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의 마법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masquerR
작품등록일 :
2018.08.02 17:46
최근연재일 :
2020.05.08 00:06
연재수 :
81 회
조회수 :
9,373
추천수 :
82
글자수 :
474,693

작성
18.08.16 15:06
조회
410
추천
5
글자
13쪽

황혼이 끝날 무렵#3

DUMMY

"푸으으!"


입가로 스며들어오는 물을 뱉어낸 시오르는 고개를 겨우 들었다. 챙겨놨던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닦은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되게 엉성하게 만든 느낌이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인 집이다. 1년 정도 살았음에도 이 광경은 그에게 그닥 익숙하지 않았다.


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좁고 구석진 산 구석. 주변에 있는 나무만 조금씩 잘라놔서 약간의 평지가 있는 애매한 터. 뭐든 간에 집이라고 부르기엔 빈약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나무로 만든 집은 군데군데 부서져 있었다. 억지로 나무를 밀어 넣어서 만든 느낌이 드는 것이 누나가 만든 것은 맞다고 확신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 벨은 집구석에 놓인 이불 위에 누워있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기에 '침대 같은 건 없어도 돼'라고 말한 것도 꽤 오래전 일이었다. 방이라고는 온갖 물건을 쑤셔놓은 창고와 시오르가 자는 작업실뿐이었다. 그나마 화장실은 반절만 바깥이라는 사실이 안도감이 들었다.


"누나, 벌써 자게?"

"그럼 언제 자? 집 잘 보고 있고. 아, 약은 미리 꺼내놨어."

"고마워."


아까 식사를 했던 책상 위에는 짙은 녹색 가루가 담긴 종이가 있었다. 시오르는 그것을 보고 고민했다. 그냥 입에 넣고 물로 밀어 넣자니 기침하며 뱉어버릴 것 같았고, 물에 녹여 먹자니 목 구멍이 괴로웠다. 워낙 독한 약초라는 것은 들어왔으나, 그래도 볼 때마다 꺼리는 것은 입에 넣는 순간 밀려오는 독한 향기와 목 구멍을 찌르는 통증 때문이다.


"하, 그냥 대충 먹자."


시오르는 가루 옆에 놓인 물컵을 들면서 투덜거렸다. 가끔 아무런 징후도 없이 픽 쓰러지는 것은 위험했다. 그만큼 자신의 건강이 나쁘다는 것은 잘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온갖 볼멘소리를 내뱉으면서도 물과 가루를 섞기 시작했다. 바닥에 짙게 깔린 가루는 오래된 이끼처럼 불결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눈을 꾹 감고 약물을 삼켰다.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 했으나, 다행히 잘 참아낸 그였다. 헛구역질한 그는 입안에 남아있는 찌꺼기와 침을 컵에 뱉어냈다. 다시 책상 위에 컵을 올려둔 그는 약 냄새가 퍼지지 않도록 조리대에 있는 적당한 그릇을 컵 위에 올려두었다. 아직도 시오르는 입가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오늘은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그는 집 바깥으로 나갔다. 산책 겸 운동을 해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벨이 추천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어떤 사람이 알려준 내용이었다. 물론 벨도 이 사실을 듣고 화를 조금 내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땐 맞는 말이라며 수긍해주기도 했다. 그만큼 자기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건 좋다고 그는 생각한다.


"가능하면 풀이라도 캐둘까. 지난번에 보니까 이 근방에 괜찮은 거 많던데."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잠시 주변을 보았다. 마공학이라는 것은 단순히 마법 장비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마법과 관련된 기술은 대부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약물을 몇 번 만들어봤던 그는 조금만 더 시도해보면 이번엔 정말로 팔 수 있는 걸 만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모든 실패작들은 전부 그의 누나가 마셨고, 그 대가로 한동안 집안일을 열심히 해야만 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시오르는 누나가 지르빌로 떠날 때, 자주 지나가는 길목에 이르렀다. 유일하게 누군가 밟은 흔적이 있는 곳이기에 길이라고 하고 있지만, 그래봐야 바닥에 식물이 좀 꺾여있는 정도였다. 남들이 이 산을 지나가며 이 근방을 보았더라면 사람이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자, 새가 지저귀는 소리나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빗물처럼 쏟아졌다. 이상하리만큼 기분 좋은 느낌 덕에 복잡하게 꼬인 것 같던 머릿속도 조금은 시원해진 그였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자, 저 멀리에 서서히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목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당장 사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은 이 근방으로 짐을 가득 실은 마차나 등산을 나서는 사람들이 보이긴 했다.


마침 길가로 나온 시오르의 눈에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누나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던 사람이었기에 그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레베카 감시관님!"

"아, 시오르인가?"


한 손에 작은 책을 올려두고 읽고 있던 레베카는 시오르를 알아보고 책을 덮었다. 새하얀 로브 위에는 하늘로 날아갈 듯한 날개 한 쌍이 겹쳐진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금발을 휘달리며 약간 달려온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붕대로 칭칭 감긴 손을 잡은 시오르는 반갑게 말을 걸었다.


"요즘은 안 바쁘신가요?"

"걱정도 마. 오늘 일은 진작에 끝내고 왔어. 그보다 오늘은 약 냄새가 심하네."

"아, 방금 먹고 왔거든요. 죄송해요."


빠르게 손을 놓고 조심스럽게 입을 가린 시오르를 보고, 레베카는 피식 웃었다.


"그보다 요즘은 무슨 일 없지?"

"네. 마력 때문에 변질한 짐승은커녕, 마땅히 위협적인 동물은 못 봤어요. 기껏해야 방금 본 새 정도?"

"이래서 칼립소 지역이 좋아. 평화롭고 할 일 없고 할 일이 없고...."


갑작스레 시무룩해진 레베카는 얼굴을 부여잡고 말했다.


"너무 심심하지...."

"그래도 감시관님한테는 좋은 일 아닌가요?"

"테사르노 감시관에겐 당연히 좋은 일이지. 하지만 일도 없는데 하루 종일 동네 돌아다니기를 멈춰선 안 되니 심심하고 쓸쓸하단 말이야."

"하하...."

"나도 사람이야. 비는 시간에 책도 읽고, 이것 저것 하고 싶은데 말이야."


그녀는 책을 잡은 손을 부스럭거리며 말했다. 시오르는 레베카가 입고 있는 로브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로브도 은근 고급진 것 같았기에, 만약 자신이 가지고 있는 로브를 보여주면 무언가 알지 않을까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집으로 데리고 가는 건 실례였기에 그런 생각은 그만두었다.


"그보다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네. 혹시 시간 있니?"

"네. 같이 가면서 이야기하실래요?"

"좋아. 오늘은 심심하진 않겠네."


산 깊숙한 곳으로 걷기 시작한 두 사람 중 레베카는 먼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시오르, 요즘 마법 배우고 있어?"

"네? 아, 그런 건 아니에요. 누나가 워낙 안 가르쳐줘서 말이에요."

"...아, 그랬었지."


상당히 씁쓸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시오르가 볼까 걱정하며 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다행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기에, 시오르는 이어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마공학도 결국 마법. 그러니까 마도학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데 왜 안 알려주는지 모르겠어요."

"아니면 내가 알려줄까?"

"아뇨, 괜찮아요. 분명 누나가 이유가 있어서 필사적으로 거짓말하는 것 같더라고요. 자기가 몰래 과일 꺼내먹었던 것도 못 속여서 걱정인데, 저한테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누나 말대로 해야 할 이유가 있을 거예요."

"역시 너구나...."

"하나뿐인 가족이잖아요."


레베카는 조용히 시오르를 쳐다보았다. 자기 누나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가족 이야기를 믿는 것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녀가 시오르를 제대로 속이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도 들었다.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나중에라도 내가 잘 알려줄 테니 오늘처럼 심심하지 않게만 도와줘."

"근데 감시관님은 무슨 마법을 자주 쓰시나요?"

"나? 물을 잘 다루지.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레베카는 자랑스럽게 로브에 가려져 있던 브로치를 보여주었다. 푸른색 계통의 보석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한눈에 보더라도 사람을 매료하는 듯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로브를 덮은 그녀를 본 시오르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호라이즌 가문이죠! 저 알아요!"

"나투르 왕국이 세워지기도 전부터 있던 가문이지. 어디 가서 자랑해도 좋아. 귀족이랑 친하다는 건 흔치 않으니까 말이야."

"맞아요! 감시관님한테 마법 배우면 저도 귀족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꿈 깨라. 괜히 귀족들이 지식을 독점하는 게 아니야. 물론 네가 그 정도 실력이 생긴다면 우리 가문에서 추천서 써줄게. 그 뒤는 네가 열심히 살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르겠네."

"정말요?"

"난 할아버지처럼 깐깐하지 않아서 말이야. 좋은 혈통을 이어나간다면 그게 귀족으로서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데."


시오르는 무척이나 기쁜 표정이었다. 내년에 성인이 되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만큼 한없이 어린 모습이 레베카는 조금 가슴이 아팠다.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분명 저라면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자신감은 넘쳐서 좋네."

"하지만 전 가끔은 제가 사실 엄청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고민도 해본다고요. 사실은 제가 귀족이라던가...."


이 이후로는 시오르는 한참은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레베카는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시오르가 했던 말에 충격을 받아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웃으며 그 모습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레베카는 속으로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분명 그녀가 아는 시오르는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아마 벨과 1년간 같이 살면서 그녀에게 맞는 사람처럼 자란 것 같았다. 완전히 기억이 날아가서 말조차 할 수 없었던 만남을 기억하면, 장족의 발전이면서도 괴로운 상황이다. 어쩌면 그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그녀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억상실. 그 일이 해결된다면 과연 시오르는 행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벨은 자꾸만 시오르를 이전의 삶과 완전히 격리시키려고 하는가 두려움이 밀려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어?"


그러던 중, 시오르가 놀라는 소리를 듣고 그녀도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조금 전까지 생각했던 여자가 서 있었다. 옷은 상당히 후줄근한 반바지에 헐렁한 반팔 옷 같은 것을 입어서 여러모로 외모가 아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맹렬한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벨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나 참, 어디 갔나 했더니 이렇게 멀리 나온 거였어?"

"누나, 이 정도면 그래도...."

"그래. 솔직히 얼마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집 보라는 사람이 여기까지 나갔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 놀라서 한참을 찾았네. 일단 집으로 잠시 가줘. 마침 감시관님도 있는데 간만에 이야기 좀 해야겠다."


'감시관님' 이라는 말에 상당히 힘을 준 벨은 불편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오르는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어서 가보라는 벨의 손짓에 먼저 가 있는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시오르의 발소리가 조금씩 사라질 무렵, 레베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좀 당황스럽네...요."

"이상한 이야기 나눈 건 아니지?"

"기준은 모르겠지만, 안 했다고 확신하죠."

"칫, 그래. 테사르노 놈들은 다 그랬지. 하여튼 시오르한테 이상한 말 하면 가만 안 둬."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요? 그한테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순 없어요. 게다가 당신도 마음대로 못 날뛰잖아요."

"그건 너희들 생각하기 나름이지."


한참은 불만이라는 듯이 투덜거리던 벨은 레베카를 지나쳐갔다. 레바카는 웬만하면 꾹 참으려고 했지만, 자꾸 오늘따라 시오르의 얼굴이 떠올라서 반사적으로 입을 열고 말았다.


"우리도 그를 위해서 당신의 거짓말을 지켜주고 있잖아요. 당신은 왜 멋대로 그러는 거죠? 왜 그 녀석의 삶을...."

"...이유는 다 알게 될 거야. 너희가 절대 믿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 거고."

"좋아요. 이번에도 넘어가죠. 제발 그에게 해를 끼치진...."

"감시관이 할 말은 아니네. 안 그래?"

"저와 같은 생각을 하며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 덕에 당신도 있을 수 있는 건 잊지 말아줬으면 고맙겠어요."


벨은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말없이 시오르가 갔던 길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얼굴을 찌푸리고는 한참은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도 비참했지만, 자기처럼 가만히 있는 벨의 모습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잠시 흘러, 그녀는 다시 외로운 감시관으로서의 일을 시작했다.


작가의말
요새 날씨가 이상한만큼, 몸도 이상하네요

여러분들도 건강 조심하세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무채색의 마법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4월 휴재 안내 20.04.02 48 0 -
공지 2월 휴재 공지 20.02.20 61 0 -
공지 12월 휴재 공지 19.11.28 62 0 -
공지 금주 휴재 공지 19.10.28 20 0 -
공지 8월 격주 휴재 공지 19.08.12 54 0 -
공지 4/25 휴재 공지 +2 19.04.11 91 0 -
공지 미리 말씀드리는 공지 19.03.14 252 0 -
공지 1/17 휴재 19.01.10 76 0 -
공지 업로드 관련 18.08.02 159 0 -
81 후기 20.05.08 92 0 1쪽
80 마지막 여명#5(完) 20.05.07 77 0 14쪽
79 마지막 여명#4 20.04.30 53 0 20쪽
78 마지막 여명#3 20.03.26 27 0 15쪽
77 마지막 여명#2 20.03.19 65 0 12쪽
76 마지막 여명#1 20.03.12 35 0 16쪽
75 잘못된 시작들#8 20.03.05 49 0 17쪽
74 잘못된 시작들#7 20.02.27 44 0 16쪽
73 잘못된 시작들#6 20.02.13 39 0 16쪽
72 잘못된 시작들#5 20.02.06 43 0 13쪽
71 잘못된 시작들#4 20.01.30 43 0 15쪽
70 잘못된 시작들#3 20.01.23 37 0 14쪽
69 잘못된 시작들#2 20.01.16 42 0 15쪽
68 잘못된 시작들#1 20.01.09 42 0 15쪽
67 갈라지는 비극#3 19.12.01 32 0 12쪽
66 갈라지는 비극#2 19.11.28 30 0 16쪽
65 갈라지는 비극#1 19.11.21 31 0 13쪽
64 정말로 잃어버린 것#9 19.11.14 42 0 19쪽
63 정말로 잃어버린 것#8 19.11.07 55 0 14쪽
62 정말로 잃어버린 것#7 19.10.24 38 0 14쪽
61 정말로 잃어버린 것#6 19.10.17 36 0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