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함진영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게임

연재 주기
최화린
작품등록일 :
2018.09.30 22:32
최근연재일 :
2018.11.16 07:22
연재수 :
84 회
조회수 :
141,937
추천수 :
4,521
글자수 :
552,451

작성
18.09.30 22:33
조회
5,391
추천
107
글자
11쪽

한 남자의 삶

DUMMY

한 남자의 삶


내가 아직까지 잊지 못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예닐곱 무렵 부모님이 마적 무리의 약탈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던 순간이다.

조악한 죽창을 들고 도적에게 맞섰던 아버지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처자식만을 걱정했고, 날 아궁이에 숨겨주었던 어머니는 지아비를 죽인 원수에게 휘둘리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진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지 말라며, 잘 숨어있으면 나중에 찾으러 오겠다던 약속을 하고서 내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해주던 어머니의 생전 마지막 미소가 아련하다.


당시에 나는 너무 어려서 가족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그 순간이 마지막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도적떼는 마치 어린아이가 발아래 개미를 밟아 죽이는 일처럼 너무나도 손쉽게 내 부모의 목숨을 앗아갔던 것이다.


다음날이 돼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마을의 생존자는 나까지 포함해서 꼬마 넷이 전부였다. 어른들은 모두 죽었고 눈에 띈 아이들은 남김없이 끌려간 듯싶었다. 어린아이까지도 거래되는 빌어먹을 세상이니, 그 날 죽지 않았다면 어디론가 팔려갔으리라 짐작할 따름이다.


인적 드문 산골마을에 닥친 참상을 한동안 멍하니 응시하다가, 나와는 두 살 터울이었던 아장의 말을 들어 마을 사람들을 묻어준 기억이 난다. 끊임없이 눈물을 보이던 아선과 그녀를 달래주던 아소도 함께였다.


조악한 돌무덤을 앞에 두고 우리는 맹세를 했다. 서로를 지켜주자는 그 약속은 사내아이들만의 결의라며 아소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지만, 아선이 자기도 하고 싶다며 고집을 부려 결국엔 넷이서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젊은 날의 호기를 부리기 시작했을 때, 뜻을 함께 하는 동료들을 모았다. 도적들을 잡으러 다닐 의용군을 조직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선은 눈물까지 흘리며 반대했지만, 아소가 그녀를 따로 불러 무언가 말을 건넨 뒤로는 출정할 때마다 걱정을 할지언정 말리지는 않았다.


의용군의 출정이라고 해봐야 거창할 것도 없었다. 발 빠른 이들을 중심으로 마을 외곽을 순찰하고, 도적이 보이면 밭일하던 장정을 모아 유격하는 정도밖에는.

그런데 고작 그 정도의 전투에서 아장을 잃어야만 했다.


내 책임이었다. 연이은 승전에 도취된 내가 만용을 부렸고, 그 결과 바로 옆에서 나와 함께 하던 친우가 눈 먼 칼을 대신 맞아준 것이었다.


죽어가던 아장이 마지막에 내뱉은 목소리는 아직까지도 귓가에 또렷하다. 그것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신음소리도 아니었고, 복수를 바라는 통한의 말도 아니었으며, 남은 동무들을 부탁한다는 어린 날의 맹세도 아니었다.


[이번에도 이기고 같이 돌아가는 거야.]


응당 이기는 것이 당연했던 소규모 전투를 몇 번 경험한 걸 가지고도, 그 승리를 이끈 나를 믿고 함께 해준 아장은 그렇게 짧은 삶을 마감했다.


마을로 돌아오는 내내 후회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동무의 죽음을 목도한 아선은 아장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다 혼절했고, 아무런 말없이 곁을 지키던 아소는 그녀를 안아들고 자리를 피했다.


다음날 열린 위령제에서 떠난 이를 위한 마지막 술잔을 채우며 다짐했다. 먼저 간 친우의 이름을 걸고, 앞으로는 지킬 수 있는 승리를 위한 길만을 쫓아가겠다고. 만약 저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곳에서 지켜봐 달라고. 아소와 아선만큼은 죽음에 놓이게 만들지 않을 테니, 너도 두 사람을 지켜주라고.


그 후로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병법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처음에는 모르는 글자가 더 많았지만, 그럴 때면 환란을 피해 우리 마을에 은거한 식자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기에 대략적인 맥락은 능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연전연승을 거듭해온 우리 의용군의 위명을 쫓아 무리에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함진영이란 과분한 별호도 그때 생겼다.

내가 이끄는 의용군은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강했고, 우리 마을 인근은 그로 인해 평화로울 수 있었다.


이듬해 봄, 아선과 아소의 혼례가 있었다. 홍의를 입은 그녀는 마을의 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웠고, 함께 해온 그 어느 순간보다 행복해보였다.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건네는 나에게, 두 벗은 그동안 모아놓은 가산을 정리해 낙양으로 갈 계획임을 밝혔다. 그 즈음 중원의 어지러운 사정이 들려오던 터라 도읍보다는 차라리 멀지만 풍요로운 양양이 어떠냐고 권해보았지만, 평소 식자를 찾아가 부지런히 글을 배운 아선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함께 하자고 다짐했던 두 동무를 떠나보냈다.


아선은 오히려 혼자 남게 된 나를 걱정했음인지, 낙양에 무사히 자리를 잡고 처음 몇 달은 주기적으로 서신을 보내왔다. 낙양 동쪽 인근에 거처를 마련했으며, 아소가 동양문(東陽門)의 위병으로 근무한다는 소식과, 당대에 명성이 자자한 왕윤의 저택에서 일하게 된 사연. 그리고 그곳에서 함진영의 정보가 오가기에 순의 이야기를 했더니, 언제고 시간 날 때 방문해달라는 말을 들었다는 등의 일상이 적혀있었다.


농번기가 끝나면 방문하기로 서신을 보낸 뒤로, 몇 달은 아무 소식 없이 지나갔다.

마을의 대소사를 모두 처리하고 나서 낙양으로 갈 행장을 꾸리고 있을 때, 낙양 정세가 급변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십상시의 몰락과 동탁의 집권. 그 즉시 말을 타고 낙양으로 향했지만, 출입이 삼엄하게 통제되는 낙양 성문 어디에서도 아소는 보이지 않았다. 문지기를 붙잡고 물었더니, 얼마 전 조조가 탈출하는 것을 막지 못한 죄로 수문장을 포함한 병졸 전원이 참수되었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심장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아소는 무엇을 위해 낙양으로 왔던가.

나는 왜 떠나던 동료를 붙잡지 않았나.


빌어먹을 세상.

태어나 처음으로 하늘을 저주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선은 몰라보게 야위어 있었다. 그렇지만 가련함이 더해진 그녀의 미색은 오히려 이전보다 빼어났다. 마치 자신을 태워 빛을 발하는 불꽃처럼······.


이제는 살아가는 이유가 복수뿐이라 말하던 아선은 끝끝내 나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절했다.


그렇게 짧은 조우를 마치고 마을에 돌아온 뒤로, 수 없이 많은 날을 술에 취해 살았다. 간혹 누군가의 하수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찾아와 모병에 관한 제안을 했지만, 매번 별다른 소득 없이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동탁이나 조조 놈과 같은 깃발 아래 설 생각은 없었을 뿐더러, 마을 동료들마저 전란 속으로 떠밀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세운 뜻을 잊고 살았을 때도 세상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다시 한 해가 지났을 때 아선이 보낸 서신이 도착했다. 왕윤을 따라 장안으로 온 일과 자신의 꿈이 곧 이루어지리라는 짧은 이야기 뒤로 장과 소, 그리고 자신의 몫까지 잘 살아달라는 말이 고운 글씨체로 적혀있었다.


하루라도 제정신으로 잠들어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술독에 빠져 지낸 나날이었지만, 그 순간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내 눈앞에 아장과 아소가 있었다.


두 동무를 보자 어릴 적 무덤 앞에서 한 약속이 떠올랐다. 험한 곳에서 홀로 고투하고 있을 아선을 지켜야만 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엄숙한 표정으로 날 지켜보던 아장과 아소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감싸 쥐고 후회하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 즉시 말을 구해 장안으로 달렸다.


내 몰골을 보고 놀라는 아선에게 목숨을 중히 여겨줄 것을 부탁했다. 살아만 있다면 언제고 다시 행복할 수 있으리라 말하며, 어린 날 동무와의 맹세를 지키러 왔음을 알렸다.

그러나 그녀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왕윤의 조언을 들어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는데 일조한 아선은 동탁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 여필종부(女必從夫)를 남기고 자결을 택했다.


나는 그녀의 죽음을 예상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선의 무덤 앞에 앉아 마신 것을 마지막으로 술을 끊었다. 왕윤은 여러 주연에 초대하여 날 회유하고자 했지만, 모사로서 간교한 혀로 아선을 이용한 그 역시 조조와 다를 바 없게 느껴졌다. 그랬기에 스스로 이용당할지언정 타인을 조종하려 들지 않는 여포에게 마음이 움직였다.


생의 의욕을 잃은 나에게 투쟁으로 점철된 그의 삶은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었다.


무(武)의 길.


10여 년을 여포 밑에서 종군(從軍)하는 동안 수많은 전장을 누볐다.



“자네는 저 여포에게 간언을 할 정도로 충직하다지. 어떤가? 자네도 이제 내 곁에 서게 된 문원처럼, 패장으로서 죽음을 택하기엔 아직 못다 이룬 게 크지는 않은가? 여포에게 그리하였던 것처럼 앞으로 내게 충성을 바친다면, 자네의 꿈이 얼마나 크다한들 이 몸이 다 이뤄주겠노라 약조하겠네만.”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추억들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제 나와 함께 함진영이라 불리던 동료들은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내 삶의 길고 길었던 방랑도 드디어 깊이 내쉬는 한 번의 숨으로 그 끝을 맺으려 한다.


“충신이 다 무엇이냐. 제 꿈을 배불리 먹여줄 이에게 바치는 얄팍한 마음일 따름이다. 이제 나에겐 꿈도 목숨도 모두 부질없다. 그대 때문에 죽어간 이들을 세 치 혀로 욕보이지 말고 어서 내 목을 쳐라.”


죽음은 두렵지 않다. 전장에서 함께 죽지 못한 것이 죄스러울 따름이다.

남겨둔 미련도 없는 세상. 이제 그만 동료들을 만나 사과해야할 때가 된 듯하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 올려다본 겨울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랬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세 동무를 그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의 아선과 아소가, 아장과 함께 앉아 손을 흔들며 날 반기고 있었다.




―*


고순(高順)

사람됨이 청백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았다.

700여 군사를 거느렸으며, 갑옷과 투구가 모두 잘 손질되어 있고, 매번 공격할 때마다 격파하지 못함이 없으니 함진영(陷陳營)이라 불렸다.

여포는 고순의 충성됨을 알았으나 능히 쓰지는 못했다. 여포는 학맹의 반란을 진압한 고순을 소원하게 대하고, 위속이 안팎의 친척이라 하여 고순이 거느리던 군사들을 모두 빼앗아 위속에게 주었다. 그러다 싸움이 있게 되자 영을 내려 위속이 거느리던 군사를 고순이 이끌게 했는데, 고순은 끝내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고순은 여포가 동탁을 벤 것을 크게 잘한 일이라 여겼는데, 고순이 여포를 섬기며 끝까지 충절을 지킨 배경엔 아마도 이러한 사실이 연관되어 있으리라 짐작된다.


순(順) : 도리를 따르다, 거스르지 아니하다.

선(蟬) : 아름답다, 애처롭다.

여필종부(女必從夫) : 아내는 반드시 남편을 따라야 한다.

함진영(陷陳營) : 진영을 함락시킨다는 뜻으로, 고순과 그의 군세를 일컫는 말이다.


작가의말

1편은 제가 생각한 고순의 일대기입니다.


다만 본 소설은 삼국지 줄거리와는 크게 관련이 없으며, 가상의 대륙 시네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본편을 게임시나리오로 생각해둔 관계로, 외전인 함진영전 역시 게임적인 요소에 대한 서술이 간혹 언급될 예정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함진영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주기 공지입니다. +3 18.10.13 2,677 0 -
84 불화의 불씨 +4 18.11.16 471 21 17쪽
83 몽환의 경계 +7 18.11.15 640 26 20쪽
82 몽환의 경계 +11 18.11.14 682 40 15쪽
81 인과의 법칙 +5 18.11.13 727 32 19쪽
80 인과의 법칙 +3 18.11.13 736 29 17쪽
79 인과의 법칙 +3 18.11.12 759 23 15쪽
78 인과의 법칙 +5 18.11.09 964 30 19쪽
77 안테무랄 로크 +6 18.11.08 951 31 18쪽
76 안테무랄 로크 +10 18.11.07 950 24 17쪽
75 안테무랄 로크 +3 18.11.06 949 27 14쪽
74 안테무랄 로크 +5 18.11.06 966 32 18쪽
73 안테무랄 로크 +3 18.11.05 1,023 30 15쪽
72 왕도 니에카스 +7 18.11.02 1,143 45 14쪽
71 왕도 니에카스 +1 18.11.02 1,101 42 14쪽
70 왕도 니에카스 +2 18.11.01 1,181 41 14쪽
69 각자의 사정 +8 18.10.31 1,196 43 17쪽
68 각자의 사정 +3 18.10.31 1,136 39 13쪽
67 의료도시 율레르 +4 18.10.30 1,307 48 22쪽
66 의료도시 율레르 +7 18.10.29 1,264 51 10쪽
65 의료도시 율레르 +1 18.10.29 1,237 42 16쪽
64 의료도시 율레르 +10 18.10.26 1,476 58 20쪽
63 의료도시 율레르 +6 18.10.25 1,415 46 13쪽
62 의료도시 율레르 +1 18.10.25 1,298 45 16쪽
61 늑대와 사자 +6 18.10.24 1,418 41 16쪽
60 늑대와 사자 +2 18.10.24 1,380 44 11쪽
59 엘뉴르 공작 +4 18.10.23 1,482 47 13쪽
58 엘뉴르 공작 +3 18.10.23 1,355 45 17쪽
57 엘뉴르 공작 +3 18.10.22 1,469 49 19쪽
56 엘뉴르 공작 +7 18.10.19 1,550 56 13쪽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최화린' 작가를 후원합니다!

  • 보유 골드: 0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