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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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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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8.08.0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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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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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2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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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재귀#1

DUMMY

적색 하늘이 점차 눈을 감듯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많은 이야기를 마치고 서로 피곤함을 느낄 무렵, 레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익숙한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투박하게 깎인 돌이 엉성하리만큼 배치된 성은 지르빌에 매번 올 때마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어릴 적에는 그런 부분을 밟고 올라가려던 아이들도 있었기에 더욱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반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며 걷던 시오르는 나무에 잠시 몸을 기대고 섰다. 먹을 거라고는 과일 몇 개가 전부여서 힘이 잘 나지 않았다. 애초에 레아 혼자 활동할 만큼의 음식만 준비했었는데, 그마저도 거미들에게 당해서 잃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하지만 그거와 별도로 너무 자신이 뒤처진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듯 보였다.


시오르는 다시 나무에서 몸을 떼고 앞으로 걸어갔다. 레아는 뒤를 돌아보며 힘겨워하는 시오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르빌까지 백 걸음도 안 남았어. 조금만 더 가자."

"으.... 빨리 쉬고 싶다...."

"우리 집까지만 가면 돼.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까 괜찮지?"


그녀의 손을 잡은 시오르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어느새 자신의 키보다 몇 배는 더 큰 성벽 앞에 서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레아가 누누이 말했듯이 시골 마을답게 높지도, 견고하지도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삽화나 글로만 보던 성벽이지만 그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레아의 말대로 경비들은 그들을 슬쩍 훑어보더니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레아를 알아본 것인지 검문조차 없었다. 피곤한 눈빛의 경비들은 그들과 같이 안쪽으로 이동했다. 슬슬 문을 닫아둘 시간이라고 레아가 설명해준 덕에 시오르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보다 이상하네. 평소보다 빨리 닫는 것 같기도 하고."

"원래 이때 닫는 거 아니야?"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 닫았거든. 뭐, 별일 아니겠지."


그렇게 말한 레아는 가방을 고쳐매고는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슬슬 마감하고 있는 가게와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자, 시오르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나이에 마을의 풍경이 신기한 건 이상한 일이지만, 그래도 신기하다고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둘러보던 그는 레아가 로브를 벗고 있는 걸 봤다.


"슬슬 우리 집이야."

"마침 기다리고 계시네."


그들 앞에는 붕대를 고쳐매고 있는 레베카가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그녀와 같은 로브를 입은 이들이 몇 명 대기했다. 간단한 책이나 마도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마법사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을 발견한 레베카는 천천히 그들 앞으로 걸어왔다. 붕대를 마저 묶은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혹시 오는 길에 무슨 일 없었지?"

"네. 덕분에 안전하게 왔어요."

"덕분에라...."


레베카는 레아의 대답에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즉시 그런 기색을 없앴다. 그녀의 중얼거림을 딱히 듣지 못한 레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단 오늘은 피곤할 테니까 푹 쉬고 있을래? 아니면 바로 따라올래?"

"오늘은 쉴게요. 시온이 지쳐 보여서요."

"그래 보이긴 한다. 시오르, 얼굴이 말이 아닌데?"

"감시관님, 근데 가서 뭐하는데요?"

"너를 어떻게 할까 결정해야 하거든. 솔직히 일일히 감시를 붙일 순 없잖아. 너희도 싫을 테고. 기왕이면 내 마음대로 하고 싶지만...."


마지막에는 뒤에 있는 다른 이들을 생각해서 일부로 작게 속삭이며 말을 흐렸다.


"늘 이런 일은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말이야. 그보다 시오르."

"네?"

"혹시 네 계약주 못 봤어?"

"누나라면 저희랑 있었던 거 아니었어요? 아, 주변 조사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상한데. 분명 아침에 마을에 있었단 말이야."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꺼림칙함을 느낄 무렵, 다행히 당사자는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다만 아무도 그녀의 모습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고개를 돌렸을 때 놀라고 말았다.


악마 중에서도 강대한 힘을 가졌다고 하는 라흐벨이 가죽으로 만든 가방을 메고 오고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위엄도, 아름다움도 느껴지지 않는 허름한 옷차림이었다. 로브도 뒤집어쓰지 않아서 그녀의 매서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지만, 그냥 바라보면 이쁜 동네 아가씨의 가출로 보였다.


"미안해. 갑자기 집에 두고 온 게 생각나서 말이야. 이것저것 챙기느라."

"누나, 그럼 지금까지 집에 있었어?"

"아니. 제대로 너희보고 있었어.... 그, 뭐라고 해야지.... 자꾸 두고 온 게 생각나서...."


매서운 눈빛이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물론 그렇더라도 삐진 듯한 모습이 되었지만, 아무도 그녀가 삐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삐지지 않은 것을 입증하듯이 시오르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애초에 이 정도는 논 것도 아니거든? 경비들이 문 닫길래 슬슬 경계 선다 싶어서 조용히 내려오려고 늦었다고."

"근데 뭐 가지고 온 건데?"

"옷이랑 장비? 책도 몇 권."

"사실상 전부 가져왔네."

"그만큼 짐이 없는 거지. 그보다 얘들은 오늘은 쉬는 거 맞지? 시오르 얘, 오는 내내 비틀거리고 숨 쉬느라 바쁘더라."


헛웃음을 짓던 시오르는 고개를 돌렸다. 테사르노 신도들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밤거리로 걸어갔다. 레베카는 조심히 들어가라고 손짓하고는 라흐벨에게 다가갔다.


"다음부터는 제때 있어 주세요. 뭘 하느라 늦었는지는 더 여쭤보지 않겠습니다."

"알아. 보나 마나 나 안 보인다고 다급하게 왔나 보네. 왜 늦었는지는 내일 말할게."

"그래서 당신은 안 따라가나요?"


레아는 집 문을 두드리고는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불 꺼진 집 안으로 몸을 밀어 넣은 그녀는 소심하게 시오르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시오르는 천천히 들어가다가 라흐벨을 봤다. 그녀는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하고는 레베카에게 말했다.


"나 같은 녀석이 민간인 집으로 가서 뭐하게? 당장 집 주인이 알면 기절할걸."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럼 내일 해가 뜨자마자 준비하고 있을 테니, 저희 측 인원이 도착하면 따라와주세요."

"그래."


고개를 돌린 레베카는 다른 이들이 떠났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점점 어두워지는 거리에 혼자 남은 라흐벨은 주변을 보았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라서 불이 켜진 가게도 없었다. 조금씩 꺼져만 가는 거리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조용히 그 모습에 묻혀갔다.


그녀도 허기나 피곤함은 느끼지만, 인간보다는 덜하다. 내일을 위해서라면 자는 게 좋지만, 오늘 그녀는 마땅히 졸리지 않았다. 그녀에겐 그들이 잠든 밤도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다. 그녀가 살아온 시간은 시오르가 살아갈 날보다 몇 배는 길었으니까.


하지만 항상 이런 일들을 겪다 보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느끼곤 했다. 그녀는 원래 이런 일을 못 잊는 성격이니까. 안 그래도 오해받기 쉬운 그녀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누굴 죽일 것처럼 일그러졌다. 사실은 울고 싶은 것뿐인데.


"누나."


라흐벨은 표정을 펴고 고개를 돌렸다. 시오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안 들어오고 뭐 해?"

"어? 뭐긴, 잠깐 생각 좀...."

"무슨 고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해. 누나가 자기 전에 내린 결정은 한결같이 형편없었거든."

"야, 솔직히 그건 네 탓이거든? 어디 사는 초짜가 도전심 발휘해서 내구성 한계치를 넘어선 제작을 시도했잖아."

"난 분명히 1할 이상의 마력을 보관할 수 있는 수정이라고 했어."

"너 진짜...."


평소처럼 화를 내려던 그녀는 무언가가 목 언저리까지 올라왔다. 이젠 가족인 척 굴 필요가 없다. 그저 계약자와 계약주로서 살아가면 된다. 1년 전부터 시작해온 놀이가 끝났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꾸만 이전의 실수들이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알았어. 잠깐 마을에 아는 사람 좀 보고 올게."

"꼭 지금이어야 해?"

"내가 생각하기엔."

"...그럼 다녀와."


시오르는 기세가 팍 꺾인 채로 뒤로 돌아섰다. 그녀가 오늘 안에 집 안으로 들어올 일이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녀가 정말 악마라면, 레아가 질겁할 일이다. 그래도 안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할 게 뻔했기에 레아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간 시오르는 문을 닫고 벽에 등을 기댔다. 혼란스러움을 지우지 못하고 자꾸만 생각만 깊어졌다. 이렇게까지 가족이 자신을 멀리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악마를 민간인들 사이로 끌고 온 것도 잘못된 일임은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그동안 자신을 돌봐준 사람을 내버려 둘 이유로는 합당치 않았다.


불이 꺼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삽화처럼 과거가 떠올랐다. 얼굴을 휘저으며 떠오른 기억들을 지운 그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계단 위에서는 조심스럽게 레아가 내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잠깐 고민 좀 하느라."

"혹시 그...."

"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 맞아. 아니, 사람은 아닌 건가."


씁쓸한 미소를 지은 시오르는 천천히 계단에 걸쳐앉았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넌 그렇게 생각해?"

"난 모르겠어. 그녀가 정말 그렇게 악독한 악마라고 생각하기가...."


말을 멈췄던 그는 머리를 움켜잡았다.


"시온, 난 모르겠어. 네가 그렇게 말하면...."

"대체 뭐가 맞는 말일까? "


레아는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잡았다. 익숙하지 않은 접촉에 당황한 그였지만, 이상하리만큼 기대고 싶은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레아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있잖아? 내가 도와줄게."


다만 이상하리만큼 레아는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시오르는 혹시 어제의 기억이 그녀를 괴롭히는 건가 의심했다. 그러자, 그는 점차 고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고민과 괴로움보다 다른 사람의 두려움을 더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책에서 나오는 영웅 심리처럼 시오르는 레아의 걱정이 훨씬 앞섰다.


그래서 조심히 고개를 돌리고 레아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켜지지 않은 집 안에서 그녀의 얼굴은 밝을 리가 없었다. 웃고 있을 때와 다르게 침울한 표정 덕에 시오르는 자꾸만 미안함이 느껴졌다. '자기가 쓸데없는 소리만 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생각하면서 침을 삼켰다.


"그럼 도와줄 수 있지?"

"응!"

"그럼 오늘은 쉬자. 역시 피곤할 때는 제대로 생각 못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어깨 위에 얹어진 손을 잡고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시오르. 그런 그의 태도에 레아는 익숙함을 느꼈다. 기억이 없는 그가 보여주는 모습이, 1년 전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마치 태어나고 자라온 환경과는 무관하게,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조금은 무거웠던 가슴이 가벼워졌다.


자신이 겪어온 삶처럼 힘들었을 그의 삶을 위로하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었다. 모순된 것 같고, 이상한 느낌을 줬지만 그녀에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그녀는 시오르가 좋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피곤한 몸을 눕힐 자리를 향했다. 두 사람이 움직이면서 생긴 그림자가 자꾸만 창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런 그림자 위에서 라흐벨은 조용히 서 있었다. 문고리를 잡을까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짐을 풀고 있거나, 잠들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서 걸어갔다. 그녀를 비추던 불빛은 기다린 것처럼 그때 꺼졌다.


작가의말

예전에 글 쓸 때는 장면 전환을 쓸데없이 넣는다고 한 소리 들었죠.

근데 다른 의미로 버릇은 못 고치나 봅니다....

그래도 오늘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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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후기 20.05.08 92 0 1쪽
80 마지막 여명#5(完) 20.05.07 77 0 14쪽
79 마지막 여명#4 20.04.30 53 0 20쪽
78 마지막 여명#3 20.03.26 27 0 15쪽
77 마지막 여명#2 20.03.19 65 0 12쪽
76 마지막 여명#1 20.03.12 35 0 16쪽
75 잘못된 시작들#8 20.03.05 49 0 17쪽
74 잘못된 시작들#7 20.02.27 44 0 16쪽
73 잘못된 시작들#6 20.02.13 39 0 16쪽
72 잘못된 시작들#5 20.02.06 43 0 13쪽
71 잘못된 시작들#4 20.01.30 43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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