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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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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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8.08.02 17:46
최근연재일 :
2020.05.0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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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04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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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귀#3

DUMMY

"안 믿는다면 너희 손해일 뿐이야."

"그러니까 믿을 리가 없는 소리를...."

"애초에 너희들의 편견이 잘못이야. 이상한 점은 좀 눈치채라고."


억울함에 목이 멘 걸 감추려고 목소리를 갑작스레 낮춘 건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한층 맑아진 눈빛에 적당히 가라앉은 목소리는 테사르도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을 일으켰다. 라흐벨은 조금씩 진정하며 말했다.


"내가 정령이라는 걸 너희도 알잖아!"

"당연히 당신은 정령...."

"아."


이상한 걸 느낀 건 연구인 직책을 가진 남자였다. 그 남자는 빠르게 가지고 있던 책을 펼치며 무언가를 찾았다.


"분명히...."

"무슨 일이지?"


옆에 있던 감시인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옆을 봤다. 책을 뒤지던 연구인은 어떤 구절을 확인하고 집행관에게 그 부분을 보여줬다. 눈을 게슴츠레 뜬 집행관 앞에, 연구인은 호들갑 떨며 말했다.


"마왕의 소멸 이후, 네메시스 님은 여러 기록을 남겼습니다. 거기선 라흐벨을 신이라고 있어요. 이 부분은 그녀의 강대함에...."

"그 부분에서 너희는 '라흐베르 부하니까 신이라고 하는 건 가당치 않다'고 당연스럽게 악마, 좀 강한 정령 정도로 해석했잖아!"

"그럼 신이었다는 소리라도 하고 싶은 겁니까?"

"그래! 지난번 사건으로 아빠한테 대부분의 권한을 박탈당했다고!"


무척이나 화내는 모습과는 다르게, '아빠'라고 말하는 태도에 테사르노를 믿는 이들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아니면 다른 이유로 더 충격을 받았을 수 있다. 그게 어떤 이유일지 아는 것은 각자 자신들뿐이다. 여전히 눈빛은 의심과 황당함으로 가득 찬 이들을 본 라흐벨은 조급한 마음에 무언가를 떠올렸다.


"내가 증거를 보여줘야 믿겠지."

"증거?"

"기다려봐."


라흐벨은 맹인이 앞을 더듬듯이 손을 움직였다. 다급했던 만큼 손가락이 움직이는 속도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 순간, 무언가가 번뜩하는 느낌이 모두에게 느껴졌다. 하지만 모두가 그것을 표현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예민했나 생각했다. 그리고 통에 열매를 집어넣듯이 손가락이 움직였다. 움직임에 따라 모두 바닥을 바라봤다.


그러자, 맨바닥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손을 뻗은 시오르였지만 레아는 즉시 그의 팔을 잡았다. 방 안에 있는 마도구들이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거대한 진동이 일어났다. 방 전체가 깊은 밤보다 더 어둡게 변하면서 한순간에 시야를 없애버렸다. 이 상황에 질겁한 마법사들은 마법으로 주변을 밝혔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바닥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난 정령이다. 뱀같이 기다란 형태였지만 입이 없다. 비늘은 제대로 붙어있지 않지만, 눈동자들이 박혀있다. 그 형태를 알아본 레베카는 식겁했다. 그건 계약 마법을 배웠더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금기 그 자체였다.


"상급 정령, 흐르그!"

"아무런 절차도 없이 그런 악마를 불렀다고?"


그와 다르게 흐르그는 용수철처럼 방방 뛰면서 즐거워했다.


"이야! 누님, 이게 몇 년 만입니까? 분명 맡은 일이 있어서 바쁘신 거로 알았는데?"

"그거 때문에 인간들 사는 곳이지."

"그럼 무슨 일로 부르신 건가요? 이래 봬도 전 전문가니까 뭐든 말씀하세요."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겁먹은 집행관은 자신의 주변에 마력을 방출했다. 방출된 마력은 검의 형태가 된 다음, 방패처럼 둥글게 뭉쳐서 그의 주변을 보호했다.


"'거짓 없는 마안'을 계약 없이 어떻게 부른 거야?"

"제 별명, 정말 마음에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필요한 사실을 알려드리죠. 저, 흐르그는 '라흐베르의 심장'이신 라흐벨 누님이 만들어지고 난 다다음, 그러니까 3번째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런 별명 쓰지 마."

"어떻습니까? 악녀 같은 초라한 별명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저 남자가 그 계약자인가요?"


흐르그는 물고기처럼 꿈틀거리며 시오르 앞으로 날아왔다. 겁먹은 시오르는 흠칫했지만 흐르그는 개의치 않고 그의 주변을 둘러봤다.


"이거 마법사로서 끝장 아닙니까...."

"겁 좀 그만 줘."


라흐벨은 흐르그의 꼬리를 잡고 자기 앞으로 끌고 왔다. 한숨 돌린 시오르와는 다르게 레아는 기절했고, 일부 마법사도 기절한 지 오래다.


"바깥사람들이 눈치 못 채게 하는 것도 힘드니까, 부탁 하나만 하자."

"옙! 아까도 여쭤봤지만 뭘 하면 되나요?"

"네 입으로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좀 설명해봐. 너 아니면 얘들도 안 믿을 것 같아서."

"이야, 하긴 저는 그 어떤 잔혹하고 믿기 힘든 일이라도 사실만을 말하는 정령. 탁월한 선택입니다! 그보다 저 오늘 좀 말이 많았나요?"

"네가 이 자리의 주인공도 아닌데 좀 수다스럽긴 하지."


손을 놓은 라흐벨은 흐르그를 다시 풀어주었다. 허공에서 꿈틀거리던 흐르그는 헛기침 소리를 내더니 그 자리에 있는 모두를 직시했다. 적어도 한 명당 한 눈동자를 할애했기에, 강렬한 시선에 압도되어 있었다. 악마라고 불릴 만큼 장엄하고 기이한 분위기를 내던 흐르그였지만, 말투는 한결같이 까불거리기 좋아하는 청년 같았다.


"저희 누님은 라흐베르 님의 형벌에 따라, 신이 가져야 했던 강대한 힘을 내려놓고 한동안 근신 처분당했습니다. 뭐, 역사를 아시다시피 원래 누님은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거든요. 매번 사고를 쳐도 반성은 했으니까 용서는 받았는데 말이죠."

"싸돌아다녔다니. 처음 듣는데."

"...어, 누님?"


당황한 흐르그는 움찔했지만, 라흐벨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알잖아. 415년 전."

"아, 마왕인가요. 하긴 그 남자가 모든 기록을 말소시키는 데에 집중했으니 그 시점 이전의 기록은 거의 없겠군요. 하여튼 그 남자가 마왕을 자청하게 만든 건 라흐베르 님도 용서 못 했던 중죄였습니다. 그래도 용서받을 방법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 있는 마왕과 그 부하들이 뿌린 모든 것을 거둬내는 게 바로 그거죠."


연구자 하나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충격적이었나요?"

"아니, 흐르그! 너 지금 내가 불러냈잖아!"

"엄마야! 이제 보니 누님, 저 현계하고 있었네요! 여기 인간들 다 심장이 멈춰서 죽기 전에 돌아가겠습니다!"

"안 그래도 그러라고 하려고 했어! 빨리 가! 와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그래도 저도 당분간 바빠서 못 올지 모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똬리를 꼬듯이 자신을 스스로를 묶은 흐르그는 점차 작게 변하더니 점처럼 작아졌다. 주변에 깔린 모든 어둠이 점 안으로 흘러들어갔고, 그와 동시에 세워졌던 모든 마법을 파괴하며 사라졌다. 자신의 마법이 파괴된 것을 본 집행관은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레베카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건 말도 안 돼...."

"사실이야. 이 정도로 강하게 나올 생각은 없었지만...."

"레아! 정신 차려!"


다급하게 레아를 깨우고 있던 시오르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라흐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흐르그 같은 상위 정령을, 그것도 테사르노가 악마라고 일컫는 이들을 계약으로 부른 것도 아니고 직접 불러냈다. 너무 생각 없이 행동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며 말했다.


"이렇게 안 하면 안 믿어줄 것 같아서...."

"다 괜찮은 거 맞지?"

"괜찮아. 이거 그냥.... 기절한 거야. 내가 책임지고 깨울게...."

"그보다 정말 그런 거야? 신이었다던가, 마왕이니 뭐니."

"내가 맹세코, 절대 거짓말 같은 건 없었어."

"...그러니까 내가 신이랑 같이 산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 그 뭐라고 하지...."


쩔쩔매던 라흐벨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입을 다물고 주변을 둘러봤다. 반쯤 넋을 놓거나 이미 기절해서 쓰러진 사람들이 널브러져있다. 어쩔 줄 모르고 손을 부들거리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다급하게 시오르에게 다가온 그녀는 그를 흔들면서 말했다.


"대충 그러려니 하고 믿어줘! 믿지, 응?"

"어.... 믿지...."


정말 마지못해 말한 듯한 태도에 여전히 불안감을 느끼는 라흐벨. 하지만 시오르는 자꾸만 과거가 떠올랐다. 민망한 일을 발각당하자, 잊어달라며 그를 사방팔방으로 흔들어댄 적이 있었다. 그때와 너무 비슷한 모습에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믿어보려고 했다. 이게 연기라면 그것대로 놀라운 일이라고 되뇌며.


"진짜로?!"

"지금 내가 안 믿으면 누가 믿어? 진짜 이게 무슨 일인가 싶긴 한데, 그래도 믿을게! 누나 거짓말 진짜 못하잖아!"


라흐벨은 시오르의 말에 얼어붙었다. 그렇게나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을 겁냈던 그가 한 말이 그녀의 마음에 와닿은 것이다. 1년 전에 그를 믿지 못한 것과 그 때문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 때문에 수치스럽고 미안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이 없더라도, 지금 그는 자신을 믿어준다고 말했다. 말뿐이라기엔 여전히 그의 말에는 배려가 남아있었다. 완전히 다른 가족임에도 '누나'라고 해줬으니까.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고, 믿을 수 없던 시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내뱉은 말이 다행히 효과는 있었다고 생각하며 안심했다. 그녀가 모두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믿어주는 사람이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눈시울까지 붉히면서 자기 앞에서 울고 있지 않은가? 이게 가짜라면, 나중에 화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그저 믿어주자.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라흐벨의 팔을 두드렸다.


어째 요즘은 누굴 위로하느라 바쁜 것 같았지만, 그는 그게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올바르게 살고 싶었다. 책에서 봤던 멋진 사람들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어떤 존재더라도, 1년간 자신을 돌봐준 이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다.


"저, 누나?"

"흐으...흐윽...."


기절한 레아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라흐벨을 토닥인다. 점점 자기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왔기에, 조심스럽게 라흐벨을 불러봤지만 우느라 바빴다. 이내 팔을 풀고 무릎을 꿇은 그녀는 시오르를 껴안았다. 시오르는 혼란스러운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기절한 사람들과 충격을 받은 사람들. 한 명도 제정신으로 깨어있지 않았다. 누군가 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이 상황을 도무지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이렇게 놓고 보니, 기억이 없는 게 다행이지 않을까'라고 그는 생각했다. 우선 라흐벨이 울음을 멈추면, 감시관과 집행관부터 정신 차리라고 붙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고 자기도 기절해있을까 고민까지 했다.


"...정말 이제 어떻게 해야지."


작가의말

평소에는 일과를 마치고 올리는게 제 일상입니다만

오늘은 일이 좀 있는지라 지금이라도 올려두고 자야겠습니다.

언제나 봐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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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후기 20.05.08 92 0 1쪽
80 마지막 여명#5(完) 20.05.07 77 0 14쪽
79 마지막 여명#4 20.04.30 53 0 20쪽
78 마지막 여명#3 20.03.26 27 0 15쪽
77 마지막 여명#2 20.03.19 65 0 12쪽
76 마지막 여명#1 20.03.12 35 0 16쪽
75 잘못된 시작들#8 20.03.05 49 0 17쪽
74 잘못된 시작들#7 20.02.27 44 0 16쪽
73 잘못된 시작들#6 20.02.13 39 0 16쪽
72 잘못된 시작들#5 20.02.06 43 0 13쪽
71 잘못된 시작들#4 20.01.30 43 0 15쪽
70 잘못된 시작들#3 20.01.23 37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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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잘못된 시작들#1 20.01.09 42 0 15쪽
67 갈라지는 비극#3 19.12.01 3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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