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마왕의 이유식(3)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2화-마왕의 이유식(3)
다음 날, 안나와의 싸움에 지친 지크는 새벽녘에 잠에서 깼다. 안나가 도망갔나 하고 벌떡 일어났다.
다행이다. 안나는 옆에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눈빛으로 찔러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잘 때는 여기구나. 부부 사이란 이런 건가 보다.
지크가 싱긋 웃으며 안나에게 망토를 덮어 주었다. 움푹 들어간 볼이 가엾어 어루만져 보았다. 추위에 부르튼 피부가 거칠거칠하다. 아발론으로 가면 화장품부터 사 줘야겠다.
“음?”
- 초커가 없다.
초크스칼라가 아침부터 어디 갔는지 안 보인다. 화장실 갔나. 아니면...?
“초커!”
초커의 발자국이 동굴 밖으로 죽 나 있었다. 눈이 그쳐서 당장 출발해야 하는데. 이 놈은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초커! 초커!”
지크가 어스름한 새벽의 찬 공기를 뚫고 외쳐 댔다. 지크의 외침을 들은 군사 몇 명이 동굴 밖으로 달려나왔다.
“왕자님.”
“초크스칼라가 없다.”
“찾아볼까요?”
“음.” 지크가 잠시 생각했다.
“안나가 걸을 수가 없으니... 들것은 아직 만들 수 있지?”
“네.”
“들것을 들고 번갈아가며 내려가자. 초커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마냥 기다릴 순 없어.”
“알겠습니다.”
군사들이 동굴 안에서 부스럭대기 시작했다. 지크가 팔짱을 기고 하얀 설원을 노려보았다. 초커 녀석,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이히히히히힝!”
저 멀리서 우렁찬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초커다. 지크가 화난 표정 그대로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봤다.
“이히힝! 이히히히힝!”
지크가 자길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초커가 저만치서 멈춰 섰다. 입에 허연 걸 물고 있다. 지크가 인상을 썼다.
- 설마?
“초커!”
지크가 초크스칼라를 향해 달렸다. 당장 둘 다 쳐 죽이고 싶은데 허리에 칼이 없다. 마음에 불이 일었다. 머리가 뜨겁다.
“초커!”
지크가 고함을 쳤다. 초크스칼라가 깜짝 놀라 고개를 이리 저리 흔들었다. 지크의 눈을 보더니 등을 돌렸다.
“너 이 새끼! 거기 안 서!”
“이히히힝-”
초크스칼라가 도망가기 시작했다. 발을 달리며 생각해 보니 자기가 도망가는 건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왜 저런 쬐그만 놈한테 내가 등을 돌리지?
“이히힝!”
초커가 다시 홱 뒤돌았다. 입에는 갓난아이를 물고 있었다. 초커가 위협적으로 앞발을 쳐들었다. 지크가 호통을 쳤다.
“이 놈이 감히!”
초커가 화들짝 놀랐다. “당장 그 애 내려놔. 어서!”
“크르르르...” 초커가 으르렁대며 옆으로 빙빙 돌았다. “초커. 앉아. 어서 앉아!”
“크르르...”
초커가 지크를 홱 노려보았다. 갑자기 거대한 검은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초커! 안 돼!”
말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건한 말발굽이 미친 듯이 흰 눈을 뿌려 댔다. “초커! 이리 와!”
지크가 고함을 쳤다. 초커는 본 척도 안 했다. 배낭을 맨 군사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초커! 초커! 가지 마!”
초커의 모습이 사라져 간다. 지크가 펄펄 뛰었다. “저 놈! 오기만 해봐. 콧등에 불날 줄 알아!”
지크는 초크스칼라를 버려두고 산을 내려갔다. 초커는 저 멀리서 슬렁슬렁대며 부대 꽁무니를 졸졸 따라왔다. 초커와 친한 군사들이 지크 몰래 먹다 남은 쌀을 주었다. 초커는 맨쌀을 씹어 먹으며 지크를 빤히 쳐다봤다.
지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안나의 보챔을 버티기도 힘든데 초커의 보챔까지 받아줄 수는 없었다. 어차피 갓난아이는 이 추위에 오래 견디지 못할 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크의 생각은 빗나갔다. 초커의 뒤편에는 시커먼 암늑대와 하얀 암여우들이 떼를 지어 그들을 따라왔다. 아이가 울어댈 때면 번갈아 아이를 품어 주고 젖을 먹였다. 초커는 여우와 늑대들의 꽁무니에 코를 들이대고 발정했다. 늑대들은 초커를 물어뜯으며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
"키히히힝..."
초커는 피를 줄줄 흘리며 눈에 주저앉아 상처를 핥았다. 저만치서 늑대들이 아이의 똥오줌을 핥아 주고, 어디선가 가져온 순록 가죽으로 아이를 덮어 주고는 꼭 품어서 따뜻하게 재워 주었다.
"도대체 저게 무슨 일이지?"
군사들은 서로 수군거렸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이야. 저 아이한테 신비한 힘이라도 있나?"
"설마! 구천의 새낀데."
"구천의 새끼 맞아? 왕자님 자식이 아니고?"
"딱 보면 모르냐." 군사들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저 애, 황인종 혼혈이잖아."
- 어쩌면, 구천이 베르세르크라는 소문이 맞을지도 모른다.
병사들의 마음 속에는 그런 불안감이 치솟기 시작했다. 지크조차도 밤만 되면 그런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안나가 아이에게 홀린 듯 아이를 찾아 내라 보채는 것도, 초커와 늑대들과 여우들이 아이를 저렇게 받들어 모시는 것도 예삿일은 아니었다.
- 큰일이야.
지크는 몇 번이나 칼을 들고 아이에게 다가갔지만, 여우들과 늑대들이 눈을 부라리고 노려보는 통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늑대와 여우의 수는 100마리가 넘었다. 이런 일에 아까운 군사를 낭비할 순 없었다. 지크와 안나는 살아서 아발론으로 가야 했다. 당당하게 아발론 궁에 입성하여 안나에게 공주의 관을 씌워 줘야 했다.
군사들은 절대로 안나에게 아이와 초커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나는 느끼고 있었다. 어딘가 자기 아이가 분명 살아있다는 것을.
- 대원수와 총리는 지금도 싸우고 있을까.
아마 피만 안 튀기는 전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지크와 안나가 궁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쇠약해진 오스카르 왕을 이을 계승자는 그 둘 중 하나일 테니까.
- 내가 빨리 돌아가야 한다. 왕위를 뺏기기 전에!
지크가 마른 고기를 씹으며 생각했다.
- 아이는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은 안나와 돌아가야 해, 아발론으로.
3주 후.
지크와 50명의 정예병은 무사히 스옌 산맥을 돌파했다. 몇 달 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던 그 때의 스옌 산맥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안나가 해산한 후부터, 그 엄혹했던 스옌 산맥도 온화해졌다. 눈보라는 한 번도 오지 않았고, 흰 눈이 반짝이는 산길은 어서 밟고 가시라는 듯 소복소복 발을 받쳐 주었다. 스옌 산맥의 역사에 한겨울에 눈이 오지 않았던 시기가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행운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지크는 안나가 보기 전에 초크스칼라를 멀리 쫓아 보냈다. 초커는 여우와 늑대 떼거리를 이끌고 저기 어딘가로 사라져 갔다.
지크가 초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꺼져. 꺼져! 다신 꼴도 보기 싫어!”
“이히히힝!”
초커는 지크를 흘겨보며 골짜기 뒤로 사라졌다. 어차피, 초커는 몸집이 커서 구저성에 데리고 숨기엔 거추장스러운 놈이었다. 일단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알아서 애를 키우든지 말든지. 오고 싶으면 애를 버리고 돌아오겠지.
지크와 안나는 근 2년 만에 구저성의 신혼집으로 돌아왔다. 깡촌인 구저성에서 신혼부부 하나가 집을 버렸다가 돌아오는 건 그렇게 큰일도 아니었다. 재작년과 똑같은 모습으로 밭을 갈던 황소가 지크를 향해 하품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그들을 흘긋 보고 말 뿐이었다.
지크는 안나를 안방에 눕혀두고, 폐허가 된 초가집을 쓸고 닦았다. 병사들은 이웃들을 염탐하며 지크와 안나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없는지 살폈다.
“할머니, 여기 사람들은 징병 많이 갔어요?”
“무슨 징병?”
“전쟁 했잖아요.”
“전쟁? 무슨 전쟁?”
“이다볼 왕국하고 전쟁을 했잖아요.”
“옆나라 말하는 거야? 근데 전쟁을 왜 해?”
“아르사메스 왕이 쓰러졌잖아요.”
“아르사메스가 누구야?”
이 곳은 안전할 것이란 지크의 말은 정말이었다. 병사들은 혀를 내둘렀다. 영락궁에서 이틀도 안 떨어진 곳에 이렇게 바깥세상과 단절된 시골이 있다니. 월우성의 사람들은 이런 마을이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왕자님.”
주변 마을을 염탐하고 돌아온 부하들이 말했다.
“늑대와 여우 무리들이 한밤중에 옆마을을 덮쳤답니다. 사상자는 없었다고 하네요. 바람처럼 그냥 아무 피해도 안 끼치고 훅 지나가 버렸답니다.”
“그럼 애도 거기 있나?”
“어느 과부 집 문 앞에 갓난애가 놓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과부가 애를 잘 먹이고 키운답니다. 특이하게 우리 쪽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할까요? 습격할까요?”
“......”
지크가 잠시 생각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됐다. 내가 다녀오마.”
“왕자님이요?”
“그래. 너희들은 안나를 잘 지켜라. 아이 문제는 함구하고.”
“정말... 정말 그 애를 죽이실 겁니까?”
병사들이 지크의 눈치를 살폈다. 지크가 피식 웃었다.
“왜. 그 애가 두렵나?”
병사 하나가 말했다. “아니... 여우와 늑대들이 그 애를 보살펴 준 게 마음에 걸립니다. 좀...”
다른 병사가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구천의 피를 타고나서 영험한 힘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함부로 손대지 않으시는 게...”
지크가 병사들을 흘긋 쳐다봤다. “그게 무슨 뜻이냐?”
“......”
병사들이 대답하지 못했다. 지크가 웃으며 병사들과 눈을 맞췄다. “구천이 베르세르크라도 된다는 거냐?”
병사 중 하나가 용감하게 입을 열었다. “저 애가 저렇게까지 동물들을 잘 다루는 게 아무래도, 베르세르크의 이야기하고...”
“맞습니다. 베르세르크는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엘프하고 동물들하고 같이 살고 마법도 잘 썼다고...”
“그만!” 지크가 손을 털었다. “구천은 베르세르크가 아니다!”
“정말입니까?”
“당연하다!”
지크가 병사들의 어깨를 짚었다.
“베르세르크는 오스카르 왕이시다. 그 분은 베르세르크의 화신이다. 그러니 구천이 베르세르크일 리가 없다.”
“폐하께서요?”
“그래. 폐하께서는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저렇게 명민한 군주가 되셨다. 폐하께서 베르세르크의 현신이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그래. 그러니 구천이 베르세르크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은 버려야 한다. 다들, 지금 나를 믿는 것처럼 폐하와 왕가를 믿고 따라라. 알겠나?”
병사들이 경례를 했다. “알겠습니다!”
지크는 카타스크로아만을 찬 채 홀몸으로 옆 마을에 발을 디뎠다. 그가 마을에서 살았던 지난 일주일 동안 입었던 얇은 면옷에 두툼한 털옷을 걸친 채였다. 털옷이 너무 고급스러운 게 약간 신경 쓰였다.
“음.”
지크가 눈밭에 가득가득 찍힌 여우와 늑대들의 발자국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초크스칼라가 여우와 늑대들을 이끌고 전쟁을 벌이진 않겠지만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발자국이 제일 많은 집을 따라가니 자연스럽게 소담한 초가집이 나왔다. 아침 일찍이어서인지, 마을 어디에도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퉁. 퉁.
지크가 정중하게 초가집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작은 체구의 여자가 나왔다.
“누구세요?”
이다볼 말이다. 지크가 나직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옆 마을에 사는 지크라고 합니다.”
“아... 네.”
여자가 하얀 보자기를 안고 있다. 보자기 안에 아이가 방긋방긋 웃으며 지크를 쳐다본다.
“혹시?”
“네.”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이 아빱니다. 찾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 여자가 놀란 듯, 입을 약간 벌렸다. “옆 마을에 사시는 분이셨구나.”
“네.”
“아니 전...”
여자가 짧은 푸른색 단발머리를 쓸어넘기며 눈을 굴렸다.
“아니, 여기 두신 건 그럼 왜 그러신 거예요?”
“제가 늑대들에게 아기를 빼앗겼는데 늑대들이 여기 두고 갔네요.”
“늑대들이 은화도 돌려주고 간 거라구요?”
“네?”
“아니, 은화하고 이 포대기하고, 고기하고 두고 가셨잖아요. 늑대들이 두고 갔다구요?”
여자가 인상을 썼다. 지크가 당황해서 고개를 숙였다.
“이해를 못 하겠네요.”
지크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주먹으로 돌담을 톡 쳤다. “좋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죠. 아이를 맡길 사람이 필요해서 아가씨 집에...”
“유부녀예요.”
“...아주머니 집에 아이하고 돈을 놓고 갔습니다만, 상황이 바뀌어서 다시 아이를 받으러 온 겁니다.”
“......”
여자가 수상쩍은 눈으로 지크를 노려보았다. “정말 이 애기 아빠 맞아요?”
“네.”
“못 믿겠는데요.” 여자가 등을 돌렸다. “돌아가세요.”
- 이런.
“좋습니다.”
지크가 품 속에서 은화를 꺼냈다.
“그럼 사례를 하죠.”
“네?”
“이 정도면 어때요?” 지크가 싱긋 웃었다. “더 필요하신가요? 하룻밤 보살펴 주신 것치고는 후한 것 같은데.”
“하.” 여자가 코웃음을 쳤다. “됐어요! 보아하니 애 아빠도 아닌 것 같은데.”
- 쓸데없이 목숨을 거두고 싶지는 않은데.
지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곤란하구나. 억지로 애를 빼앗으면 소문이 날 것이고. 조용히 돌려받고 싶은데.
지크가 싱긋 웃었다. “그래요, 좋습니다.”
지크가 은화 하나를 돌담 위에 챙, 하고 내려놓았다. 동전이 아슬아슬하게 돌 위에서 균형을 잡았다.
“그럼 오늘 밤만 더 아이를 맡기기로 하죠.”
여자가 인상을 썼다. “네? 뭐라구요?”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지크가 한숨을 쉬었다. “내일은 정말 데리고 갈 겁니다.”
마음에 드셨다면 추천&선독&댓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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