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병, 선수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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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세포
작품등록일 :
2018.09.15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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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2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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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할 수 있다.

DUMMY

해가 저물고 저녁이 찾아온 시각. 석호는 훈련소의 수영장을 찾았다. 건물의 디자인이 깔끔한 사각형을 이루는 가운데 조명이 환하게 비춰진다. 야외 수영장과 실내 수영장이 연결되어 있으며 레인 양 끝에는 깃발이 늘어진 줄이 보였다. 석호는 탈의실로 가서 트레이닝복을 벗고 수영복을 챙긴 뒤, 샤워실로 향했다. 뒤늦게 엔소니가 찾아와 석호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낸다.


“서크호, 한국의 생활은 어때?”


“음...그냥 평범해. 하지만 네게는 신선하겠지.”


“난 한국이 좋아. 엄청난 수영선수도 배출해냈고, 음식도 다양하고, 문화도 다르니까...가본 적은 없지만 종종 동영상 스트리머 사이트에서 접했지. 한솔이라고 하던데, 한국인인데 영어 문장을 잘 구사해내더라고.”


“어...아까 나랑 동행했던 형이 바로 한솔이야.”


엔소니의 유창한 영어발음에 집중을 유의했지만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석호다. 하지만, 마지막 한솔에 대한 말에는 단숨에 알아들었다.


“오...오?!! 저, 정말? 우연이네. 사인 받고 싶어.”


“그 형이라면 얼마든지 해줄 거야. 그나저나 엔소니는 자유형 선수 맞지?”


“그럼, 서크호도?”


“응. 주 종목은 중장거리야.”


“이럴수가...나도 그래. 오늘 함께 연습해보지 않을래?”


석호가 먼저 제안하려고 했던 말을 엔소니가 호의를 담아 물었다. 물론,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약간의 호전적인 기색과 도전적인 눈빛에 석호까지 달아오를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난생 처음 온 외국에서의 수영.


설렌다. 평소보다 텐션이 빠르게 급상승하는 것만 같다. 가볍게 샤워를 끝마친 후 수영복을 입고 수영모를 쓰고, 수경을 착용한 뒤 수영장으로 나섰다. 내부의 인테리어는 다를지언정, 50m 길이의 레인이 늘어선 사각형의 풀은 절대 변함이 없었다. 석호는 그런 수영장을 두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해주며, 몸을 담근 뒤 제자리 뛰기를 일삼았다. 식었던 신체가 달아오른다. 직후 워밍업을 시작하기 전 물에서 수평뜨기를 하니, 안방 침대에 누운 것 마냥 아늑했다. 팔을 대자로 뻗은 채, 천장을 올려다본다.


“으어어어 살 것 같다.”


철썩!


안면 위로 뿌려지는 물장구에 석호는 제자리에 서서 멈췄다. 엔소니가 흰 잇몸을 드러낸 채 밝게 웃으며 손목의 시계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벌 형식으로 자유형 100m씩 30분 반복하고, 1500m 연습 시합을 하는 거야, 어때?”


“그 전에 킥연습 좀 하자. 1km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OK."


한적하지만 몇몇 선수들이 석호와 엔소니를 아니꼽게 쳐다보고 있었다. 반면 한솔은 의자 하나를 가지고 와서 석호가 있는 레인 앞에 떡하니, 가져다 놓더니 매의 눈빛으로 여기저기 살피는 중이었다.


“킥 1km 가자!”


엔소니가 선두를 달렸으며 석호가 그 뒤를 따랐다. 수영의 경우 킥을 많이 할수록 호흡이 불안정해지며 금방 지치기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설렁설렁 발차기를 했다가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석호는 엔소니를 추격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연체동물을 연상시킬 만큼 유연하며,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능숙한 킥에 감탄한 것이다. 하지만 석호도 엔소니 못지 않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추격했다. 그렇게 50m...100m...150m...끝끝내 1000m를 돌고 나니 숨이 찼다. 연달아 호흡을 해주며 상체를 약간 기울여, 두 팔로 허벅지를 붙잡고 정면을 주시했다.


50m. 굉장히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 하지만 물속에서 헤엄을 치며 가다보면 금방 도달하게 된다. 몰두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초월하는 느낌이랄까. 순식간에 증발하듯이 지나가 버린다.


“자, 이제 인터벌 100m야!!”


엔소니가 선두에 서고, 석호가 후미에 서서 엔소니를 뒤따른다. 그리고 엔소니를 쫓으며 이전과는 현저히 달라진 추진력과 스피드에 석호도 맹추격을 했지만 약간의 격차가 벌어져 버렸다.


‘이게...미국의 수영선수.’


건강미가 넘치는 신체와 압도적인 폐활량, 그리고 유연함은 기본 스펙이었으며 기다란 팔로 끌어오는 물은 상상을 초월했다. 석호는 그런 엔소니를 쫓으며 100m에 도달하기가 무섭게 숨을 거칠게 내쉰다. 그렇게 20초 정도 휴식을 취하고 다시 100m를 돈다. 대강 30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40분 정도가 흘렀다.


T자 벽을 짚고, 엔소니가 수경을 벗으며 석호에게 말했다.


“서크호, 같이 한다는 건 정말로 즐거운 것 같아.”


“함께 할 수 있는 라이벌과 동료가 있다는 건 정말로 행복에 겨운 일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엔소니의 말에 공감했다. 문득, 주위에 백인들만 보이는 걸 깨달은 석호는 호기심결에 물었다.


“흑인 수영선수는 그렇게 많지 않은가 봐?”


“으음...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흑인이 오래전부터 차별받아 온건 알지?”


피부색으로 인해, 그저 ‘흑인’ 이라는 이유로 오랜 차별을 받아왔던 걸 알고는 있었다. 인종차별이라는 말을 접하다 보면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흑인에게는 수영장에 간다는 게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었대. 세간의 시선도 그렇고...그나마 완화된 최근에서야 조금씩 많은 흑인들이 수영에 관심을 두고 선수로 활동을 하고 있어.”


“...미안.”


아픈 과거를 강제로 들춰낸 것 같아 급작스럽게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말을 너무 함부로 내뱉었단 생각에 석호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고, 엔소니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괜찮아. 옛날과는 많이 달라져서 차별도 줄어든데다, 이렇게 수영선수를 꿈꿀 수도 있고, 성적도 탑 순위에 들고 있는데다...조만간 국가대표 자리도 다시 쟁취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응?...”


“아, 말 안했었나? 재작년에 국가대표였었고 각종 세계대회에서 상도 여러 번 탔었어. 작년에는...대회당일 날 신체에 이상을 느끼고 불길해서 바로 병원으로 직행한 탓에 대회에 나가지도 못했지. 기권이라고 해야 하려나. 이런 암울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슬슬 1500m 연습 시합을 시작해보자.”


엔소니가 앞장서서 8번째 레인 스타팅 블록 위로 올라가, 그랩스타팅 자세를 취했다. 석호는 7번째 비어있는 레인으로 가서 스타팅 블록 위로 올라간 다음, 한솔에게 초시계를 건네줬다.


“형, 스타팅 신호랑 버튼 좀 눌러줘.”


“그래, 근데 저 친구랑 또 만났네. 이름이 어떻게 된대?”


“엔소니야. 형이 올린 영상과 댓글로 친절하게 알려준 한국의 문화 덕분에 한국을 좋아하게 됐대. 형 팬이래.”


“그, 그래? 시, 시작하자.”


귓불이 붉게 달아오른 한솔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채 은연중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더듬는다. 석호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엔소니와 마찬가지로 그랩스타팅 자세를 취하며 정면을 쳐다봤다.


언제나 같은 무대 위에서 수많은 경쟁을 거쳐 왔다. 경험도, 실력도, 연습도 결코 부족하지 않게끔 노력했다.


“후우...”


‘할 수 있다.’


석호는 마음과 믿음, 그리고 응원에서 나오는 힘을 믿었다. 스스로를 응원하며 확신을 가진다. 시선은 올곧게 정면을 주시한 채로, 한솔의 출발 신호가 들려오기를 잠자코 기다린다.


“GO!!!"


엔소니와 석호는 너나할 것 없이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석호의 전신이 수면 위로 거울처럼 비춰진다. 대각선으로 비스듬하게 스타트 다이빙을 하며 돌핀킥을 차주다가 자유형 킥으로 연결시키며 코스라인에 도달하기 직전 수면 위로 떠올랐다. 크롤 영법을 하며 박자와 리듬에 맞춰, 4비트 킥을 차주며 팔을 뻗어준다. 손끝에서부터 손바닥, 손목, 팔목, 어깨, 견갑골을 거쳐 가는 물의 흐름을 느끼며 글라이딩을 한다.


한솔은 석호를 찍은 카메라를 들여다봤다.


“일순간, 날았었어...”


카메라 속에는 미사일처럼 튀어나가는 한 선수의 순간이 포착되어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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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꿈을 이루다[完] 19.02.16 172 3 14쪽
91 안전을 버리고 미지를 택하다. 19.02.15 115 3 7쪽
90 장거리 레이스의 시작 19.02.14 126 3 6쪽
89 다시 한 번 19.02.13 129 3 7쪽
88 너 본선 진출하면, 나 이 일 때려치운다. 19.02.12 131 3 10쪽
87 미래를 붙잡기 위해. 19.02.11 162 3 6쪽
86 신에게 선사받은 재능 19.02.10 134 3 7쪽
85 아리카케 19.02.10 130 3 9쪽
84 무상 19.02.10 121 3 6쪽
83 하여간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19.02.09 135 2 7쪽
82 개최되다. 19.02.09 124 3 6쪽
81 이제 시작이야. 19.02.08 118 4 8쪽
80 이기는 건 나야. 19.02.08 156 4 6쪽
79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야. 19.02.07 124 4 8쪽
78 석호니까요. 19.02.07 122 3 6쪽
77 나 힘낼게, 콜리야. 19.02.06 178 2 7쪽
76 지금처럼 말이야. 19.02.06 154 2 10쪽
75 다음은 200m다. 19.02.06 143 2 5쪽
74 스프린터의 영역 19.02.05 148 3 10쪽
73 범고래 샤치 19.02.05 150 4 8쪽
72 그러게 말이다. 19.02.04 153 3 8쪽
71 호프스와 희망 19.02.03 167 3 12쪽
70 저는, 동현이라고 합니다. 19.02.03 155 3 6쪽
69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19.02.02 178 3 7쪽
68 결과는... 19.02.01 181 2 9쪽
67 남은 거리, 100m 19.01.31 170 4 6쪽
66 세상에 신(神)은 없지만 신(信)은 있다. 19.01.31 167 3 7쪽
65 양산형이 아니다. 이거냐? 19.01.30 188 4 8쪽
64 내가 이겨. 19.01.30 179 2 9쪽
63 1500m 19.01.28 180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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