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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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작품등록일 :
2018.08.2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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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13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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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숨탄 5월 (2)

DUMMY

민족정신연구소 김동진 사무국장과 만남의 연결고리는 오은명의 시아버지, 박판석이었다.


김동진 사무국장은 박판석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10년 전에 뵌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민족정신연구소 설립에 출연한 게 칠대양이었지만, 박판석 어르신은 좀처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활동에는 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만나기 힘든 분인데 그날은 무슨 일인지 총회에 참석하셨습니다.”


“지금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여쭙고 싶은 말입니다. 공동 설립자 한 분이 건강이 좋지 않으신데, 가시기 전에 박판석 어르신을 꼭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저희도 백방으로 알아보는 중인데, 어디에 계신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신 일이 자립형 농촌공동체 연구였다는 거 외에는 알아낸 게 없습니다.”


오은명은 서류 가방에서 동광무역과 하코네 종합상사의 미심쩍은 거래를 통해 수상한 자금이 해외로 유출된 정황을 조사한 자료를 꺼내 사무국장에게 내밀었다.


사무국장은 시간을 들여 정 대리가 만든 보고서를 천천히 읽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문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개인이 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많이 놀랍습니다.”


“그만큼 절실했으니까요.”

오은명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박재열의 처가는 우리 단체에서도 요주의 관심 대상입니다. 이장세 의원의 조카 이지영은 동광회, 그러니까 일본말로 토코카이라는 친목 단체 회원입니다.”

“회사 이름과 같네요. 동광.”


오은명의 의미 없는 말에 사무국장은 날카로운 눈을 번뜩였다.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동광이라는 건 동쪽의 빛, 그러니까 일본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박재열 대표가 회사 이름을 동광무역으로 바꾼 게 아마 15년 전인가요?”


오은명은 머리를 부딪친 사람처럼 몸을 휘청했다. 남편이 죽고 시동생이 회사를 맡은 후 회사 이름을 바꾼다고 했을 때 그런 속내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오은명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동광회라는 모임이 단순한 친목 단체가 아닌 게 문제입니다.”

사무국장은 수업을 듣는 학생처럼 자기를 바라보는 오은명 일행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말을 이었다.


“막대한 재산을 가진 극소수 친일파 후손들이 만든 단체입니다.”

“주로 뭘 하죠?”


“단순한 친목 모임이라고 하기에는 거느리고 있는 조직이 방대합니다. 정치에 영향을 주는 시민단체 활동을 지원하는 것부터 기업 인수 합병까지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에 손대지 않는 게 없을 정도죠.”

“그렇게 여기저기 손을 뻗는 게 가능한가요?”


“제이스타홀딩스(J-star Holdings)라는 사모펀드 들어보셨나요?”

“네, 4차산업 관련 기업에 투자했다는 뉴스를 본 적 있습니다.”


“투자라기보다는 기업사냥꾼이죠. 사모펀드는 공모펀드와 달라서 자본을 출자한 투자자를 알아내기 매우 어렵습니다. 확실치는 않지만, 저희는 동광회 멤버들이 그 사모펀드의 주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사무국장의 말을 들은 오은명의 표정은 복잡해졌다.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을 하는 표정을 짓더니 강의 시간에 질문하는 학생처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이지영이 실소유한 재단법인이 사모펀드에 투자해서 수익을 내고, 그 돈은 무역회사의 거래를 위장해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해외로 빠져나간 돈은 외국 자본을 가장해서 다시 국내로 들어오게 되죠. 외국계 자본이라는 탈을 쓰고 있으면 아무래도 유리한 점이 많거든요.”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서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사무국장이 대답했다.


“예상보다 거대한 적과 싸우고 있네요.”

“그 이상일 겁니다.”

사무국장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오은명의 팔에는 소름이 돋았다.


“사모펀드를 통해 세탁된 자금은 추적이 어렵기 때문에 저희가 집중한 건 부동산이었습니다. 부동산에는 꼬리표가 남으니까요. 이장세 의원 일가가 가진 막대한 부동산도 당연히 우리 단체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의 마지막 기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도움을 청하러 왔다가 거대한 절벽에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오은명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보았다.


벼랑 끝에 서서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보는 삶을 살아왔다. 한발 한발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이젠 기어 올라갈 수도 없는 거대한 절벽을 만난 기분이었다. 오은명은 심장에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 * *


나나미와 시노는 서울 일원동에 오피스텔을 얻었다. 창고에서 도망친 후 석 달간 일본에서 은둔 생활을 마친 모녀는 한국행을 결정했다.


나나미가 한국 땅을 다시 밟은 건 3년 만이었다. 모녀는 집으로 가지 않고, 당분간 서울에서 지내기로 했다. 당연히 주민등록은 옮기지 않았다. 비싼 월세를 내는 조건으로 나나미는 흔적 없이 지낼 방을 구했다.


나나미가 집안을 둘러보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공부 다시 해보는 거 어때?”


시노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생사의 기로에 선 도망자 신세에 공부 같은 건 생각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내년에 복학할까 하는데.”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입시 다시 도전해보지 않을래?”

“다른 대학에 가라는 거야?”


“응, 경리로 취직할 생각이 아니라면 경영사무 말고 다른 걸 배우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시노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뭘 새로 배운다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염두에 둔 전공이라도 있는 거야?”


“그건 네가 정할 일이지만, 난 어릴 때 세계 지리를 배우고 싶었어. 아쉽게 대학은 못 갔지만.”

“지리학과?”


“길을 잃어도, 적어도 거기가 어딘지는 알 수 있을 거 아니야?”

“뭐야, 엉터리잖아. 지리학과 그런 거 배우는 데 아니란 말이야.”


“그냥 내 생각이야. 결정은 네가 하는 거니까.”

시노는 숨을 길게 내쉬며 생각에 빠졌다. 지하실에서 탈출해 석 달이나 두려움에 떨며 은둔 생활을 하던 통에 미래에 관한 생각은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새롭게 뭔가에 도전한다는 게 시노에겐 불안하고 두려웠다.


나나미는 시노의 그런 무기력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뭔가를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그 도전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딸에게 가르치고 싶었다.


“의외네. 한국에 오자고 한 것도 이해가 안 갔는데, 공부하라고 할 줄은 몰랐어.”


“어디든 안전한 곳이라면 크로아티아나 체코 같은 데 가서 살 생각도 있었어, 처음엔.”

“그런데 왜 가자고 안 한 거야?”


“시노, 네가 스스로 인생을 결정할 기회를 주려고. 난 곧 떠날 테니까.”

“이 집에 온 첫날이야. 시작부터 떠나는 얘기나 할 거야?”


“그런가?”

“그래. 지금은 일단 즐겨. 남이 쓰던 침대 냄새 이젠 그만 맡아도 되잖아.”

시노는 매트리스 위에 누워 몸을 쭉 뻗었다.


“뭘 전공할지는 차차 생각하더라도 공부는 일단 시작할 거지?”

나나미는 아직도 수능 공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시노는 대답하지 않고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한 다음, 시노는 다시 엄마에게 돌아와 딴소리를 했다.

“그런데, 아빠는 언제까지 그 인간 밑에서 일할 생각인 거야?”


“그날 우리를 구해준 게 네 아빠라는 거 눈치 못 챈 모양이야. 아마, 마에다에서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봐.”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난 아빠가 우리랑 같이 지냈으면 좋겠어.”


“시노, 이제 너도 다시 박재열에게 접근해보는 건 어때?”

나나미는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시노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경악했다.

“뭐? 엄마 지금 제정신이야?”


“그렇게 흥분할 거 없어. 제 발로 찾아온 널 지하실에 다시 가두지는 않을 테니까.”

“너구리 굴에서 나오라고 그렇게 소리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다시 거길 가라고?”


“직접 만나지는 않더라도 전화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나나미는 태연하게 반문했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엄마 암세포 혹시 머릿속으로 전이된 거 아니야?”

시노의 당돌한 질문에 나나미는 아이처럼 밝게 웃었다. 시노의 얼굴엔 엄마가 정말 미친 건 아닌지 걱정하는 표정이 가득했다.


“언제까지고 도망만 다닐 수는 없어. 상대가 찾아오기 전에 먼저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지.”

“정상이 아닌 거 같아, 엄마.”

시노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아무래도 어렵겠지?”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럼 내가 가서 만나볼까?”

나나미는 혼잣말하듯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엄마가 왜?”

“네 아빠가 한 말 기억 안 나? 박재열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말.”

“그런데?”

“혼자 짊어지기엔 버거울 거야. 이젠 내가 좀 도와줄까 해서.”


시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서더니 욕실로 향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

물은 뜨거웠지만, 시노는 기다리지 않고 그냥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 * *


수안보 온천에서 각자 사우나를 즐긴 후 규진과 유엔은 H 리조트 객실로 돌아왔다.

“나나미 왜 한국으로 돌아온 걸까? 쫓기는 신세를 자청하다니 말이야.”

유엔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규진에게 물었다. 유엔은 사우나에서 내내 시노가 한국에 돌아온 이유만 고민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나나미, 몸은 괜찮은 걸까?”

“엄마가 보낸 이메일 보면, 히데오 죽인 만두귀 재판이 곧 끝난다고 했어. 아무래도 정당방위 상황이 참작되어 형량이 얼마 안 나올 거라고 예상한다면서.”

“게다가 사건의 배후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다지. 정말 분통 터지는 상황이야.”

“그래서, 온 게 아닐까?”

유엔은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흔들었다.


“요즘엔 연락도 뜸해져서 나나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규진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동광무역 조사 들어가면 불한당들 손발이 묶일 거라고 기대했는데, 아직도 쌩쌩한가 봐. 박재열 부하들 여전한 모양이던데.”

“생각했던 것보다 쉽지 않네.”


“일단 시노에게 이메일 쓸게. 답장 기다리고 있을 거야.”

유엔은 테이블에 노트북을 펴더니 소파에 앉았다.


[제목: 소식 21호]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야.

올해 봄엔 비가 자주 내렸어.

밤에 손빨래한 옷이 아침까지 마르지 않아 축축한 옷을 입고 여행하는 날이 많았어.

갑자기 지난겨울 얼어붙었던 빨래가 생각났어.

기억나니? 세탁기가 돌다가 얼어붙은 빨래를 토해서 베란다 바닥에 엉겨 붙었잖아.

우리 빨래, 이젠 다 말랐겠지?

언제쯤 바닥에 붙은 그 빨래 떼러 갈 수 있을까?

빈틈이 보일 때까지 잠시만 피해 있자고 시작한 여행이었는데

끝이 안 보인다.

그래도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한번 반격당할 때마다 한 명씩 죽어 나가는 거 이젠 견디기 힘드니까.

힘내.

그리고 부러워할 거 없어.

나 엄마 배 속에서 나왔을 때 그대로니까.

2018.05.09. 11:53



“웬일이야, 이번엔 용건만 간단히가 아니네.”

“이번 용건은 시노의 마음을 달래주는 거니까.”

유엔은 하수를 가르치는 사부처럼 규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 배 속?”

“눈치 없는 질문은 그만하고, 스스로 생각을 좀 해봐. 생각을.”

유엔의 말투는 어느새 아이를 혼내는 선생님처럼 변해 있었다.


작가의말

유엔은 날마다 머릿속으로 작전 계획을 세웠습니다. 종일 걷는 동안 수없이 많은 가능성을 고민하고 비교하며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생각이 너무 깊어지면 간혹 상상을 현실로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겉으로 강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을 잘 모르기 마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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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2부 5화. 다락방 비밀의 문 19.05.15 52 1 14쪽
102 2부 4화. 새덕 마을의 비밀 19.05.13 53 1 15쪽
101 2부 3화. 푸른 곤룡포 19.05.09 46 1 12쪽
100 2부 2화. 광산의 실 소유주 19.05.08 51 0 15쪽
99 2부 1화. 사고로 위장한 살인 19.05.07 56 0 13쪽
98 단편 외전-4. 유엔의 각성 19.05.02 59 1 13쪽
97 단편 외전-3. 사악한 빙의 (하) ※공포 주의※ 19.04.30 51 1 13쪽
96 단편 외전-3. 사악한 빙의 (상) ※공포 주의※ 19.04.29 61 1 13쪽
95 외전-2. 크고 예쁜 도토리 19.04.28 55 1 13쪽
94 외전-1. 죽은 자의 혼령 19.04.26 65 1 12쪽
93 32장 마지막 질문 (1부 최종화) 19.04.25 70 2 16쪽
92 31장 그녀가 있던 자리 (2) 19.04.24 71 2 14쪽
91 31장 그녀가 있던 자리 (1) 19.04.23 69 2 15쪽
90 30장 풀잎에 달린 이슬 (2) 19.04.21 70 2 15쪽
89 30장 풀잎에 달린 이슬 (1) 19.04.20 68 1 14쪽
88 29장 사건의 전말 (3) 19.04.19 82 1 12쪽
87 29장 사건의 전말 (2) 19.04.17 66 0 11쪽
86 29장 사건의 전말 (1) 19.04.15 72 1 12쪽
85 28장 염곡동 살인사건 (9) 19.04.12 75 0 13쪽
84 28장 염곡동 살인사건 (8) 19.04.10 63 0 13쪽
83 27장 박쥐 사냥 (3) 19.04.08 71 1 13쪽
82 27장 박쥐 사냥 (2) 19.04.05 82 0 12쪽
81 27장 박쥐 사냥 (1) 19.04.03 76 0 11쪽
80 26장 위험한 갈림길 (2) 19.04.01 72 0 13쪽
79 26장 위험한 갈림길 (1) 19.03.29 78 1 13쪽
78 25장 볼모가 된 세자 (3) 19.03.27 73 0 11쪽
77 25장 볼모가 된 세자 (2) 19.03.25 77 1 13쪽
76 25장 볼모가 된 세자 (1) 19.03.23 85 0 12쪽
75 24장 가짜 열쇠 (3) 19.03.20 80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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