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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진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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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화린
작품등록일 :
2018.09.30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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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22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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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엘뉴르 공작

DUMMY

한편 말락 알 라르시아는 열심히 기절한 척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맞아서 눈물을 흘렸다. 어떤 고난과 역경도 오기와 근성으로 버텨냈던 그였지만, 무자비한 폭력은 차라리 죽는 게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밧줄에 묶여 말안장에 얹히는 상황이 되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최고라 믿고 함께 해온 수하들이었다. 비록 소대 번호는 중간을 넘지 못했지만, 그들에게는 용력만 본다면 디네센의 파르티아 중 단연 으뜸인 상관이 존재했다. 그것이 소대장과 동고동락을 함께 해온 제6소대원들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오늘부로 그 간판은 무참하게 떨어져나갔다. 평소 용력을 과시하며 부하들과 힘겨루기를 일삼았던 말락으로서는 고개를 들 수조차 없을 정도의 참패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항복한 부하들 중 하나가 두 눈을 꾹 감은 자신을 지키겠다며 자진해서 남았다. 그 충성어린 말에 꺼진 불씨처럼 남아있던 자존심마저 바람에 휩쓸려 날아 가버렸다.


포승줄이 자신의 손을 묶는 순간 부끄러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가 이 상황을 넘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절뿐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때려눕힌 엘레바도가 그를 끌고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말락은 절로 몸이 떨려오는 것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스스로를 시스의 토로라 소개하던 사내는 진정으로 미친놈이었다. 웃으면서 주먹을 휘두르던 도축자의 얼굴표정이 눈꺼풀에 달라붙은 것처럼 생생했다.


상관을 지키기 위해 포로가 되기로 결심한 신참기사 슈베르트는 자신의 대장이 기절한 와중에도 몸을 떨자 다시금 상관에 대한 연민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아직 얼굴에 앳된 티가 남아있는 그는 1대1의 결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생생하게 지켜본 기사 중 하나였다.


슈베르트는 무예를 보는 안목이 그리 대단치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볼 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슈베르트의 안목으로 판단하건데, 결코 말락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가 터무니없이 강했다. 상관과 창칼을 겨룬 사내는 실로 무시무시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실력이 될 수 있을지가 다 궁금해질 정도로, 시스의 토로는 디네센의 리노제로스를 상대로 탁월한 기량을 뽐냈던 것이다.


슈베르트는 동료들과 뒤섞여 가도를 뒹구는 사내를 말없이 응시했다.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의 기백은 도무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때 아르코에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은 도실리다드가 포로 곁으로 다가왔다.


“경황이 없어 이름도 묻지 못했습니다.”


우락부락한 청년은 포로에게도 정중한 말씨를 사용했다. 신참기사의 눈엔 저 남자의 동료들 역시 여간내기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슈베르트 역시 청년에게 높임말을 사용했다.


“제 이름은 슈베르트입니다. 아직 기량이 부족하여 왕국 기사작위는 받지 못했습니다. 포로 신분이니 말씀을 낮추셔도 됩니다.”


왕국의 기사작위는 평민 기사가 준 귀족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1년에 단 한 차례 심사를 통해 선발하는데, 심사를 통과한 경우 왕국의 기사 성씨를 받게 된다. 라르세스 왕국의 경우 라르시아를, 나유세스 왕국의 경우 나유시아를 하사 받아, 성을 가진 준 귀족 반열에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스스로의 실력을 나라로부터 인정받은 소수의 실력자들에 한해 시행되는 제도이며, 그마저도 세습이 안 되는 작위에 불과하다.


도실리다드는 자신보다 앳돼 보이는 기사를 가만히 응시했다. 영혼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을 받은 슈베르트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슈베르트 님. 당신은 상관을 보필하기 위해 자진해서 포로가 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필요치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파르티아의 진군에 약간의 시간조차 끌지 못할 인물은 포로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검은머리 청년의 차분한 말에 신참기사의 표정이 뭉친 찰흙처럼 점점 굳어졌다.


“우리는 바쁘게 움직여야합니다. 사로잡은 포로가 죽거나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이어질 파르티아의 습격도 대비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포박조차 하지 않은 당신의 존재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행군할 준비를 마쳤는데······.”

“그런 것쯤,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차와 말만 무사하면 되고, 나머지 짐들은 원래부터 파르티아의 것. 버리고 가면 그 뿐입니다.”


슈베르트는 자신이 도와준답시고 한 행동이 부질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의 귀로 도실리다드의 낮은 목소리가 벌처럼 날아들었다.


“묻겠습니다. 당신은 디네센 가문의 기사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슈베르트로서는 당연한 걸 묻는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기사로서 맹세하고 답하시면 됩니다. 당신은 디네센 공녀의 무고를 믿습니까? 아니면 디네센 공자의 명령을 따릅니까?”


신참기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눈동자엔 단호한 무언가가 엿보였다.


“디네센의 기사로서 맹세합니다. 저 슈베르트는 공녀님의 무고를 믿습니다. 그러나 디네센 공자의 명령을 받은 대장님을 따라온 것도 맞습니다.”


말락의 몸이 한차례 움찔거렸다. 하지만 도실리다드와 슈베르트는 그에겐 신경을 쓰지 않고 둘만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섬기는 기사입니까? 왕과 디네센 같은 형식적인 단어 대신,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 말하면 됩니다.”


그에 슈베르트는 더없이 솔직하고 순수한 얼굴이 되어 자신의 상관을 쳐다보았다.


“말락 경입니다. 저는 높으신 분들의 정치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말락 경이 명령하시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저는 평민으로 말락 경의 실력을 흠모하여 기사단에 입단을······.”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실리다드가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말을 끊자, 신참기사가 머쓱한 표정이 되어 머리를 긁적였다. 이에 토로 일행의 현자는 소리 없이 웃어주는 것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풀었다. 그의 미소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원숙함이 있어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리나를 비롯해서 로크와 아르코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포로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실리다드만 쳐다보고 있었다. 산들바람이 귓불을 시원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가운데, 도실리다드의 미소를 목도한 그들의 마음에도 여유가 생겨났다. 어느새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것을 멈춘 세 사람도 이들의 곁에 다가와 잠깐의 여유를 즐겼다.


“이번엔 말락 경께 묻겠습니다.”


도실리다드가 마치 깨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꺼내자, 안장에 엎드려 묶여있던 기사가 크게 꿈틀 거리며 말에서 떨어졌다. 벌게진 그의 얼굴은 수치심과 기사로서의 긍지가 한데 뒤섞여 활화산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상관이 낙마하자 놀란 슈베르트가 그를 부축했다. 팔다리가 묶인 탓에 머리부터 떨어졌지만 다행히 더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당신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한번 선택하면 번복할 수 없으니 신중하게 대답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크흠, 어디, 말해봐라.”


말락은 뒤늦게 구긴 체면을 펴보려 근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어진 청년의 말에 겨우 끼어 맞추었던 턱이 다시 탈골되고야 말았다.


“디네센 공자에게 칼을 겨눌 배짱이 있습니까?”


파르티아 제6소대의 대장과 대원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질문에 말문을 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실리다드는 두 사람에게만 들릴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제 할 말을 다했다.


“우리는 의뢰를 완수할 겁니다. 율레르에 무사히 도착한 공녀가 독을 치료한다면? 자신에게 향했던 칼들을 모두 기억해낼 겁니다. 그녀에겐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충분하니, 디네센의 파르티아는 공자와 공녀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 겁니다. 잘한 선택의 결과는 명예와 보수, 잘못된 선택의 결과는 죽음. 참 쉽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우리의 포로 신세이니, 선택을 빨리 해야 할 겁니다. 공녀의 편에 서서 공자에게 칼을 겨눌 수 있습니까? 그 정도 배짱도 없다면 당장 검을 부러뜨리고 낙향하는 게 현명한 방법입니다.”


검을 부러뜨린다는 표현은 성전기 시대에 왕의 부당한 명령 앞에 하사받은 검을 부러뜨리고 죽음을 택한 기사 고드릭의 기록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이 문화기를 지나며 주군의 부당한 명령에 저항한다는 의미를 담은 관용구로 쓰이고 있었다.


그 말에야 마비된 사고를 겨우 원상복구 시킨 말락이 뒤늦게 목소릴 높였다.


“충성을 맹세한 이에게 파렴치한 짓을 하란 말이냐?! 그렇겐 못한다!”


그 목소린 다른 둘에 비해 컸던 면이 있어,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모여 있던 토로 일행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도도가 무슨 말을 했나? 왜 저런데?”

“낸들 아나.”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나블로와 세르펜이 한마디씩 입을 열었다.


말락이 언성을 높이거나 말거나, 도실리다드는 제 할 말만 쏙 내뱉었다.


“아, 실수. 낙향은 없었던 말로 하겠습니다. 우리의 정보를 다른 부대에 알려주면 안 되는 일. 공자에게 칼을 겨눌 수 없다면 이 자리에서 당신의 혀를 뽑고 손가락을 모두 잘라야겠습니다. 아, 혹시 발가락으로도 글을 쓸 수 있습니까?”


불혹을 앞둔 중년의 기사가 저도 모르게 발가락을 오므렸다. 차분히 말하는 청년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그에겐 자신을 때려눕힌 토로의 주먹만큼 매섭게 느껴졌다.


“당신을 굳이 사로잡은 형을 보아 죽이진 않겠습니다. 그저 혓바닥과 손가락을 놓고 가면 됩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을 위해 포로를 자처한 부하까지.”


여기까지 말한 도실리다드가 자신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섬뜩할 정도로 새파란 예기를 뿜어내는 창끝이 천천히 상대의 눈을 향했다.


파르티아의 두 기사는 일시에 얼음처럼 굳어 움직일 줄 몰랐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경비병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창 하나를 쥐었을 뿐인데 갑자기 오한이 들다니······.

도실리다드는 분명 차분한 낯으로 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당키 어려운 기운이 뱀처럼 그들의 몸을 칭칭 옭아매고 있었다.


그랬다. 그것은 살기였다.


그건 어느 정도 떨어져있던 동료들이 느끼기에도 비슷했다. 처음 날붙이를 손에 쥐어주며 가르침을 내리던 그날의 스승님처럼, 날카롭고 소름 돋는 분위기가 있음을 즉시 알아차렸다. 그들은 다만 도실리다드가 평소에는 하지 않는 행동을 보이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말을 아꼈다.


얼마간의 시간 동안 살기를 내비치던 그는 곧 바늘처럼 날카롭게 벼린 기백을 풀었다. 그제야 좌중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10여 년을 함께 해온 동료들조차 쉬이 적응이 안 될 진데, 그만한 살기를 직접 몸으로 받은 두 사람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도실리다드는 둘의 안색을 눈으로 살폈다. 신참 기사라 자신을 소개한 슈베르트가 온몸을 덜덜 떠는 것과 달리, 중년의 기사는 그의 기운을 가까스로 버텨낸 것처럼 보였다.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문 말락의 입에서 한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너도··· 괴물이군.”


그가 무슨 말을 하건, 도실리다드는 이만하면 합격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성격에 안 맞는 말투를 계속 써가면서 본의 아닌 협박을 하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형의 부탁이 있었으니까.


“디네센 공자에게 칼을 겨눌 배짱도 없고, 신체 일부를 포기하기도 싫다면, 단 한 가지의 방법이 남아있습니다.”


말락이 겨우 초점을 되찾은 눈으로 도실리다드를 노려보았다.


“뭐냐.”

“토로 용병단에 들어오면 됩니다. 디네센의 기사라는 허명을 버리고, 우리와 같은 용병이 되십시오. 당신의 실력을 높이 산 일행의 부탁으로 당신에게 제안하는 것입니다. 공자에게 칼을 겨누는 것은 이미 거절했으니,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그 혀부터 자르겠습니다.”


검은머리 청년이 들려준 이야기는 협박과 회유가 반반씩 섞여있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외치려던 말락은 순간적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대로 입을 연다면 왠지 정말 혓바닥이 잘릴 것만 같았다.


그야 말로 진퇴양난. 도대체 왜 자신을 회유하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제아무리 머리를 굴려본들 해법이 나올 리 없었다.


그때서야 말락은 자신의 처지를 온전히 깨달았다. 거느렸던 병력은 이미 와해되었으며, 지휘관인 자신은 포로가 되어 포승줄에 묶인 신세. 본신의 실력을 모두 쏟아내었지만 무참히 박살나고 만, 패장이었다.


평소 항복이란 단어를 거론하는 것조차 수치로 알았던 그다. 파르티아의 지휘관으로서 기치를 내걸고 전장에 나선 몸이라면 죽어서라도 명령을 받드는 것만이 기사된 도리라 생각했던 그다.


하지만 막상 처참하게 박살나고 항복을 종용받는 상황에 직면하자, 수치를 무릅쓰고서라도 지켜야만 하는 것이 생각났다. 그것은 부하들의 목숨이었다.


전투는 병가지상사. 오늘은 패했지만 다음번엔 이길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한번 죽으면 끝이다. 다음이 없는 것이다.


수년을 동고동락하며 못난 상관을 믿고 따라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었다. 어딜 가도 이런 부하들은 다시 얻을 수 없기에 더없이 소중했다.


그런데 막상 항복하고 나니 이번엔 변절하란다.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아니, 그것은 거짓말. 하루가 멀다 하고 자행되는 소공자의 악행을 처음 목도한 날, 공작가문을 향한 그의 충성심엔 금이 갔다. 소공자의 악행이 거듭될수록, 말락은 공작의 사후 소공자가 작위를 물려받으면 낙향해야겠다는 생각을 키워갔다.


하지만 막상 소공자가 작위를 대행해 권한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옛말을 떠올렸다. 소공자는 아버지 공작의 죽음을 겪었으면서도 감정에 치우쳐 대처하지 않았다. 범인으로 지목된 이복 여동생을 절차에 따라 재판에 회부시켜 죗값을 치르게끔 한 것이다. 이는 평소 규칙과 절차, 법 따위는 개뼈다귀로 알던 소공자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망친 공녀를 사로잡아오라 명하는 소공자는 더 이상 예전의 망나니가 아니었다. 그래서 말락을 포함한 각 소대장들은 새로운 공작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주군이 내리는 첫 임무를 기꺼이 받들었다.


죄인을 찾아 수도로 호송하는 임무는 충성심과 능력을 인정받기에 안성맞춤인 일이었다. 많은 기사들이 동원되었고 디네센이 가진 정보망은 그물처럼 죄인을 사로잡기 위한 포위를 좁혀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3소대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6소대장인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 이는 가문의 행보에 발을 거는 사건이었다.


자신을 파르티아 소대장으로 만들어준 선대 공작을 생각해서라도 계속 걸림돌이 될 수는 없었다. 기회를 봐서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죽음으로서 패장의 죄를 받음이 마땅할 터.


전투에선 패했다지만 탈출이라도 하려면 몸을 추스를 약간의 시간이나마 벌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순간적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 아닌 거짓말을 했다. 그 와중에도 얼굴엔 최대한 비통에 잠긴 표정을 떠올리려 애썼다.


“다만 며칠만이라도 고민할 시간을 다오. 생각이 정리되면 답을 주겠다.”


동료들이 무슨 이야길 하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도실리다드가 마침내 미소를 지었다. 부탁으로 짊어졌던 짐 하나를 던 표정이었다.


“좋습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확답을 주실 때까지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신다면, 구속도 즉시 풀어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약속하겠다.”


어차피 한 번 만에 회유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싸움에서 이겼다 한들 주군과 가문을 배신할 만한 가치를 보여준 것도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화두만 던져놓고, 말락이 본인의 감정을 추스르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때가 되기를 기다림이 옳았다. 적장을 등용할 만한 가치는 그때 가서 보여주면 되는 일.


“기사로서 스스로 내뱉은 말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겠습니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에, 기사가 즉시 떫은 감을 씹어버린 표정이 되었다.


반대로, 엘레바도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둘이서 무슨 이야길 나누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뻔했다. 형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동생이 머리를 굴린 결과이리라.


엘레바도는 의뢰를 시작한 뒤로, 소수의 인원으로 계속해서 다수와 싸우며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인원 문제였다.


수적인 열세를 실력으로 밀어붙여온 엘레바도는 앞으로 점점 더 어려운 싸움을 하게 될 텐데, 그 경우엔 지금의 인원으로는 아무래도 위험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 이를 충원하는 일이었다.


그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자신을 코뿔소라 소개한 이의 실력이 일행과 비교해도 크게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엘레바도는 기사의 실력을 확인한 즉시 무기부터 제압했다. 다음으로 그의 전의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무너뜨렸다. 정신을 무장 해제시키는 데엔 주먹만큼 빠른 게 없었다. 동생에게 배운 대로 관절을 후려치자 긍지 높은 기사가 눈물을 다 흘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기사를 회유하는 방법만큼은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래서 뒤처리는 현명한 동생에게 떠넘겼다.


그리고 마침내 결과를 보아하니, 크게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작전 대성공이었다.


나머지 동료들도 그들 앞으로 다가온 도실리다드에게 이야기의 전말을 전해들은 직후 스승의 언행이 평소와 달랐던 이유를 깨달았다.


“역시 도도.”

“토로가 웬일로 생각을 다했네. 실은 나도 전력보강이 필요하다고 느끼긴 했어.”

“그렇군. 한 사람이라도 더 들어온다면 아르코도 덜 다치겠어.”

“쳇······. 두고 보자. 누가 다음에 내 꼴이 나나.”

“하하.”


갑작스럽지만 새로 맞이하게 된 예비동료를 한마음으로 환영하고 있을 때, 니에카스로 들어가는 성문에서 일단의 무리가 질서정연하게 걸어 나왔다. 은백색 갑옷에 장미를 상감한 황금 망토. 나유세스의 왕도를 지탱하는 왕실 근위병단이었다.


엘레바도를 비롯한 동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년의 신사가 망토를 펄럭이며 한발 앞으로 나서는 모습이 토로 일행의 시선에 잡혔다.

그의 입이 열리고 성악가를 닮은 목소리가 굵직하게 울려 퍼졌다.


“저자들을 포위하라.”


작가의말

이전 화에 묘사된 말락의 설정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완연한 가을, 이번 한 주도 잘 시작하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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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각자의 사정 +3 18.10.31 1,018 3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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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의료도시 율레르 +10 18.10.26 1,361 53 20쪽
63 의료도시 율레르 +6 18.10.25 1,304 40 13쪽
62 의료도시 율레르 +1 18.10.25 1,187 41 16쪽
61 늑대와 사자 +6 18.10.24 1,305 37 16쪽
60 늑대와 사자 +2 18.10.24 1,260 39 11쪽
59 엘뉴르 공작 +4 18.10.23 1,364 42 13쪽
58 엘뉴르 공작 +3 18.10.23 1,241 41 17쪽
» 엘뉴르 공작 +3 18.10.22 1,353 45 19쪽
56 엘뉴르 공작 +7 18.10.19 1,430 50 13쪽
55 가도 전투 +6 18.10.18 1,362 48 14쪽
54 가도 전투 +5 18.10.17 1,365 50 21쪽
53 가도 전투 +10 18.10.16 1,390 48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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