인가. 꽃같은 청춘을,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인 하재열이, 그런 쓸데없는데 내다버렸다니..


입맛을 한번 다시고는 절래절래 고개를 흔든다.


“역시, 그만 하는게 좋을까?”


재열이 눈치를 살살 살피다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마치 검진결과 들으러간 환자가 의사의 눈치를 살피듯.


“음.... 아마도?”


반쯤 남은 라떼를 마저 홀짝이다 탁, 내려놓았다. 긴 숨을 한번 내쉬고는 재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실 나도 연애는 잘 몰라. 다만”


“응”


침을 한번 꼴깍, 삼키는데 굵은 목적이 환히 다 보였다.


“내가 읽은 책에서 이런 구절이 있더라. 연애가 끝나갈 때, 스스로를 위해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고. ”


“그게 뭔데?”


“나도 예전에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마음을 모두 표현해야 후회가 남지 않는거라고 생각했어. 그게 사랑이고. 근데 내 친구들이 연애를 끝낼 때, 붙잡는다는 핑계로 너무 자신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바닥..?”


“응.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품위 같은 거지. 나중에 나이 들어서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나 자신을 위해서 하지 않았어야 할 일.”


“......”


“그때 가서 나 자신을 왜 그렇게 소중히 여기지 않았나.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왜 스스로 끌어내렸나. 하는 후회를 하지 않을 선택 말이야.”


사실 이 대답은 지아 자신의 생각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말을 꺼내는 사람들은, 사실 대부분이 이미 자신의 답을 알고 있다.


다만 그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내 마음을 정리하고, 결정내리기 위할 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좋은 상담가란 어쩌면 그 사람의 마음이 시키는 것을 또렷하게 밝혀내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재열이 이 이야기를 꺼낸 것도 마찬가지다. 아직 그 여자를 많이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이런 상담 자체를 할 리가 없다.


5년이다.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는 가벼운 연애 이야기가 아니란 소리다.


그 긴 시간을 그 여자만 바라봤다면 그 마음이란 얼마나 컸을 것이며, 미련 또한 얼마나 컸을까. 그 여자에 대한 믿음도.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다 태우고 이제는 한줌 재가 되기 전,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의식처럼 지아를 만난 지도 모른다.


지아가 그만 만나라고 윽박지른다고 해도 재열의 마음이 아직 그 여자에게 향해 있다면 만날것이고, 더 기다려 보라고해도 지쳤다면 만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재열을 위해주는 입장으로 생각했을 때, 나중에 후회할만한 일은 하지 않았으면 했다.


충분히 잘났고, 다른 여자들이 탐내는 사람이니 자신의 가치를 깍아 내리면서까지 연애에 매달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이렇게 상대의 마음을 함부로 대한다면, 잘해줄 가치도 없는 여자일테니까.


재열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찻잔에 아주 조금 남은 유자의 과육을 바라볼 뿐이었다.


창밖에 비는 여전히 가늘어질 줄 몰랐고, 어느덧 두 사람은 모두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말없이 한참을 비만 바라보는 두 사람.


그리고 그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낯선 눈빛을, 두 사람만 알아채지 못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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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성찬의 이야기 1 18.09.01 26 0 11쪽
30 능소화 18.08.30 42 0 11쪽
29 독버섯 18.08.29 24 0 12쪽
28 결혼할 남자 18.08.29 38 0 12쪽
27 새로운 시작 18.08.28 25 0 11쪽
26 깨진 유리잔 18.08.25 60 0 12쪽
25 달콤한 형벌 18.08.23 30 0 11쪽
24 혼내줄거야 18.08.21 57 0 11쪽
23 평판 싸움 18.08.19 32 0 11쪽
22 흔들리지 않기를 18.08.19 39 0 11쪽
21 사소한 일 18.08.16 32 0 12쪽
20 말이라는 것 18.08.13 44 0 12쪽
19 예쁘다니까 18.08.10 47 0 12쪽
18 동상이몽 18.08.10 42 0 12쪽
17 천하의 유경민 18.08.09 40 0 12쪽
16 주제를 안다는 것 18.08.08 46 0 12쪽
15 불은 낸 사람이 꺼줘야지 18.08.05 50 0 11쪽
14 오늘 우리는 안타? 홈런? 18.08.03 42 0 12쪽
13 연애는 어려워 18.08.02 86 0 11쪽
» 하지 말아야 할 일 18.08.01 69 0 12쪽
11 누나라고 부를게 18.07.31 47 0 12쪽
10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18.07.30 35 0 11쪽
9 돌체라떼 18.07.26 67 0 12쪽
8 비밀인데요. 18.07.25 75 0 11쪽
7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 하재열 18.07.24 75 0 11쪽
6 떡볶이 어때요? 18.07.21 46 0 12쪽
5 매일 안타를 친다는 마음으로 18.07.19 46 0 12쪽
4 안녕, 바다 18.07.17 76 0 11쪽
3 그 주말, 쏟아지던 햇살 아래 18.07.17 11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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