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함
자신이 잘못하였음을, 사과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고 나기를 무뚝뚝한 아비는 되레 엉뚱한 소리로 연이의 속을 또한번 긁어대는 것이었다.
“아이구. 그러든가? 누가 말려? 어느 집 딸년은 재주가 좋아 비단이며 뭐며 잔뜩 싸 보내는 놈이 있는데, 너는 그런 재주도 하나 없는 것이 어디서 큰 소리야, 큰 소리가?”
너무도 기막혀 헛웃음을 흘리는 연이였다. 으흐흐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웃는 웃음이었다.
“엉덩이 흔들었다며 죽일 듯이 할 땐 언제고, 이젠 그런 거 안 했다고 나 구박하는 거야?
아부진··· 아부지는 말이 안 통해. 아부지는 혼자 살아야 되는 사람이야. 남한테 상처 줄 줄만 알았지 남의 마음따윈 요만큼도 알지 못하잖아···.
그런 사람이 혼자 살지, 왜 울 엄마랑 혼인해서 나를 낳은 건데? 왜?
울 엄마 아부지 안 만났으면 이런 산골짜기에서 혼자 애 낳다 죽는 일은 없었을 거고, 나도 아부지 자식으로 안 태어났을 거 아니야?
그럼 나도 요 모양 요 꼴로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왜? 왜 나를 낳았는데? 왜 아부지가 내 아부지냐고? 왜--?!”
발광하듯 연이가 온 몸으로 소리를 지르며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통곡하는 딸아이의 모습에 거칠 것 없는 사내 장 포수가 할 말을 잃고 오두망찰 서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장 포수의 눈 주위가 붉어졌다. 내자가 죽은 것이, 자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거라는 딸아이의 말이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이다.
영민하기 이를 데 없는 딸자식이, 높으신 양반님네들까지도 모두 감탄해마지 않는 잘나고 잘난 내 자식이 이 깊은 산골짜기에서 들짐승처럼 살고 있는 것 역시 모두 아비인 자신을 잘못 만난 탓이라는 자각에 내장육부가 베이고 도려내지는 듯 아프고 또 아팠다.
"고만 울어. 기운 빠지면 네 손해지···. 고만 울라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기는 했으나 더는 어쩔 방법을 알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데, 몸부림치며 울던 딸이 기어이 피를 보고야 말았다.
반나절이면 수북히 마당으로 쌓이곤 하는 낙엽을 모으기 위해 한쪽에 놓아둔 갈퀴가 딸아이의 몸부림에 쓰러지며 손을 베고 만 것이다.
작고 여린 조막만한 하얀 딸아이의 손에 선명한 붉은 피가 맺히는 것을 본 장 포수의 마음이 다시 한번 찢겨나갔다.
다가가 끊어낸 제 옷고름으로, 싫다 하는 딸아이의 손을 힘주어 붙잡고는 상처를 감싸주며 장 포수가 중얼거렸다.
“이게 뭐하는... 애비가 무식하다고 너까지 이래? ....머리 자른 건 애비가 잘못했어.... 아까도 그렇고....
앞으론 안 그럴 테니 너도 그만 울어. 세상에서 제일 바보들이나 이러는 거야. 지 몸 함부로 하는 거, 그게 천하의 제일 불효막심한 짓인거 몰라?
명색이 글 배웠다는 것이 그런 간단한 것도 몰라서야 어찌 글 배웠다는 소리를 할래?”
퉁명스러울망정 처음 딸아이에게 해 보는 사과였다. 아비의 사과에 누그러진 것인지, 아니면 진이 빠져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연이의 울음소리가 한결 작아졌다. 아무래도 후자인 모양이었다.
그런 딸아이를 막막한 심정으로 장 포수가 쳐다보고 있는데 밖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
“무슨 일들이십니까?”
처음 보는 무관에게로, 그리고 익숙한 고을 이방에게로 장 포수의 묻는 얼굴이 옮겨갔다.
이방 역시 사정을 모르기는 매한가지여서 어색한 표정으로 다만 서있는데, 무관이 엄격히 명을 내리는 것이었다.
“샅샅이 뒤지거라!”
“예!”
한양서 온 무관의 명령에 포졸들이 흩어져 장 포수의 집 안을 뒤지기 시작하는데,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 고을 관아에 소속된 포졸들이 아니라 한양에서부터 데려온 낯선 이들이라는 점이 이상하고 꺼림직했다.
운 뒤끝이 남아 연신 콧물을 들이키면서도 연이 역시 제 방을 뒤지는 포졸들의 모습을 불안하게 쳐다보는데, 그런 연이를 쳐다보는 무관의 눈빛이 또한 심상치 않았다.
장 포수가 슬쩍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어 무관의 시야에서 딸을 감추었다. 장 포수의 심장이 문득 두 방망이 치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때 연이 방에 들어가 뒤지던 포졸이 소리를 쳤다.
“여기 있습니다!”
그 소리에 장 포수와 이방, 무관까지 고개를 돌려 연이를 쳐다보는데 연이의 낯빛이 순간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소리 친 포졸이 마당으로 나와 봉투에 든 서찰 여러 개와 기림이 주고 간 이교의 부채를 무관에게 내보였다. 무관이 부채를 들어 펼쳐 보고는 물었다.
“누구의 것이냐?”
얼른 앞으로 나서며 장 포수가 말하였다.
“소인 것입니다.”
무관의 입술 한쪽 끝이 치켜 올라가며 비웃음을 띄웠다.
“네 것이다? 허면 읽어보거라. 무엇이라 써져 있는지?”
글자를 알지 못하는 장 포수가 답을 하지 못해 우물거리는데 뒤에서 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고입니다!”
조금 전까지 분명 훌쩍거리던 어린 계집이었다. 방에서 무언가가 발견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놀라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던 어린 계집의 목소리가 제법 당차 무관이 의아해 쳐다보았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계집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불쾌하고 언짢아 무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고?”
“그렇습니다. 지금 들고 계신 그 부채는 제 것이 맞습니다. 허나 저자가 같이 들고 나온 서찰 뭉치는 제 것이 아닙니다. 허니 제 방에서 나올 리 없지요.
제 것이 아닌 것으로 저의 죄를 물으려 하시니 이것이 무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제 발이 저린 것이구나. 그게 아니라면 내가 너의 죄를 물을 걸 어찌 알고, 그런 소리부터 해? 이 봉투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고?”
“똥을 꼭 먹어봐야 그것이 똥인 줄 알겠습니까? 이미 작정하고 오신 것이 확연히 티가 나니, 서툰 광대짓일랑 그만 두십시오!”
확연한 비웃음에 무관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이내 연이의 뺨을 있는 힘껏 세게 후려치는 무관이었다.
털썩,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연이였다.
딸아이를 향해 달려간 장 포수가 일으켜 보니 선홍색 피가 딸아이의 코와 입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얼굴 가운데에 난 선명한 손자국에 장포수의 뱃속 깊은 곳에서 화르르 불길이 일어났다. 온 몸과 주먹으로는 멧돼지를 때려잡던 왕년의 힘이 불끈 치솟는 장 포수였다.
그때 장 포수의 주먹을 조용히 쥐어 만류하는 손이 있었다. 다름아닌 이방이었다. 눈과 소리 없는 입술로 이방은 열심히 장 포수를 제지하였다.
칼 찬 무관과 육모방망이를 든 다섯명의 포졸쯤, 죽기살기로 싸운다면 딸아이만은 도망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 되면 하나뿐인 딸자식은 평생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도망을 다녀야 할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스르르, 장 포수의 주먹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뭣들 하느냐? 이년을 당장 끌고 가지 않고?”
“예!”
끌려가는 딸자식을 속절없이 바라보고 있는 장 포수의 귀에 대고 이방이 낮게 속삭였다.
“제 정신인가? 어쩌자고 저걸 집에 둬?”
초점을 잃은 눈으로 장 포수가 이방을 보니, 답답한 와중에도 앞서 간 무관의 귀에 행여나 들릴까 염려하며 이방이 다시 속삭이는 것이었다.
“몰랐단 말인가? 죽은 이교의 것이 분명해. 귀양 온 죄인의 물건을 간직하고 있다니? 그 자의 물건은 모두 불태우라 이미 명이 내려져 행해진 지 오래이거늘!”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장 포수가 이방의 옷깃을 잡고 매달렸다.
“이제 어찌합니까? 우리 연이 살려주십시오!”
딱한 마음과 답답함을 동시에 느끼며 이방이 답하였다.
“한양 의금부에서 온 종사관일세. 나도, 사또께서도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허면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대로 죽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아까 말리셨을 때에는 어떤 생각이 있으셨을 거 아닙니까?”
눈에서 불똥이 튀는 장 포수의 얼굴을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이방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 진성관에 가보게. 지금으로선 그 수밖에 없어 보이니.”
**
늦은 밤, 진성관의 큰 주인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장 포수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가운데, 큰 주인과 행수의 표정이 심각하였다.
밖에서 작은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니다, 아버님.”
문이 열리고 급히 들어온 작은 주인이 말하였다.
“봉투에 들어 있던 것이 이교 어르신의 것이 아니라 소현세자 저하의 글이라 합니다.”
큰 주인과 행수가 경악하는 가운데 장 포수가 얼른 말하였다.
“아니라 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니라고 분명 연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어르신!”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확실하다 말다요! 아시지 않습니까? 돌아가신 이교 어르신이 책 몇 권을 딸년에게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만, 어르신 돌아가시고 관에서 나온 사람들이 모두 찾아내 태워버렸습니다.
딸년이 그것이 마음이 아파 사흘 밤낮을 울며 밥 한 숟가락을 입에 안 넣었더랬습니다. 헌데 무슨···.
것도 세자 저하의 편지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 귀한 걸 딸년이 무슨 수로 가지고 있단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이건 모두 말이 안됩니다!”
“혹 자네가 몰랐을 뿐 따로 연이가 숨겨두었을 수도 있지 않는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딸년이 가끔 제가 모르는 짓을 하기는 하지만서도, 그건 이거랑 경우가 틀리지 않습니까?
이교 어르신과 관계된 얘기라면 단 한시도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는 애입니다. 그 청국의 뭐시기가 주었다는 이교 어르신의 부채를 두고도 몇 날 며칠을 자랑을 하느라 잠 한숨 못 자게 이 애비를 괴롭했던 것을요.
그런 애가 하물며 이교 어르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세자 저하의 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게 입도 벙긋 안 했다고요?
그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얘깁니다. 밤이면 밤마다 들쳐보며 제게 수백, 수천 번은 자랑을 하고 또 했을 거란 얘깁니다.
제발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어르신, 제발!”
두 손을 비비며 장 포수가 연거푸 이마를 조아렸다. 덥지도 않은 방안에서 줄줄 흘리는 땀에 얼굴은 기름을 부은 듯 번질거렸고, 옷 위로는 짙은 땀얼룩이 져 검게 물들고 있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