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벽을 사이에 두고(5)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19화-벽을 사이에 두고(5)
지크가 이베리아에 파견된 지 한 달.
그가 이를 악물고 40만 이베리아 전략군의 산파 노릇을 해내고 있다는 소식은 오스카르 왕을 크게 기쁘게 했다.
“그 놈이 잠도 안 자고 그렇게 열심히 한단 말이지?”
“네.” 왕의 휠체어 앞에 부복한 디트리히가 웃었다.
“지크의 혈통이 왕족이라는 소문이 이베리아 전략군 사이에 퍼지고 있습니다. 폐하의 전략이 성공했습니다.”
“그래. 지크가 이베리아 전략군을 통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왕족이라는 걸 알리는 거다. 뜬금없이 지크를 태자로 봉하면 군대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까.”
왕이 고사리처럼 귀여운 손으로 무언가를 쓱쓱 썼다. “지크를 이베리아 전략군 사령관으로 봉할 생각이다. 할 수 있겠나?”
“지크의 능력이면 충분합니다.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뭐지?”
“탕리 사령관은 수도방위군 안에 이베리아 전략군을 배속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음.” 왕이 입술을 오므렸다. “탕리에게 전략작전부 일을 맡기면서 내가 이베리아 전략군을 배속시켜 주기로 이야기했었지. 탕리는 아마 기대하고 있을 것인데.”
디트리히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하죠? 제가 탕리 장군님의 부관이면서 이베리아 전략군 사령관이니, 이제는 이베리아 전략군이 자기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을 것입니다.”
“탕리한테서 불온한 움직임은 없겠지?”
“전혀 없습니다.”
왕이 작은 손가락으로 골치를 톡톡 쳤다. “탕리에게서 이베리아 전략군을 뺏으려면 명분이 있어야겠구나.”
“탕리 사령관님은 야망이 큰 분입니다. 아마 그냥 뺏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기다, 탕리 장군님은 폐하께 지크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읍소한 분입니다. 지크도 장군님의 뜻을 거역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탕리는 지크가 공을 세우는 것을 어떻게든 방해할 것이다. 일을 부드럽게 해결할 방법이 없겠나? 탕리에게 보상을 주든지, 아니면 지크에게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공을 세우게 하든지.”
디트리히가 잠시 생각했다. “사실은, 베투리아가 아직도 딥스로트에 숨어 있습니다. 범려가 베투리아를 시켜 계속 탕리 장군을 암살하려고 시도하는 통에 골치가 아픕니다.”
“지크에게 탕리를 암살하려는 베투리아를 잡게 한다?”
“네. 탕리 장군은 지크에게 고마워할 겁니다.”
“좋은 생각이다. 탕리가 그 정도로 수긍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기세를 누를 수는 있겠지.”
“중신들이 수도방위군의 인건비를 횡령하여 구천에게 바친 지크의 충성을 많이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중신들의 의심도 완전히 끊어낼 겸, 지크에게 베투리아의 머리를 베어 오게 하시죠.”
오스카르 왕이 잠시 생각했다. “지크는 구천을 낚을 우리의 소중한 낚싯대다. 구천이 미끼를 뱉게 하지 않으면서 베투리아를 잡는 그림을 그려낼 수 있겠느냐?”
“지크에게 맡기시지요. 그 녀석이라면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에게 계획안을 올리게 해라. 지크를 주축으로 카라카스의 잔당을 남김없이 색출하라! 가엾은 바톨로메스 장군의 원수를 갚자!”
“으아아아아악!”
베투리아는 칼을 내리찍었다. 얼굴에 칼이 찍힌 부하가 쿵, 하고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그녀가 무심한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처리해.”
역시 무표정한 얼굴의 조직원들이 도끼를 꺼내들었다. 쾅, 쾅 하고 시신이 조각났다.
베투리아가 지시했다. “여기. 여기 점이 있잖아. 여기를 자르란 말이야. 디트리히한테 던져 주게.”
그녀가 식구에게 칼을 드는 이유는 늘 같았다. 디트리히의 팔콘기사단에게 꼬리를 밟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부하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도록 그의 얼굴을 지져 버렸고, 몸통도 여기저기 버릴 수 있게 네 동강이 났다.
죽은 놈은 가장 약에 절은 놈 중 하나여서, 피에서도 약 냄새가 진동했다. “아깝네. 요즘 장사도 안 되는데.” 그녀는 놈의 잘린 팔을 들고 피를 쭉쭉 빨아먹었다. 그제서야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중령님.”
배가 찰 만큼 피를 마시고 나자, 그녀는 부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남자들은 시체를 질질 끌고 나갔고, 여자들은 걸레를 가져와 피를 훔쳤다. 끔찍한 살인 현장 때문인지, 피에서 나는 약 냄새 때문인지 중독자들의 눈이 벌갰다.
“중령님.”
베투리아는 옷을 벗는 것도 귀찮아 피투성이 꼴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술을 찾는데 병이 안 보인다.
“중령님.”
부하가 세 번째로 부르며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왜?”
“큰일입니다. 포주들이 당장 물건을 달라고...”
“결제부터 하라고 해!”
“이제 와서 분할결제는 어렵답니다. 슬슬 눈치 보며 서로 몰려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보니까 좀 위험합니다. 직접 가서 설득을 해 보시는 게...”
베투리아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섰다. 부하가 베투리아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보며 침을 삼켰다. 요새는 약을 많이 하지 못해서 늘 신경이 날카로웠다.
“제일 불만 있는 놈이 누구야?”
“최근에 제일 안쪽에 개업한 가게입니다. 이 놈이 생각보다 칼을 좀 씁니다.”
“이름이 뭐야? 뭐 하다 기어들어온 놈이야?”
“첼시입니다. 50대 남자입니다. 히스토리아 남쪽에서 이것저것 해 보다가 안 되서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다고 합니다.”
“첼시.”
베투리아가 피로 축축해진 소파에 누워 칼을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첼시라.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디트리히와 탕리가 베투리아를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까.
베투리아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밝은 금발이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었다. “샤워를 좀 해야겠군. 초장부터 칼질 티 내면 첫인상이 안 좋잖아.”
여자 조직원들이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투리아의 목욕물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약쟁이들과 가난뱅이들을 끌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세레니아의 신무기에 대패한 지 1년, 베투리아는 천신만고 끝에 갈대숲에 살아서 기어들어올 수 있었다. 딥스로트에 위치한 이다볼 최대의 창녀촌인 갈대숲은 왕국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약쟁이들이 제일 드글거리는 타락한 곳이었다.
베투리아와 히스토리아 게릴라들은 너무나 쉽게 조직을 재건했다. 그녀만큼 양귀비에 정통한 사람은 없었고, 그녀만큼 칼을 잘 쓰는 조폭도 흔치 않았으니까. 그녀가 만든 아편은 아발론 왕국과 진국을 통틀어 가장 품질이 좋았다. 약쟁이들은 베투리아의 약을 얻으려고 무슨 짓이든 했다.
“하지만 요샌 별로지.” 베투리아가 혼잣말을 했다.
“네, 별로죠.”
“뭐가 별로야?”
부하가 당황했다. “아닙니다.”
베투리아가 부하를 흘겨보며 거침없이 걸었다. 현상금이 금화 100개에 달하는 수배범이건만, 대낮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걷는데도 거리에는 막아서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이 새끼가!”
부하 하나가 벽에 붙어선 사람을 확 밀쳤다. 사람들은 반항도 하지 못했다. 탕리와 디트리히의 정규군은 멀고 베투리아의 칼은 가까웠다. 갈대숲 사람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나와, 이 개새끼야!”
부하들이 먼지가 풀풀 올라오는 첼시의 가게 문을 걷어찼다. 쾅 하고 경첩이 부서지며 어두컴컴한 스테이지가 나타났다. 접대부들은 안쪽 방에서 자고 있고, 첼시도 같이 있을 것이다.
갱단은 남의 가게에 들어가면서 계세요 따위의 소리는 안 한다. 베투리아의 부하들이 찬장에 널린 술을 마구 집어먹었다. 짤그랑 짤그랑 하고 진국산 싸구려 도자기 잔들이 깨져 나갔다.
“나와!”
쾅!
부하들이 안쪽 문에 잠긴 자물쇠를 도끼로 확 내리치자, 안쪽에서 자고 있던 여자들이 기겁을 했다. “아아아악!”
“야! 너네 오빠 어디 있어. 이 썅년들아!”
“몰라요! 집은 따로 있어요.”
“집 어디야!”
“몰라요...”
갱단이 제일 나이가 많이 보이는 여자를 끌어냈다. “너 나와. 나와 이 썅년아!”
“아아악!”
여자가 잠옷 바람으로 댄스홀로 끌려왔다. 베투리아가 턱짓을 하자 저 쪽에서 횃불용 기름이 담긴 통이 나타났다. 창녀들의 얼굴이 하얘졌다. “뭐 하는 거예요?”
부하들이 창녀들이 자고 있는 방을 향해 마구 기름을 퍼부어 댔다.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하지 마요!”
“그럼 첼시는 어디 있어!”
“오빤 여기서 멀리 살아요!”
“어디!”
“산 너머에 산다구요. 어딘지 진짜 몰라요.”
“그럼 그 새끼하고 술 먹을 땐 어디서 먹어! 어디서 먹진 않을 것 아니야!”
“여기서... 뒤쪽으로 돌아가면 친구 가게가 있어요. 거기서 먹어요...”
“그 친구 가게는 어딘데?”
“몰라요.”
“뭐 하는 놈이야?”
“외팔이에요. 그것밖에 몰라요!”
부하들이 횃불을 당겼다.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진짜 몰라요! 살려주세요. 중령님!”
부하들이 베투리아를 쳐다보았다. 베투리아가 인상을 썼다. “그만 해라! 이 년들이 다 타 죽으면 수금을 못하잖아.”
부하들이 횃불을 얼른 껐다. “죄송합니다, 중령님.”
심복 격인 이시라가 부하들에게 주먹을 날렸다. 나이는 어리지만 머리가 비상하고 약삭빠른 타입이었다. “너희가 똑바로 못하니까 중령님이 이 고생이잖아, 이 쓰레기같은 새끼들아! 이 쓸모 없는 식충이 새끼들!”
부하들이 신음 한 번 못 내고 얻어맞았다. 다른 부하인 랑두리스가 가만히 물었다. “첼시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까요?”
조직의 2인자인 랑두리스는 느긋하고 진중한 성격이었다. 나이는 베투리아보다 많았지만, 귀족정을 일으킬 원대한 꿈을 갖고 충성스럽게 보스를 따르고 있었다.
“난 여기 있을 테니까, 너는 애들 합숙소에 넣고 다시 와.”
“괜찮으시겠습니까?”
베투리아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
랑두리스가 턱짓을 했다. 부하들이 여자들을 다시 방에 몰아넣었다. 자물쇠가 부서져서 가구로 문을 막아 놓았다. 여자들이 문 안에서 죽은 듯이 소리를 죽였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부하들이 계단을 올라 사라졌다. 베투리아가 어둡고 연기가 자욱한 가게의 홀에 앉아 묵묵히 술을 마셨다. 약을 좀 가져왔으면 참 좋았을 텐데.
“뭐야? 누구야!”
누군가가 헐떡거리며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한 놈이다. 베투리아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술만 마셨다.
“너. 너 뭐야! 이 미친년아!”
베투리아가 돌아보았다. 땅딸막한 체구에 대머리 50대. 포주 주제에 안 어울리는 멜빵바지를 입었다. 장화까지 신었다.
“너 뭐야? 니가 여기 다 부숴 놨어?”
“오빠!”
부서진 테이블과 의자가 켜켜이 쌓인 문 뒤에서 여자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첼시가 엉망이 된 가게를 휘둘러보며 베투리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기겁했다.
“너... 베투리아 중령!”
베투리아가 손짓을 했다. “앉아.” 첼시가 칼을 뽑아들었다. “여긴... 어떻게!”
“앉아 보라니까.”
첼시가 칼을 든 채로 엉거주춤하게 앉았다. 베투리아가 번개처럼 칼을 뽑아들었다. “나하고 결투라도 할 거야?”
베투리아는 한 번 약이라도 빤 상태인 건지 소름 끼치도록 차분했다. 그녀의 등 뒤에서는 여자들이 미칠 듯이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오빠! 오빠! 살려줘요!”
첼시가 턱을 떨었다. “아, 아닙니다...”
그녀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럼 칼 버려.”
첼시가 생각했다. 베투리아는 브리태니커 군사학교 출신이고 웬만한 검사들도 당해내지 못한다. 그가 칼을 버렸다.
“쟤네 조용히 하라고 해.”
첼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야, 조용히 해 이 년들아!” 여자들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첼시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베, 베투리아 중령님,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오셨는지...”
“내가 누군지는 아네. 근데 어떻게 그따위로 행동해?”
“그 따위라니요? 제가 무슨...”
베투리아가 칼을 테이블 중앙에 탁 올려놓았다. 잡을 테면 잡아보라는 태도였다. “왜 거슬리는 짓을 하냔 말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신참 주제에 말이야. 나이 많으면 다야?”
“중령님.”
첼시가 차분해지려 애쓰며 고개를 들었다. “제가 갈대숲은 신참이지만 사회생활은 꽤 해 봤습니다. 몽상드리아에서 마굿간도 해 보고 아발론에서 술집도 오래 했습니다.”
“그래서?”
“물건을 먼저 주시지 않으면 대금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저희를 죄시면 갈대숲이 다 망합니다.”
“내가 호구로 보여? 먼저 준 물건 대금도 안 주는데 물건을 더 달라고?”
“팔콘기사단하고 전략작전부 때문에 장사가 안 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약쟁이들이 죄다 잡혀 들어가는 통에 수금을 할 수가 없어요. 가격도 조금만 비싸게 불러도 고소해 버리니까.”
“그러니까 똑똑한 놈들하고만 거래 했어야지! 내 물건 품질을 알면서 그 따위 소리를 해?”
“그치만 이번에 옛날 카라카스쪽 거래처가 싹 다 달려 들어가서 우리 업주들도 얼마나 많이 잡혀들어가-”
“내가 곧 해결한다고 했잖아!”
베투리아가 짜증을 냈다. “곧 탕리하고 디트리히 모가지 따서 갖다 준다니까! 내 밑에 군사만 8만이야!”
“그런 말씀 하신지도 벌써 1년입니다. 저희 업주들이 불안해서 잠도 못 잡니다. 중령님!”
“그래서 뭐야? 지금 결제 못 하겠다 이거야!”
“중령님, 그게 아니고요. 수익이 참 앙증맞습니다. 저희가 매달 계산서 다 보여드리지 않습니까. 돈을 구할 곳이 없어요. 정말이에요.”
베투리아가 탁자를 걷어찼다. 맞은편의 첼시가 탁자를 얻어맞고 비틀거렸다. 그녀가 다시 걷어차자 의자에서 떨어졌다.
“주, 중령님!”
베투리아가 칼을 잡아챘다. 그녀가 인정사정없이 첼시에게 칼을 쑤셔 넣었다.
“으아아아악!”
첼시가 비명을 질렀다. 베투리아가 칼을 꽂아 내렸다. 첼시가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너 그거 알지?”
베투리아가 칼을 뽑았다. 첼시의 가랑이 사이에서 칼날이 쑥 뽑혀나왔다. 칼등이 첼시의 낭심을 툭툭 건드렸다.
“히익!”
“안 먹고 안 마셔도 똥오줌은 나오는 거. 인간은 그런 종자야. 뱉어내려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뱉어낼 수 있다니까?”
X발, 더 좋은 비유는 없나. 베투리아가 스스로의 말에 실망해서 입술을 씹었다. 약을 해서 그런지, 천하의 브리태니커 졸업생인 베투리아도 이 지경이다.
쉬이이. 첼시가 오줌을 쌌다. 지린내가 올라온다.
“약이 없으면 술에 오줌이라도 타서 팔아. 기한은 한 달이다. 그 전에는 약 없어.”
“주... 중령님!”
첼시가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 못해요. 좀 봐 주세요.”
“한 달 후에 내 책상에 대금이 안 올라오면 갈대숲을 싹 다 불질러 버릴 줄 알아. 그리고!”
베투리아가 칼로 넘어진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가 슉 하는 소리와 함께 깨끗하게 두동강 났다. “내가 2주 안에 탕리나 디트리히 둘 중 하나는 목을 따 줄 테니까, 다들 허튼 생각 말라고 해. 알았어?”
첼시는 한참이 지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정리를 해야 한다. 가게를 정리해야 오늘도 장사를 하지.
하지만 도저히 할 기분이 안 난다. 첼시는 여자들에게 시킬까 하다가 멈칫했다. 괜히 여자들까지 도망가 버리면 장사가 더 힘들어진다.
“에휴! 사는 게 왜 이리 힘드냐...”
이런 기분일 때면 여자를 안는 게 딱이지만 오늘은 참아야 한다. 어떻게든 돈을 모아야 되니까. 첼시는 힘없이 가게 문을 닫고 울타리 너머의 친구 집으로 향했다.
아발론에서 호프집이 망하고 방황하던 첼시를 데려다 한 한 달 정도 인삼 밭에서 일하게 해준 인연이었다. 첼시는 노동을 싫어해서 한 달 만에 뛰려나왔지만, 이 젊은 사업가 친구는 첼시가 어디가 좋았는지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곤 했다.
“이봐!”
첼시가 친구의 집 문을 탕탕 두드렸다. “이봐!”
문이 딸깍 열렸다. “뭐야? 아침부터.”
“아침은! 네 시야 이 새끼야. 넌 어린 놈이 잠도 많네.”
“아저씨 장사 준비 안 해?”
“아 몰라! 베투리아네 애들이 깽판쳤어.”
친구가 혀를 끌끌 찼다. 그가 한 팔로 문을 열었다. “그랬구만! 들어오셔.”
친구의 집은 장사가 안 되는 바였다. 친구는 히스토리아 산 쪽에서 인삼을 키워 진국에 수출하는데, 그 길목에 작은 가게를 연 것이었다. 순전히 자기만족으로 연 바라서 아가씨도, 종업원도 없고 문을 닫는 날도 많았다.
“넌 진짜 팔자 좋다. 응?”
“그럼 아저씨도 인삼 장사 하셔!”
“X발 자본이 있어야 하지 자본이! 저 개새끼들이 저렇게 쪼아 대는데.”
“그럼 그만 두시등가.”
“그만두면 뭐 하냐?”
“아이 우리 인삼 밭에서 일당 받으시등가. 맘 편하게 살라면. 우리 인삼은 폐하하고 대원수한테도 진상하는 인삼이야? 얼마나 장사 잘 되는데.”
“하! 그래서 언제 돈 모으냐? 나도 편하게 좀 살아야지!”
“그럼 그러시등가.”
스트라울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에게 술잔을 주었다. 잘린 왼손을 장갑으로 감추고, 오른손으로 꼴꼴꼴꼴 술을 따랐다.
“좀 좋은 거 없냐!”
“비싸서 안 샀는데.”
“어휴. 노랭이 새끼.”
몇 년 전, 마약쟁이 놈들에게 왼손을 잃었다는 스트라울은 마약쟁이들을 혐오했다. 성격도 괄괄해서 마약쟁이를 만나면 절대로 가만두질 않았다. 첼시는 스트라울의 존재를 베투리아나 갈대숲 사람들에게 절대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싸움 싫고 딱 돈만 좋아하는 아주 온건한 장사꾼이니까.
“베투리아가 뭐래?”
“아이 한 달 안에 돈 마련하래! 돈 좀 빌려줘라.”
“얼마.”
“금화 20개야.”
“어? 원래 다섯 개였잖아.”
“조금 갚고 확 땡겼어. 근데 X발 애새끼들이 다 약만 먹고 잡혀가 버렸잖아.”
“디트리히한테? 아니면 탕리한테.”
“디트리히 쪽.”
“에휴.”
스트라울이 능청맞게 말했다. “디트리히 그 개새낀 아발론에서 잘 쳐먹고 잘 살지 왜 일로 기어들어왔대?”
“X발 승진 할라고 탕리 똥구멍 빠는 거지. 군바리 새끼들이 다 그렇지 뭐. 아이 좀 기다려 볼라고. 베투리아가 탕리나 디트리히 둘 중 하나는 2주 안에 목 딴다니까.”
스트라울이 내색 않고 술잔을 들이켰다. “잘 됐네. 나는 그런 새끼들이 더 문제 같애? 그냥 착하게 약 빨고 돈 주고 하면서 혼자 아무데나 산에 가 뒤지고 하면 뭐, 누구한테 피해주는 거 없잖아.”
“아 그치그치!”
“근데 왜 굳이 구질구질하게 승진 할라고 기어들어와 가지고 자기네들끼리 잘 사는 사람을 괴롭히냐 이거야. 아오 씹X끼들.”
“하. 그러니까. 큰일났어. 진짜. 뭐 방법이 없을까?”
스트라울이 골똘히 무언가 생각했다. “방법이 있을 것도 같긴 한데. 확실하진 않은데 소문이 있어.”
“뭔데? 뭐?”
“사실은. 아저씨. 지크 중령 알지. 아케메네스 아들.”
첼시의 눈이 커졌다. “어! 나 걔 알아. 그 새끼 옛날에 우리 마굿간에서 알바 했었어.”
스트라울이 깜짝 놀라는 척을 했다. “진짜? 대박! 근데 지금은 와. 진짜 존나 출세했네.”
“어. 그 개새끼가 베투리아랑 동기동창이잖아! 디트리히하고 그 누구야, 그 나사렛서 신무기 개발한 여사장하고 동창이잖아. 하 브리태니커 듣기만 해도 욕 나와. 개새끼들 진짜.”
“이리 와봐.”
첼시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 개새끼 말이야. 지크.”
“어.”
“진국에... 주기적으로 돈을 갖다 준다?”
“어?”
첼시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게 뭔 개소리야?”
“아니.”
스트라울이 가만가만히 말했다. “걔가 있잖아. 아니 내가 인삼 수출하잖아.”
“어.”
“근데 배가 안 맞았어. 스케쥴이. 근데 어떡해. 무조건 인삼은 가야 되는데. 그래서 막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무조건 출항 하자고 여기저기 빌고 다녔지. 근데 그 때 배가 딱 한 척이 출항이 가능했거든? 밀항선 말이야.”
“어. 근데.”
“근데 내가 금화를 열 개를 불러도 안 된대! X발 말이 돼? 아저씨. 금화 열 개 주면 뭐 할 거야? 사람도 죽여 주는 액수 아냐. 그 정도면.”
“어어.”
“그래서 내가 X발 어이가 없어가지고 숨어서 봤어. 근데 지크 중령이 와서 거기 선장한테 돈을 주네? 선장이 딱 그러는거야. 금화 100개 맞습니다.”
“뭐?”
첼시가 소리를 쳤다. “뭐야? 장교가 밀항선 선장한테 금화 100개를 왜 줘?”
“아 그러니까.”
첼시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 새끼가 군 예산 인건비를 횡령한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그걸 진국에 좀 주나 봐.”
“아아... 그렇구만!”
첼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더러운 세상에 깨끗한 놈 하나 없구나. 지크 그 놈도 착해 보이더니 결국 그렇게 됐다.
“근데 지크가 알지? 디트리히하고 엄청 친한 친구고. 탕리나 다른 사령관들하고도 줄이 있단 말야. 걔가.”
“어어. 엄청 잘 나가잖아.”
“그니까 베투리아한테 지크를 소개시켜 주는 거야. 베투리아가 딱 나타나서 지크한테 양귀비 수출을 도와 달라, 여기는 너무 값도 싸고 디트리히랑 다른 새끼들이 괴롭혀서 못살겠다, 그렇게 얘기하라고 하는 거야. 그러면 지크가 도와줘야지. 뭐 어쩔 거야?”
“응.”
“뭐 지가 살고 싶으면 디트리히 잡는 데 협조하라구 할 수도 있고. 그치?”
“응.”
스트라울이 씩 웃었다. “아저씨 어때. 꿀정보지?”
“이야.”
첼시가 감탄했다. “진짜 꿀정보네. 그리고 너 진짜 똑똑하다.”
스트라울이 다시 웃었다. “장사는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빨리 베투리아한테 가 보라고.”
마음에 드셨다면 추천&선독&댓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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