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호랑이 형님
고을과 소을의 안내를 받아 원래 있던 대기록원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내가 문밖으로 나오고 나서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착하자 요한 씨가 샹들리에 밑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고을과 소을은 요한 씨에게 묵례로 인사하고 차원 이동로를 통해 어디론가 떠났다.
"그래서 초월자들의 장난에 엮인 소감은?"
요한 씨는 알고 있었구나.
"성격이 개차반이더라고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요한 씨는 피식 웃더니 담뱃불을 끈다. 꽁초는 펜을 휘둘러 지워버린다.
"하라익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넌 한유리의 이야기를 바꾼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준비는 돼 있겠지?"
담담한 요한 씨의 말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가서 쉬어라."
요한 씨는 또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진다. 내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이 어떻게 다가올지는 모른다. 그래도. 준비는 해야겠지. 그 준비 제1. 일단 자기. 황금의 펜을 휘둘러 내 방 침대로 순간이동 한다. 옷만 잽싸게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간다. 아. 포근하고 좋다.
"김유빈! 일어나!"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벌써 아침이야? 으. 아직 정신이 명료하지 않다. 기지개를 피고 옷을 갈아입는다.
"일어나세요!"
청하도 같이 왔군. 발을 빠르게 움직여 현관문을 연다. 문 앞에는 유리와 청하가 떡 하니 서 있다.
"빨리 가자고!"
유리가 내 팔을 붙잡고 복도를 걸어간다. 나야 한숨을 쉬고 끌려가는 수밖에. 청하가 내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온다.
전투팀 사무실. 내가 일하는 공간. 모든 이야기가 모이는 곳. 무수히 많은 책장에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나와 유리 청하는 각자 자리를 잡고 악마를 찾기 위해 눈을 부라리며 책들을 바라본다.
"저기 보여요!"
청하가 소리친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청하의 머리 위에 검게 물들어가는 책이 보인다. 손을 뻗어 닿을 높이는 아니다. 펜의 힘을 이용해 몸을 공중에 띄운다. 손을 뻗어 책을 짚고 땅으로 내려온다.
녹색 표지의 책. 쓰여있는 제목은 「Tiger Brother」. 호랑이 형님. 내가 기억하기로는 호랑이를 만난 나무꾼이 호랑이에게 `당신은 저의 잃어버린 형님입니다.` 하는 내용으로 알고 있다. 저자는 `Bang Jeonghwan`. 방정환? 그 소파 방정환?
"무슨 책이야?"
유리에게 책을 보여 준다. 유리도 저자를 보고 놀랐는지 눈동자가 커진다.
"그 방정환?"
"맞지 않을까?"
"저도 보여 주세요!"
청하의 요청에 책을 건네준다. 청하는 책을 넘겨 내용을 쓱 훑더니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음.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어요."
그래. 넌 그런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아. 나와 유리는 동시에 한숨을 쉰다. 몰라도 문제는 없다. 나는 내용을 확실히 알고, 유리도 알고 있는 눈치다. 세 명 중 두 명이 알면 됐지. 뭘 더 바라겠나.
"들어가서 알아가면 돼."
유리가 책을 펼친다. 나와 청하는 자연스럽게 책 위에 손을 올린다. 유리가 황금의 펜을 들어 올린다. 펜이 춤을 춘다.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책에서 강한 빛이 일어나 우리를 삼킨다.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긴다.
"이야기여, 사서를 받아들여라."
그리고 바닥에는 책 한 권만이 남는다.
사서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야산. 나무들이 높이 솟아 있으며, 땅에는 풀이 잔뜩 돋아나 있다. 작은 관목들과 땅에 고개를 내민 뿌리들. 관리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여긴 어디예요?"
이야기의 내용을 모르는 이청하가 질문한다.
"아마 조선 시대 어느 산골."
이청하의 질문에 대답하며 김유빈이 황금의 펜을 휘두른다. 곧 김유빈의 손에 검은 표지의 마법서가 나타난다. 한유리도 펜을 휘두른다. 이야기를 덮어써서 기타를 불러내어 손에 쥔다.
김유빈은 마법서를 펼치고 마법의 언어를 읊조린다. 곧 사서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다. 기본적인 준비가 끝나고 김유빈을 선두로 일행들이 움직인다.
"목표는 나무꾼 또는 호랑이. 둘 중 하나를 찾아야 해."
수풀을 헤치고 발을 조심히 뻗으며 걸어나간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발밑에 솟아오른 나무뿌리. 날카로운 바위. 푹 꺼지는 흙. 김유빈은 발밑을 살피며 걸어나간다.
앞서가던 김유빈이 손을 들어 올린다. 정지라는 의미가 있는 신호. 뒤에서 따라오던 한유리와 이청하가 멈춰 선다.
김유빈은 수풀을 살짝 밀고 앞을 살핀다. 그곳에는 해진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도끼로 나무를 치고 있었다. 김유빈은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무꾼. 아직 나무를 베고 있는 것을 보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은 모양이다.
"나무꾼을 찾았어. 이제 호랑이를 찾아보자."
마법으로 나무꾼의 위치를 항상 느낄 수 있게 해놓은 김유빈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유빈 선배."
앞으로 나아가던 김유빈을 이청하가 부른다. 김유빈은 고개를 돌려 이청하를 바라본다. 이청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킨다. 김유빈과 한유리는 이청하가 가리키는 곳을 본다.
땅에는 발자국이 찍혀있다. 김유빈도 한유리도 발자국만 보고 주인을 알아맞힐 지식은 없다. 그러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둘은 이 발자국을 호랑이의 것으로 단언한다.
"일단 따라가 볼까?"
"그게 좋을 거 같아."
의견의 합치를 본 사서들은 발자국이 향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호랑이라는 맹수의 존재를 의식했기에 걸음은 더 느려진다.
"동굴이다."
산 중턱 즈음에는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이 있다. 호랑이의 발자국은 그 동굴로 향하고 있다. 한유리가 앞으로 나서 기타 줄을 튕긴다. 기타에서부터 시작된 음파는 동굴로 들어간 뒤 반향을 일으켜 튀어나온다. 한유리는 그 소리를 유심히 듣는다.
"일자로 된 동굴이야. 안에는 아무도 없어."
"그런 것도 가능했어?"
한번도 본적 없는 한유리의 능력에 김유빈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한유리는 콧방귀를 뀌고 잘난 척하듯 어깨를 편다. 이청하도 한유리의 능력에 감탄한다.
"그런데 호랑이가 동굴 안에 없으면 어디 있는 거죠?"
이청하의 질문에 김유빈과 한유리의 머릿속에도 작은 의문이 생긴다. 동굴 밖으로 나오는 발자국은 없는데 동굴 안에는 없다. 그럼 어디 있는 거지?
사서들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진다. 주황색의 몸에 검은 줄무늬. 이마에는 왕자 문양.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와 날카로운 발톱들. 산중 호걸.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던 호랑이는 땅에 내려와서 코를 바닥에 대고 냄새를 맡는다.
"음. 사람 냄새를 맡았는데······."
호랑이의 말에 사서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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