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토끼는 토끼면 반칙
김유빈은 투명한 몸을 가진 상태로 바위 위에서 자는 토끼에게 접근한다. 밑에서 한유리와 이청하가 바라보는 가운데 김유빈은 마법으로 손에서 불꽃을 만들어낸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하얀 토끼의 꼬리에 불꽃을 가져다 댄다.
털이 타는 냄새가 느껴지자 김유빈은 얼굴을 찌푸린다. 토끼는 아직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는지 곤히 자고 있다.
"어?"
꼬리 털의 끝 부분이 까맣게 타들어 가자 토끼가 눈을 뜨고 코를 벌름거린다. 타는 냄새를 맡은 토끼가 누운 채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으아아아! 뜨거워!"
그제야 뜨거움을 느낀 토끼가 펄쩍 뛰어오른다. 3초 정도 공중에 머물렀다가 땅에 내려온다. 토끼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꼬리를 붙잡고 평원을 내달린다. 땅을 구르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른다.
토끼가 달려가는 것을 본 김유빈은 바위에서 내려와 밑에서 기다리던 한유리와 이청하에게 다가간다.
"어땠어?"
"빠르긴 했는데 말이지."
"거북이보다는 느려 보였어요."
"역시 그렇지?"
사서들은 아직도 흙바닥에 구르고 있는 토끼를 바라보고 한숨을 쉰다. 거북이보다 느린 속도. 이대로라면 토끼가 잠이 들지 않아도 거북이가 이길 것이다.
"방법을 생각해 보자."
세 명의 사서들은 고민에 잠겨 있는 동안, 토끼는 꼬리를 문지르며 바위로 다시 올라온다. 짧게 투덜거리고 다시 바위 위에 누운 토끼는 금세 잠에 빠져든다.
김유빈은 그런 토끼를 바라보고 한숨을 쉰다. 이청하와 한유리의 표정도 좋지 않다.
"토끼가 저렇게 게으름뱅이라니."
"그러니까 시합 당일에도 잠이나 자고 있었지."
한유리와 김유빈은 동시에 한숨을 내쉰다.
"토끼를 성실하게 만드는 건 어떨까요?"
이청하가 손을 올리며 말한다. 김유빈과 한유리의 시선이 이청하에게 모여든다. 이청하는 갑자기 모여든 시선에 어깨를 움찔한다.
"가능해?"
"권능을 쓰면 될 거 같아요."
한유리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한다.
"괜찮겠어?"
김유빈의 질문에는 걱정이 담겨 있다. 이청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대답한다.
"그래. 뭘 그리 걱정하냐? 알아서 하겠지."
한유리는 약간 비꼬는 말투를 사용한다. 김유빈은 그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특별히 말을 하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이청하가 권능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청하는 자리에서 일어난 눈을 감고 자신에게 집중한다. 자신의 본질을 끄집어낸다. 눈을 떴을 때, 눈동자는 황금색으로 빛난다.
"선배. 펜 좀 빌려주세요."
이청하가 김유빈에게 손을 뻗는다. 김유빈은 들고 있던 펜을 건네주려 손을 뻗는다.
"내 거 써."
김유빈의 손을 막으며 한유리가 말한다. 한유리가 자신의 펜을 이청하에게 건넨다. 누구의 펜이든 중요하지 않은 이청하는 한유리의 펜을 건네받는다. 김유빈은 확실히 이상하기 짝이 없는 한유리를 잠시 노려본다.
"가볼게요."
이청하는 한유리의 펜을 몇 번 휘둘러보다 토끼가 잠들어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간다. 하얀 털을 태양에 데우고 있는 토끼에게 다가간다. 잠들어 있는 토끼를 바라본 이청하는 짧게 침을 삼킨다.
황금의 펜이 휘둘러진다. 이청하의 손을 따라 펜이 휘둘러진다. 이야기가 변하며 세상에 작용한다. 잠들어 있는 토끼가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다. 그 눈동자는 황금빛으로 번뜩인다.
"다음 주가 시합인데 이러는 건 좀 아니겠지?"
몸을 일으킨 토끼는 바위에서 내려와 달릴 준비를 한다. 자세를 낮추고 허벅지에 힘을 준다. 토끼의 발이 땅을 박찬다. 하얀 몸이 푸른 벌판을 질주한다. 토끼는 온 힘을 다해 달린다. 태양과 바람을 관객 삼아.
토끼가 달리는 것을 확인한 이청하는 다시 바위 밑으로 내려간다. 김유빈은 내려온 이청하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이청하는 머리를 긁적인다.
"어떻게 한 거야?"
팔짱을 끼고 있는 한유리가 이청하에게 묻는다. 이청하는 검게 변한 눈동자로 대답한다.
"제 본질인 투쟁을 심었어요. 토끼는 이기고자 노력을 할 거예요."
"그래도 거북이보다 느린 게 문제지만."
한유리는 이청하의 뒤편으로 보이는 토끼의 달리기를 보며 말한다. 한유리의 말대로 토끼는 거북이보다 느리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시합에 나간다면 거북이를 앞질러 가지는 못하리라.
"그러면 거북이한테 가자. 거북이의 달리기를 늦추는 게 빠를 거야."
김유빈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한유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청하에게 황금의 펜을 건네받은 한유리가 기타를 연주한다. 사서들의 앞에 오색으로 빛나는 음표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타고 갈 거지?"
이청하의 질문에 김유빈이 고개를 끄덕인다. 딱히 타고 싶지는 않지만, 거절할 구실을 찾지 못했다.
세 명의 사서를 태운 음표가 하늘을 날아오른다. 태양을 받으며 거북이의 집이 있는 강가로 향한다. 거북이는 아직도 달리기를 연습하며 시합을 준비 중이다.
"내려가자."
김유빈의 말에 한유리가 기타를 연주하여 음표를 땅에 내려놓는다. 사서들은 음표에서 내려 달리고 있는 거북이를 바라본다. 아무리 봐도 토끼보다 빠른 그 거북이를.
"어떻게 할까? 다리라도 부러트릴까?"
"아예 시합에 참여 못 하게 하면 안 돼."
"어렵네요."
사서들은 벌판을 달리며 연습 중인 거북이를 바라보고 고민에 빠진다.
"마법으로 어떻게 못 하나요?"
이청하의 말에 김유빈은 마법서를 뒤적인다. 한참이나 마법서를 넘겼지만, 김유빈은 고개를 젓는다.
"쓸만한 마법이 없어."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김유빈을 바라보는 한유리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쳐져 있다. 김유빈은 아무리 보아도 적응되지 않는 한유리의 모습에 몸을 살짝 뒤로 움직인다.
"제가 또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청하가 손을 들어 올리자, 김유빈과 한유리의 눈이 모여든다.
"방식은?"
"거북이한테서 투쟁심을 빼앗을게요. 의욕이 없으니 달리지 않을 거예요."
그 방식이 괜찮다고 생각한 김유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펜을 던져준다. 이청하는 김유빈의 펜을 잡고 눈을 감는다. 집중하여 자신의 본질을 끌어내고 눈을 뜬다. 이청하의 눈은 황금빛으로 물든다.
"얼른 가 봐."
달리고 있는 거북이에게 이청하가 다가간다. 한유리는 이청하의 손에 들린 김유빈의 펜을 노려보며 얼굴을 찌푸린다.
거북이에게 다가간 이청하가 황금의 펜을 휘두른다. 달리던 거북이가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완전히 멈춰선 거북이는 머리를 긁적이고 하품을 하며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간다.
"아. 귀찮다. 갑자기 하기 싫어지네. 그냥 시합 때나 나가야지."
그렇게 거북이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이청하의 일을 본 김유빈은 박수를 치고, 그런 김유빈을 바라보는 한유리의 표정은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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