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록원의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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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justme
그림/삽화
Bartolomé武本
작품등록일 :
2018.09.03 12:51
최근연재일 :
2019.02.19 11:46
연재수 :
144 회
조회수 :
29,855
추천수 :
674
글자수 :
435,443

작성
19.02.09 11:35
조회
88
추천
2
글자
7쪽

135화 사랑은 잔혹하게

DUMMY

"유리!"

"언니!"

나와 청하는 쓰러진 유리에게 달려간다. 유리는 바닥에 쓰러져 몸을 떨고 있다. 눈동자는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정신 차려!"

유리를 붙잡고 흔든다. 손에 뭔가 만져진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것. 어디선가 느껴본 감각. 손을 들어 살펴본다. 빨간 무언가가 내 손에서 흐르고 있다. 피.

다시 유리를 보니, 유리는 배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기억났다. 유리의 이야기에 들어갔을 때. 강도의 칼에 찔렸던 유리. 지금 유리의 상태는 그때와 똑같다.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온다. 청하는 어쩔 줄 몰라서 눈만 크게 뜨고 있다.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

"이청하! 의무실로 가서 세실라 박사님 불러와!"

"네. 네!"

청하는 내 말에 정신을 차리고 황금의 펜을 휘두른다. 청하의 모습이 사라진다. 책장들 사이에 남은 것은 나와 유리뿐. 유리는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생각하자.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그때 어떻게 했지?

"쓰러진 한유리 양의 손을 잡아 주었죠."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유리의 움직임이 멈춘다. 시간을 멈춰본 경험이 있기에 금방 눈치챘다. 지금, 시간이 멈춰 섰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본다.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 남성이 서 있다. 모순의 칼라모일. 아마도 시간을 멈춘 장본인.

"칼라모일?"

"오랜만이군요."

칼라모일은 대답이 아닌 인사를 건넨다. 초월자는 함부로 대기록원에 접근하지 못한다. 그런데 칼라모일이 왔다는 것은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은 아마 유리와 관련 있겠지.

"그것이 맞다."

또 다른 목소리의 주인은 안경을 낀 남자. 대기록원의 원장, 하라익. 그리고 그 뒤로 다른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예전에 봤던 초월자다. 사랑의 벨파.

초월자가 세 명이나 한자리에 모였다. 이건 여간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 나는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못하고 초월자들을 바라본다.

"설마 이게 그 책임인가요?"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있다. 근원의 대기록원에서 하라익이 말했던 책임. 유리의 이야기를 바꾼 그 책임. 지금 이것이 그 책임이냐고 묻는 것이다.

하라익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이것이 그 책임이라고. 하지만 왜? 왜 내 책임을 유리가 지는 거지?

"그것은 유리의 특이성 때문이지."

입을 연 것은 벨파. 사랑의 초월자. 그러고 보니 유리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곳에 온 건가?

"유리는 원래부터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어."

그 사실은 알고 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유리의 이야기를 수정했었지. 그리고 지금 그 책임이 나타나는 거고.

"본질을 깨닫는 것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본질을 받아들인 유리는 죽음을 받아들인 거야."

"하지만! 제가 죽음을 받아들일 때는 이렇지 않았는걸요?"

나는 죽음을 받아들일 때 그저 끙끙 앓았을 뿐이다. 침대에 온종일 누워서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유리처럼 그때의 상황을 반복하지 않았다. 이건 청하도 마찬가지.

벨파는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칼라모일도 마찬가지로 내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유리가 사서에 적합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지?"

하라익이 입을 연다. 유리가 사서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은 들은 적 있다. 세실라 박사가 말해줬었지. 영혼이 상해서 사서가 될 수 없었다고. 그걸 요한 씨가 어떻게 해결했다고. 그럼?

"네 생각이 맞다. 메꾸어진 상처가 다시 벌어진 거야."

"제 탓인가요?"

하라익은 고개를 젓는다.

"언젠가는 이럴 운명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자가 죽는 것처럼, 영혼의 상처는 다시 벌어지기 마련이지."

"하지만 여태까지 잘 지냈는걸요!"

"스스로가 버티고 있었으니까."

벨파가 옅은 미소를 품은 채 대답하며, 유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대로 유리를 바라본다.

"자신의 본질을 깨달았을 때, 각성하면 이렇게 되는 걸 유리는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유리는 선택했어. 자신의 끝을."

이해 못 하겠다. 도대체 왜?

"널 사랑했으니까."

"에?"

"자신을 알지 못하는 자는 타인을 사랑할 수 없지. 유리는 널 사랑하기 위해 본질을 깨웠고, 그로 인해 영혼의 상처가 벌어진 거야."

벨파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듣고는 있는데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사랑하는데 죽는다고요?"

"사랑은 때론 잔혹한 거야. 완전하지 못한 자들의 사랑은 더욱 그렇지."

벨파는 내가 쉬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어떻게 못 합니다. 그저 승천만이 방법입니다."

칼라모일은 승천을 입에 담았다. 사서의 끝을 입에 담았다. 유리가 더는 사서로 남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카프카가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가 되어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

나는 반응을 할 수 없다. 유리기 죽는다니. 이미 죽긴 했지만. 그래도 승천은 또 다른 죽음과 다름없지 않은가?

"김유빈 군.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끝은 죽음인 것처럼, 모든 사서의 끝은 승천입니다. 한유리 양은 그것을 조금 일찍 맞이할 뿐입니다."

칼라모일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공허한 소리가 되어 울려 퍼질 뿐.

"이제 다시 시간이 흐를 거다. 선택은 너의 것이다."

하라익의 말을 마지막으로 초월자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흐른다. 쓰러져 있는 유리는 피를 흘리며 신음한다. 전투팀 바닥에 깔린 카펫이 피로 물들어간다.

"선배!"

뒤에서 청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청하는 한 손으로 세실라 박사의 팔을 꽉 움켜쥐고 있다. 세실라 박사도 유리의 소식을 들었는지 잔뜩 놀란 얼굴로 청하의 손에 끌려온다.

"어떻게 된 거야!"

세실라 박사가 소리친다. 그 외침에 나는 답 할 수가 없다. 그저 고통스러워 하는 유리를 바라볼 수밖에.

"선배! 대답 좀 해주세요!"

청하가 나를 붙잡고 흔든다. 나는 역시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아직 내 생각조차 정리되지 않았는데. 초월자들의 말을 이해하고자 노력 중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겠는가.

그동안 세실라 박사는 유리의 상태를 확인한다. 상처를 살펴보고 유리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만.

"정신 차리세요!"

뺨에서 아픔이 느껴진다. 내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청하가 보인다. 정신이 든다. 초월자들이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쓰러져 있는 유리에게 다가간다. 세실라 박사가 비켜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안 것이겠지.

"다른 사람들 좀 바다로 불러와 주세요."

쓰러진 유리를 안아 올리며 세실라 박사에게 부탁한다. 세실라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펜을 휘두른다. 청하도 나를 바라보더니 펜을 휘둘러 사라진다.

옷에 피가 묻기 시작한다. 따뜻한 온기와 축축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유리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황금의 펜을 휘두른다. 목적지는 이야기의 바다. 곧 유리의 이야기가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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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화 사랑은 잔혹하게 19.02.09 89 2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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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120화 나무 호미를 든 팥쥐 19.01.23 97 2 7쪽
119 119화 콩쥐, 팥쥐 19.01.22 100 3 7쪽
118 118화 사뭇 진지한 대화 +1 19.01.21 99 3 7쪽
117 117화 불길한 기분은 언제나 들어맞는 법 ​ +1 19.01.19 197 3 7쪽
116 116화 물의 전차 19.01.18 117 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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